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봐야 할 각 시대별로 가장 귀중한 문화 유산인 명품 30선을 놓치지 마세요!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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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구석기
- 재질돌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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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산업/생업 - 선사생활 - 생활구일체 - 생활구일체
- 크기L 23.6cm
주먹도끼는 끝부분이 뾰족한 타원형 석기로, 뭉툭한 부분을 손으로 쥐고 여러 용도로 사용했던 구석기시대 도구입니다. 돌의 한쪽을 떼어 낸 뒤 반대편을 다시 떼어 내 지그재그 모양의 양면 날을 만들었습니다. 구석기인들은 미리 전체적인 모양을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 원하는 형태의 주먹도끼를 제작했습니다. 주먹도끼는 서유럽, 중동, 아프리카, 영국, 인도,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며, 대략 17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주먹도끼를 만든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1940년대 초반 미국 고고학자 모비우스(H. L. Movius)는 구석기문화를 유럽의 주먹도끼 문화권과 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고, 동아시아 지역에는 주먹도끼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동아시아 지역이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유럽・아프리카・중동 지역에 비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뒤처졌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전곡리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되자 세계 고고학계는 크게 놀랐고, 이러한 이분법적 이론은 폐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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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신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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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석기
- 재질흙 - 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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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발
- 크기현재높이 38.1cm, 현재높이 25.9cm
덧무늬토기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여러 기하학적 무늬는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토기는 서울시 암사동 집터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겉면을 삼등분하고 각각 다른 무늬로 장식하였다. 토기 아래쪽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은 깨진 토기를 임시로 수리하여 사용했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당시의 토기는 누구나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드는 기술자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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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청동기/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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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초기철기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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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민간신앙 - 동신신앙 - 방패형동기
- 크기길이 13.5cm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농경문 청동기(農耕文 靑銅器)로 윗부분만 남아있다. 농경문 청동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통해 농경과 관련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던 의식용(儀式用) 도구로 여겨진다.농경문 청동기로 불리고 있으나 그 형태상 방패형 동기(防牌刑 銅器)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몸체 가장 윗부분에는 작은 네모난 구멍 여섯 개가 배치되어 있는데 구멍마다 조금씩 닳아 있어 끈으로 매달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 면에는 정가운데 세로 방향과 가장자리 윤곽을 따라 빗금, 선, 점선을 이용한 무늬띠가 돌아가고 그 안쪽 빈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쪽 면 오른쪽에는 머리 위에 긴 깃털 같은 것을 꽂은 채 따비로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인물이 있고 왼쪽에는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다. 다른 한쪽 면에는 오른쪽과 왼쪽 모두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새끼모양의 둥근 고리가 끼워져 있는 꼭지[?]가 한 개 달려있다.농경문 청동기는 인물, 농기구, 경작지 등을 추상적인 선으로 묘사해 청동기시대의 농경과 농경 관련 의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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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부여/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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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초기철기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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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길이 31.5cm, 길이 30cm
창원 다호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목관묘군의 하나로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다호리 유적 널무덤〔木棺墓〕의 가장 큰 특징은 관 아래 무덤 바닥 한가운데 부장품을 넣기 위한 구덩이〔腰坑〕를 판 것인데, 이는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호 무덤의 구덩이에서 발견한 바구니에서는 옻칠한 칼집이 있는 한국식 동검과 철검・청동 투겁창・쇠 투겁창・화살 같은 무기류와 따비・쇠도끼 등 철로 만든 농공구류, 중국 거울과 허리띠 고리・구슬 같은 장신구, 다양한 칠기와 그 안에 담긴 곡식, 부채, 말방울, 오수전, 붓, 노끈 등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중국 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기록에는 풍부한 철광산과 제철 기술을 보유한 변한이 낙랑과 왜에도 철을 공급했으며,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호리 유적에서는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씩 묶은 주조철부와 중국계 유물, 야요이 토기 같은 왜계倭系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즉 당시 변한의 지배 세력들은 철의 생산과 통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유지, 확대해 나갔습니다. 다호리 유적은 이런 변한 사회 지배층의 집단 묘지이며, 그중 가장 다양하고 많은 부장품이 출토된 1호 무덤의 주인공은 변한의 지배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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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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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라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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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합
- 크기높이 19.4cm
경주의 호우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입니다. 그릇 바닥에 새겨진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자를 통해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이듬해인 을묘년(415)에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고 거기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이 고구려에서 이 그릇을 받아 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그릇을 ‘호우’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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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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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백제
