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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관 조선3
전시실 소장품
전시실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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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사회 재건을 위한 노력
-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국가 기강은 해이해졌습니다. 국가와 지배층은 유교 윤리를 더 강조하여 이러한 위기를 타개했습니다. 유교적인 신분제를 강화하고 성리학적 종법宗法 질서를 생활화하여 사회를 재정비 했습니다. 예학禮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북벌론北伐論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유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이자 사회를 통합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피폐해진 국가 재정과 조세 제도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습니다.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전쟁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임진왜란(1592-1598) 이후 조선은 농업 중심 사회에서 물품과 화폐가 활발하게 거래되고 인구 이동이 활발한 사회로 변화했습니다. 전란 중에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물자를 구입하면서 상업 활동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17세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어 생산물이 증가하면서 시장이 늘어났습니다. 17세기에 지방의 특산물 대신 곡물과 면포로 세금을 내는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물과 면포로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게 되어 점차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조선 상인이 중국의 비단을 일본 상인들에게 은화銀貨를 받고 파는 중개 무역이 이루어져 은화 유입이 늘어났고 은화가 고액 화폐로 기능을 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말 중국과 일본이 직접 교역을 하면서 조선으로의 은화 유입이 줄어들면서 조선 내에서 고액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제작되어 상업과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습니다.
18세기 탕평과 문예 부흥- 숙종肅宗(재위 1674-1720)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하며 정국을 주도하는 환국정치換局政治에 주로 의존했던 것과 달리, 영조英祖(재위 1724-1776)와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정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蕩平策으로 국정을 안정시키고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18세기 초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고 영조는 조세 제도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상업 유통망이 활성화되면서 한양이 상업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실력이 있는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인 계층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과 서양의 발전된 학문이 들어와서 학문이 다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18세기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이루어졌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였습니다.
19세기 민의 성장과 시대 전환- 1800년 정조正祖 승하 후 노론 벌열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 세도정치世道政治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문의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도 정권 아래에서 국정國政이 문란해졌고, 민들은 점점 어려워지는 삶을 민란民亂으로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 청과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며 무역과 거래를 담당한 중인과 상인이 성장했습니다. 한편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판단하지 못하고 서양을 배척하는 척사斥邪 정책으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고종高宗(재위 1864-1897)은 개항開港 조약을 맺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며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데 늦었고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기 어려웠습니다.
전시 동영상
* 이 영상은 음향을 제공하지 않습니다.활자의 나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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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의 나라, 조선 Joseon : The Movable Type Dynasty
활자 소개 :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활자를 보관하고 있는 곳, 국립중앙박물관(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Home to the largest collection of movable type in the world).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에서 제작, 사용한 금속활자 50만여 자, 목활자 30만여 자(500,000 pies of metal movable type and 300,000 pies of wooden movable type).
활자 종류 : 임진자壬辰字 세종世宗이 만든 갑인자甲寅字의 글자체로 1772년 정조가 다시 만든 활자. 조선왕조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글자체(Imjinja type Movable type cast based on Gabinja type(a typeface created by King Sejong) in 1772). 정리자整理字 1796년에 정조正祖가 계획하여 개량한 활자 정조를 상징하는 활자(Jeongnija type Movable type invented and refined by King Jeongjo in 1796). 한구자韓構字 김석주金錫胄가 당대 서예가 한구韓構의 글씨체로 만든 활자(Hanguja type Movable type originally created by Kim Seokju in imitation of the calligraphy of Hangu). 한글 금속활자 1461년 이전에 만든 활자,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현조 최고最古의 활자(Metal movable type in the Korean alphabet "Hangeul" The oldest pieces of metal movable type with a clear date of production cast around 1461). 한글 목활자 정조가 백성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 만든 활자(Wooden movable type in the Korean alphabet "Hangeul" Movable type used to print a range of state-published texts translated into Korean).
활자 보관 : 82만여 자의 활자는 수장고에 활자의 종별, 부수와 획수별, 글자별로 구분하여 보관(820,000 pieces of movable type housed in the storage room). 수년에 걸쳐 활자를 글자체와 글자별로 분류 정리(Classification of movable type by typeface and character over the years). 작고 무거운 활자를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활자 보관장(Storage chests designed for convenience of storing movable type).
활자 보관장의 종류 : 위부인자장衛夫人字欌 갑인자체 활자를 보관했던 장. 나무 나이테 분석 결과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Storage chest for Gabinja-based type made in mid 17th century). 실록자장實錄字欌 실록자를 보관했던 장(Storage chest for Sillokja type). 정리자장整理字欌 1858년 정리자를 다시 주조할 때 제작한 장(Storage chest for recast Jeongnija type in 1585).
서랍 : 활자의 분류, 보관 방법을 알려주는 서랍들(Drawers with inscriptions regarding the storage and classification system of movable type). 정리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서랍(Drawers with inscriptions regarding the storage and classification system of movable type). 자주 쓰는 글자들을 넣은 정간판(Partitioned drawer for frequently-used characters). 뒷면에 한시漢詩를 쓴 서랍(A Poem inscribed on the back of a drawer).