- 재질금속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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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의생활 - 관모 - 관건식
- 크기높이 22.2cm, 현재길이 2.1cm, 너비 13.4cm
1971년, 공주 무령왕릉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4,6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묘지석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는 삼국시대의 유일한 왕릉이자 동북아시아 고분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습니다. 무령왕릉은 묘제墓制와 출토품에서 당시 백제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중국제 도자기와 진묘수鎭墓獸, 매지권買地券을 비롯해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든 목관 등은 6세기 전반 중국 남조南朝와 백제, 왜를 연결하는 문화 교류망을 나타냅니다. 또한 금제 관 꾸미개[金製冠飾]가 왕과 왕비의 머리 부분에서 2점씩 포개진 상태로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역사책인 『구당서舊唐書』에 “왕의 관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烏羅冠]에 금꽃[金花]으로 장식했다.”라는 설명이 있어, 무령왕릉의 금제 관 꾸미개를 역사 기록 속의 금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왕비의 관 꾸미개는 얇은 금판을 맞새김해 무늬를 좌우 대칭이 되도록 했으며 달개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중앙에는 7장의 연꽃잎으로 장식한 대좌 위에 활짝 핀 꽃을 꽂은 꽃병이 있으며, 그 주위로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 장식을 배치해 불교의 세계관을 사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관 꾸미개는 백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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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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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삼국
- 재질금속 -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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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높이 56.5cm, 너비 63cm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갑옷과 투구입니다. 갑옷은 가로로 긴 조금 넓은 판과 좁은 판을 못으로 고정한 뒤 몸의 곡선에 맞춘 횡장판갑옷입니다. 투구는 복숭아씨앗 모양을 닮았는데 목 부분을 가리는 긴 철판이 투구 뒷부분에 붙어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어깨를 가리는 갑옷도 출토되었는데, 당시 대가야 지역 판갑옷의 정수를 볼 수 있습니다.
- 전시위치
선사고대관 >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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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신라
- 재질금속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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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의생활 - 관모 - 관 - 금관
- 크기전체높이 49.2cm, 높이 27.0cm, 지름 17.0cm
三個의 병으로 接着한 좁은 環條. 五個의 花樹狀立飾을 附飾. 環條의 兩線에는 二條의 打出珠文帶가 있고 다시 上中下 三段에 笠形座를 打出해서 中央에서 絲를 내서 小원板의 步搖를 달았음. 立飾에도 같은小步搖가 多數 달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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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길 > 역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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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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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탑
- 크기
고려시대에는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 평면 사각형의 석탑 또는 새로운 양식으로 다각(多角)석탑이 나타나는데, 이런 것과 달리 특수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풍군 경천사지(敬天寺址)에 남아 있었는데 일본에 불법 반출되었다가, 서울 경복궁에 복원되었다. 부재(部材) 전체가 회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건조하였다.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양식을 보여주고 전체의 균형이 아름다워 주목되는 탑이다. 기단 평면은 아자형(亞字形)으로 3단을 이루었으며, 탑신부는 1, 2, 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4층부터는 탑신이 사각형을 이루었는데 층마다 옥신(屋身)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집 양식의 두공(枓栱) 형태를 조각하였다. 윗면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불, 보살, 인물, 용, 천부(天部) 등이 빈틈없이 조각되어 장식이 풍부하고 조각수법이 정교하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석탑이 조선시대 초기에 다시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유례가 없는 희귀한 작품이다. 제1층 옥신 이맛돌에는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는데 '지정 8년'(至正八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탑의 건립 연대가 고려 충목왕 4년인 1348년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으로 보아 중국탑의 새로운 영향이 영향이 탑에 많이 반영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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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고대관 >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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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통일신라
- 재질금속 -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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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상
- 크기높이 150cm, 무릎너비 118cm, 두께 86cm
이 철불 좌상은 머리는 나발에 육계는 크고 넓적하다. 둥근 얼굴에 턱은 작으며, 볼에는 살이 올라 있다. 이마의 선은 반듯하고,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눈썹이 가늘고,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는 올라가 있다. 입술은 작고 얇으며, 귀는 큼직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양손은 따로 제작하여 팔목에 끼운 듯하나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가슴은 넓고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노출한 편단우견식의 옷차림이다. 가슴 근육과 젖가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옷자락의 주름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사실적인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전통을 잘 계승한 철불로, 이후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된 철불의 모본이 되는 작품이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고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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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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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교화 - 경전
- 크기세로 34.5cm, 가로 12cm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해 말한 불교 경전으로, 중국 북량의 인도 승려 담무참[Dharmakema]이 번역한 것이다. 현존 열반경류 경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완비된 이 경전은, 여래의 법신은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가 없으며, 모든 중생은 불성(부처로서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승大乘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 유물은 1241(고종 28)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반열반경의 유일본으로, 각 경판 맨 앞의 판수제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권차, 장차, 함차를 표시하였다. 장차의 단위는 장丈자를 쓴 초조대장경판과 달리 장張자를 썼다. 간혹 함차 아래에 쓴 것은 경판을 직접 새긴 각수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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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관 > 조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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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금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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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통과학 - 인쇄 - 활자
- 크기
"1461년에 간행된 『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에 사용한 한글 활자입니다. 『능엄경』은 ‘큰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되기 위해 보살들이 닦는 수행법을 설한 경’이며, ‘언해’란 한문을 한글로 풀어서 쓴다는 뜻입니다. 『능엄경언해』는 세조가 한글로 풀이한 『능엄경』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것으로,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한글로 번역한 책입니다. 본문의 한문 부분은 1455년에 강희안姜希顔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찍었습니다.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는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 즉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 활자’라고하며, 『능엄경언해』에 처음 사용해 ‘능엄한글자’라고도 합니다. 이 한글 활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을해자가 주조된 1455년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1461년(세조 7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계승해 국가 주도로 수십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어 다양한 서적을 인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여러 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다른 한자 문화권 국가와도 다른 조선 인쇄문화의 특징입니다.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지만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만든 활자 가운데는 한글 금속활자도 있습니다. 특히 『능엄경』을 찍은 이 금속활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활자일 뿐 아니라 한글 활자라는 점에서 우리 문화의 독창성을 잘 보여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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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관 > 조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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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나무 - 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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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인쇄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입니다.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간행되었으니 목판은 그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판에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바탕으로 고을, 교통로와 통신 시설, 군사 시설 등 각종 정보를 정교하게 조각했습니다. 목판의 크기는 대개 가로 43cm, 세로 32cm 안팎이며, 목판 하나에는 남북 약 47km(120리), 동서 63km(160리)의 지리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년쯤 된 피나무를 사용했으며 목판의 앞뒤 양면에 앞뒷면을 모두 사용해 조각했습니다. 대동여지도 전체를 조각하려면 목판 60매 정도가 필요하며, 목판으로 인쇄한 지도를 모두 이어 붙이면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형 전국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12개의 목판 중 11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목판에는 〈대동여지도〉를 처음 간행한 뒤에도 김정호가 교정과 수정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음을 보여 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지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김정호의 열정을 잘 보여 줍니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조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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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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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예술 - 문헌 - 기타
- 크기세로 34.2cm, 가로 21.9cm
이 의궤는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8월까지, 수원 화성 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화성 성곽은 원래 10년 예정의 계획을 세웠으나 정조가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지시한 축성의 방략(御製城華籌略)에 따라 착공되어 32개월 만인 1796년(정조 20) 완성되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축성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들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거중기擧重機는 서양의 과학 기술에 정통한 다산 정약용이 서양의 역학기술서力學技術書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 당시 40근의 힘으로 무려 625배나 되는 2만 5000근의 돌을 들어올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전시위치
중근세관 >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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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금속 -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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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통과학 - 인장 - 인장 - 새인
- 크기가로 9.2cm, 세로 9.2cm
1897년 10월, 고종은 서울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皇帝)에 오르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선포하였다. 이후 고종은 정부조직, 관직 명칭, 제례를 포함한 의식 및 예절을 바꾸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그 조치 중 하나가 이전에 사용하던 국새(國璽)를 황제국가의 품격에 맞게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거북이 장식을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 후 잠시 일본에 빼앗겼던 이들 국새와 어보(御寶)는 해방 후 되찾아 총무처에서 관리하던 중 한국전쟁으로 많은 수가 산실되고 현재는 ‘대원수보(大元帥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3개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대원수보는 군대 운영과 관련된 업무에 사용한 것이고, 제고지보는 고급 관원의 임명에 사용하였다. 칙명지보는 통신조서에 사용한 것이다. 이 국새는 천은(天銀)에다 금으로 도금한 것으로 인수(印綬)는 없어진 상태다.