수리,복원 : 소목장小木匠이 전통 방식을 살려 수개월에 걸쳐 활자장活字欌을 수리, 복원(Repaire and restoration of storage chests by traditional method). 정리자장整理字欌 안쪽에 기록된 장인匠人의 이름과 제작 시기(Inscriptions regarding the craftsmen and the year of the production of storage chest). 서랍에서 발견된 다양한 기록들(Drawers with various inscriptions).
활자의 나라, 조선 Joseon : The Movable Type Dynasty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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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 소개 : 의궤儀軌 의궤란 의식의 궤범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해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사업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이후 참고하여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의도이다. 특히 임금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는 다른 분산용 의궤보다 품격이 높다.(분상용 의궤 / 어람용 의궤) 고급종이에 해서체로 정성껏 글씨를 쓰고 안료로 곱게 그림을 그린 후 (직접 그은 붉은 색 선, 천연 안료로 곱게 그린 그림, 단정한 해서체 글씨) (흰 비단을 사용한 제목, 비단으로 감싼 표지, 국화꽃 모양의 놋쇠 변철, 원형 고리 장정) 의궤의 보관 어람용은 규장각이나 외규장각에 보관하였고, 분상용은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 관련업무를 담당하는 관서 등에서 보관하였다. (외규장각 / 오대산 사고) 외규장각 의궤의 수난 19세기 커다란 변화의 흐름이 조선에 다가오던 시기, 조선은 척사斥邪와 개항開港의 사이에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발발하였고, 이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가지고 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 의궤는 박병선 박사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고 2011년 145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명지대학교 LG연암문고)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1759년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영조의 첫 번째 왕비인 정성왕후가 50년을 해로하다가 사망, 왕이 두 번째 왕비를 맞을 때도 첫 결혼 당시의 왕비 나이가 기준이었기 때문에 66세의 왕이 15세의 왕비를 맞았다.
의궤 구성 : 의궤는 일종의 행사 총괄보고서 목록을 통해서 행사에 참여한 사람, 관련된 공문서, 분담업무 등을 알 수 있다. (계사 국왕의 명령과 신하들의 보고 사항을 날짜별로 정리. 이문,예관,내관 업무 협조를 위해 예조, 병조, 호조 등과 주고받은 문서. 품목과 감결 각종 물품 조달과 인력 배치, 인건비 지급, 의궤를 만드는 일 등과 관련하여 각각 하부 관청에서 올린 품목과 상급 관청에서 아래 관청에 지시한 감결을 날짜별로 모은 것.) 행사와 관련된 각종 문서들이 형식별, 날짜별로 모여 있다. 의궤는 행사시 사용한 물품의 목록과 재료, 개수까지 그림과 함께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위아래 가장가리에 가로대는 나무[邊竹橫木]는 산유자(山柚子) 나무를 사용한다 길이는 1자 2치 5푼이다 앞면은 침향운문단(沈香雲紋緞)으로 너비가 1자 8치이고 다음은 백운문단(白雲紋緞)으로 너비가 5치 5푼이다) 의궤 속의 의궤, 각방의궤 임금이 결혼할 때는 가례도감이 설치되었고, 가례도감은 도청이라는 총본부를 중심으로 업무에 따라 일방·이방·삼방과 지원 부서인 별공작·수리소 다섯 기구를 두었다. 각 방에서 이루어진 담당 업무를 세밀하게 보고.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 업무에 대한 책임과 자부심을 심어주다. "행사에 필요한 물품은 재활용 한다" 낭비를 최소화 한 결혼식. (지금 치르는 잔치야말로 더욱 절약해야 하니 감선을 생각한 마당에 반상(盤床), 봉과(封裹) 따위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반차도 : 의궤 마지막 부분 '반차도'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정순왕후를 영조가 친히 모셔오는 친영 의식을 담은 그림. 선두 행렬 행렬의 맨 앞에서는 행사에 직접 관련된 부서 수정들이 먼저 모습을 보인다. 어가 행렬 이어서 왕의 행차를 인도하는 군병들과 교룡기, 둑을 비롯해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이 앞장선다. (교룡기 : 상상 속의 큰 용을 그린 깃발, 둑 : 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 각종 의장물과 의장기는 축제의 분위기를 돋운다. 가까운 신하들과 호위병, 각종 깃발과 의장물을 들고 가는 의장병, 악대가 지나가면(부연 :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만든 빈 가마) 드디어 임금이 탄 가마가 등장한다. (연 : 임금의 가마) 임금의 뒤에는 신하들이 수행한다. 사관과 의관이 꼭 따른다. 왕비 행렬 주인공인 왕비의 행차. 앞에는 와비 책봉을 알리는 상징적인 문서와 도장, 의복을 실은 가마가 지나고, 말을 탄 나인들과 시녀에 둘러 쌓여 왕비의 가마가 이어진다. 후미 행렬 행렬의 뒤에는 이날 행사를 준비한 책임자들과 경호 인물들이 따른다. 250여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1,118명의 인물들. 신한평 이필한 현재항 등 17명의 화원들이 그린 세밀한 반차도.
가치 : 우리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기록 유산, 사진이 없던 과거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궁중의 생활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한 의궤. 세계 어디에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기록 정신. 후세에 부끄럽지 않겠다는 정신이 아직도 생생한 색채처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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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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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관
고려(918~1392), 조선(1392~1897), 대한제국(1897~1910)실로 꾸며진 북쪽 전시 공간은 당시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하여, 관람객이 한국 중세, 근세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도록 꾸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