- 전시위치
서화관 > 외규장각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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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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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질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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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생활 - 기념 - 비
- 크기너비 102.7cm, 두께 25.7cm, 높이 218.0cm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로, 낭공대사(朗空大師, 832~916)의 탑비이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서예 신품사현(神品四賢) 김생(金生, 711~791?)의 글씨를 모아 정리하여 만든 집자(集字) 비석으로 김생의 글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서예사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김생은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신라의 왕희지(王羲之)'로 추앙받는 명필로, 그의 글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연구된 바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작지만 김생의 힘찬 필치를 잘 보여준다. 집자된 김생 필적을 통해 통일신라 서예의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비석 앞면에는 낭공대사의 일생과 업적이 새겨져 있는데, 낭공대사는 916년 2월에 열반하였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문신이자 명필의 한사람인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낭공대사의 문하인 단목(端目)이 김생의 글을 집자하였다.
- 전시위치
서화관 >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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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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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세로 42cm, 가로 102.5cm
- 전시위치
서화관 > 불교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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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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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교화 - 경전
- 크기세로 36.1cm, 가로 12.4cm
화면 오른쪽에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장면을 그리고, 왼쪽 편에 경문(經文)의 설화 내용을 그린 『법화경』 제4권의 변상도이다. 석가 설법 장면은 오른손을 들어 설법에 열중하고 있는 부처와 그 주위를 아난과 가섭존자, 8대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에워 싼 모습과, 그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청문중(聽聞衆)을 표현하였다. 청문중 위쪽으로는 전각과 같이 생긴 탑이 보이는데, 그 안에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그려져 있어 「견보탑품 見寶塔品」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파도 위로 솟아오른 연화좌에 보살 모양을 한 용녀가 앉아있는 모습의 「제바달다품堤婆達多品 」을 표현하였다.
- 전시위치
서화관 > 목칠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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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뼈/뿔/조개 - 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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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주생활 - 생활용품/가전 - 가구 - 함
- 크기높이 12.7cm, 너비 68.5cm, 길이 44.5cm
나전은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내어 물건의 표면에 붙여 넣는 장식기법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대부분 12세기 이후의 유물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는 작은 국화, 모란, 넝쿨 무늬가 촘촘하게 새겨 넣어진 경전함(經典函)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크고 대담한 무늬가 새겨지거나 회화적으로 표현된 함, 상자, 장롱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뚜껑을 위에서 덮어 씌우는 형태의 이 상자는 관복이나 의복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뚜껑의 겉면과 몸체의 옆면에 연꽃넝쿨 무늬를 새겼다. 연꽃 무늬는 활짝 핀 꽃과 봉오리를 섞어가며 배치하였는데 전체 무늬는 휘날리는 듯 하지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균형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연꽃 무늬나 넝쿨무늬의 잎은 휘어져 있는 상태의 자개를 무늬대로 오려낸 후 망치로 때려 붙이는 방법[打撥法, 打?法]을 사용하였는데 무늬의 면에 생긴 균열이 또 하나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다. 줄기는 자개를 길쭉하게 끊어 연결하는 끊음질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작고 촘촘한 꽃 무늬에서 벗어나 무늬가 커지고 바탕의 여백이 넓어지는 등 새로운 무늬 표현 방법을 보여주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 전시위치
기증관 > 기증문화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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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유럽 - 그리스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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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군사 - 장비 - 갑주 - 주
- 크기높이 22cm, 너비 18.7cm, 너비 27cm
이 청동투구는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가 기증한 것으로, 서구 유물로는 유일한 지정문화재(보물 제904호)이다. 이 투구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코린트에서 제작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 제전 때 승리를 기원하면서 신에게 바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올림피아에서 발굴된 이 투구는 실제로 썼을 때 눈과 입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완전히 가려지는 형태로,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기념비에 새겨진 무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처럼 완벽한 원형을 유지한 예는 거의 없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 우승자에게 이 고대 투구를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 대회에 출전한 손기정은 42.195km를 2시간 29분 19.2초에 주파해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다”는 올림픽 규정으로 인해 이 투구는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될 수 없었고, 이후 투구는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그 후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 정부는 옛 우승자 손기정 선수에게 이 투구를 전달하였고,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손기정 선수의 뜻에 따라 이 청동투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불교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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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통일신라
- 재질돌 - 화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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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상
- 크기전체높이 275.0cm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미륵보살>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짓고,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 있다. 연대가 확실하여 통일신라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작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육계가 크고 편평하다. 넓적한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 구멍이 나 있다. 오른손은 들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밑으로 늘어뜨렸다. 법의(法衣)는 얇아서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 있다. 옷주름은 가슴에 U자 모양의 주름이 물결치듯 밑으로 흘러내려 있으며, 두 다리에 다시 평행 U자 모양 주름이 흘러내려 있다. 광배는 거신광에 두광과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전시위치
사유의 방 > 사유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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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삼국
- 재질금속 - 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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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예배 - 불상
- 크기높이 90.9cm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고 고개 숙인 얼굴의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의 반가사유상이다. 이러한 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덧없음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상을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 하였다. 반가사유상은 이 상과 같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도 만들어졌다.입가에 머금은 생기있는 미소, 살아 숨쉬는 듯한 얼굴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된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일본 고류 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모습이 비슷하여 영향 관계가 주목되는 상이기도 하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금속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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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금속 - 동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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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종교신앙 - 불교 - 공양 - 정병
- 크기높이 37.5cm, 입지름 1.1cm, 몸통지름 12.9cm, 바닥지름 8.6cm
정병은 맑은 물을 담아두는 병으로, 본래 승려가 지녀야 할 열 여덟 가지 물건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불전에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의식을 할 때 쇄수게(灑水偈)를 행하면서 의식을 인도하는 승려가 솔가지로 감로수를 뿌림으로써 모든 마귀와 번뇌를 물리치도록 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정병은 대체로 몸체가 계란형이며, 매끈하게 빠진 긴 목 위로 뚜껑 형태의 둥근 테가 놓인다. 그 위로 다시 대롱형의 물을 넣고 빼는 첨대(尖臺)가 솟아 있으며, 몸체 한쪽에는 중간을 잘록하게 좁힌 비녀처럼 생긴 귀때[注口]가 튀어나와 있다. 정병은 물가의 풍경을 담아냈는데, 언덕 위로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물 위로 노를 저어가는 어부와 낚시꾼 등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 모든 풍광이 표면에 홈을 파서 은선을 두드려 박는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되었다. 병의 긴 목에는 구름무늬, 동체의 어깨와 굽 주위에는 여의두무늬[如意頭文], 귀때에는 풀무늬[草文]가 입사되었다. 은을 돌린 굽은 지금은 파랗게 녹슨 몸체와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청동제의 병에 은상감을 한 예는 적지 않으며, 이러한 기법이 고려청자에도 통용되어 주목된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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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고려
- 재질도자기 -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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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생활 - 의례생활 - 제례 - 향로
- 크기전체높이 15.3cm, 지름 11.5cm
이 향로는 고려청자의 대표적인 명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 향로는 향이 빠져나가는 뚜껑과 향을 태우는 몸통,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받침으로 이루어진다. 각각 다른 모양을 기능적으로 결합하여 완성된 조형물로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음각, 양각, 투각, 퇴화(堆花), 상감, 첩화(貼花)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롭게 이용되었다.
- 전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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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도자기 - 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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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병
- 크기높이 9.4cm, 지름 24.1cm
모습이 자라를 닮아 있어 자라병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끈을 매어 휴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로 옹기로 만들었던 생활 용기이므로 분청사기나 백자로 된 것은 많지 않다. 이 자라병은 몸체의 바탕 위에 백토를 씌워 본바탕을 희게 분장한 후, 모란 무늬를 그리고 무늬 외에 바탕을 칼로 긁어내어 그 무늬가 도드라지도록 표현하였다. 긁어낸 바탕은 철분이 많은 안료顔料를 붓으로 덧발라 구웠기 때문에 바탕색이 검은빛을 내어 모란꽃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시각적 효과까지 높였다. 대담하고 활발한 모란의 구성과 여백을 메꾼 흑갈색의 철채 장식 등이 어우러져 다른 분청사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같은 시대 백자에도 이런 자라병이 간혹 보이지만, 이 병처럼 높이가 낮고 원형의 두 면을 위아래로 맞붙여 완성한 형태는 흔하지 않다.
- 전시위치
조각공예관 > 도자공예-백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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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한국 - 조선
- 재질도자기 -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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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높이 46cm, 입지름 20.3cm, 바닥지름 15cm, 몸통지름 46.0cm
"백자 달항아리는 눈처럼 흰 바탕색과 둥근 형태가 보름달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후기 백자 문화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 무렵에 경기도 광주 관요官窯, 특히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되었습니다. 높이가 40cm에 이르는 큰 항아리이기 때문에 커다란 대접 두 개를 위아래로 잇대어 붙여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항아리 중앙쯤에 붙여 만든 흔적이 확인되며 좌우 대칭이 완벽하지 않고 살짝 이지러져 있습니다. 커다란 백자 항아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문을 열었던 미술사학자 고유섭,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서양화가 김환기,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우리 문화재와 관련하여 주옥같은 글들을 발표했던 최순우 등 당대 저명한 문화인들의 애호를 듬뿍 받았던 이 항아리는 맑은 흰 빛과 너그러운 둥근 선으로 형상화되어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잘생긴 항아리로 손꼽힙니다. 최근 서울 종묘, 병기 제조 등을 관장했던 군기시 터 등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어 왕실 및 중앙관청에서 저장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자 항아리는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미의식과 정서를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전시위치
세계문화관 > 중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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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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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질섬유 -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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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생활 - 의례생활 - 상장
- 크기세로 188.5cm, 가로 93.2cm
투루판 지역의 대표적인 고분 유적인 아스타나 무덤에서 발견된 이 그림은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 두 신이 서로 마주본 자세로 표현되어 있는데, 왼쪽이 여신인 여와, 오른쪽이 남신인 복희이다. 두 신은 각각 컴퍼스(規)와 구부러진 자(曲尺)를 들고 있다.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사람의 모습을 한 상반신과는 달리 하반신은 뱀과 형상으로 꼬여 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그림을 천정에 걸 때 못을 박았던 흔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림을 그린 천은 실을 여러 번 꼰 후 짠 마로, 근래에 보는 마보다 두툼한 느낌을 준다. 두 폭을 가로로 이어 직사각형의 화면을 마련했으며,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 부분에도 이은 부분이 있다. 바탕천은 원래 파란색이었으나, 현재는 가장자리를 제외한 대부분이 초록색으로 바래있다. 복희와 여와의 모습은 강한 묵선으로 윤곽선을 그린 후 붉은색과 흰색 안료를 두껍게 발라 완성했다. 배경에는 해와 달,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재현하고 있다. 그림의 세부 표현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색채가 선명하고 구도가 균형 잡혀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요소가 혼합된 투루판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투루판 지역은 일찍이 한족漢族 문화가 소개된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된 부장품에서는 중국적인 소재나 특징이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얼굴과 손에 보이는 음영 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등에는 중앙아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 전시위치
세계문화관 > 인도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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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아시아 - 인도
- 재질돌 -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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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크기불신높이 115cm, 너비 51cm
‘보살’은 원래 깨달음을 얻기 전의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대승불교가 흥성하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며 다른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로 그 의미가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세속인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차림새를 한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보살은 ‘도티’라는 치마를 걸치고 상반신에는 숄을 두르고 귀걸이·목걸이·팔찌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 보살상은 사실적인 묘사와 품위 있는 모습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입니다.
- 전시위치
세계문화관 >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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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중국 - 송
- 재질도자기 -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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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식생활 - 음식기 - 음식 - 주전자
- 크기높이 16.4cm, 입지름 5.6cm, 몸통지름 11.5cm
이 주전자는 반구(盤口)형의 입을 가졌고 몸통은 원형에 가깝다. 어깨와 입둘레와 사이에 두 개의 귀가 달려 있으며 주둥이[注口]는 몸통에 비해 긴 편이며 뀌때 밑에 줄을 묶어 놓은 듯한 무늬[結繩文]를 세 개의 원형으로 그려 넣어 꽃을 겹쳐 놓은 것처럼 표현했다. 손잡이는 짧은 편이고 몸통은 오이 모양의 형태에 여섯 줄의 선이 둘러져 있다. 바닥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옥벽저형(玉璧底形)이다. 유약은 회백색으로 고르게 발랐으나 표면의 상태는 좋지 않다.
- 전시위치
세계문화관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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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시대
일본 - 에도
- 재질종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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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화예술 - 서화 - 회화 - 일반회화
- 크기세로 28.5cm, 가로 25.3cm
11세기 초 헤이안(平安) 시대의 여성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쓴 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그림으로 나타낸 화첩이다. 이 소설은 히카루 겐지(光源氏)라는 출중한 외모에 재능은 물론 높은 신분까지 두루 갖춘 귀족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헤이안 시대 귀족 생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일본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 화첩을 그린 것으로 전하는 도사 미츠오키는 일본 특유의 채색 회화인 야마토에(大和繪)의 전통을 계승한 도사파(土佐派)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에도 시대의 눈으로 바라본 헤이안 시대 귀족의 이미지를 알 수 있으며, 일본 고유의 문자인 히라가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