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 선사·고대관 고구려실
    고구려실

    전시실 소개

      • 고구려실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나 궁궐터,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꾸미개, 막새와 전돌, 불상 등을 전시하였다. 대부분 고구려 유적이 집중된 중국과 북한 지역에서 일제강점기에 수습된 것으로, 당시 지배층의 문화를 반영한다. 고구려의 군사정책뿐만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보여 주는 한강 유역의 군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제 무기, 공구도 함께 전시하였다. 무덤 벽화의 모사도는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 고구려高句麗[기원전 37~기원후 668, 『삼국사기』]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6세기 무렵 북으로 중국 요하遼河[지금의 랴오허강]에서 길림성吉林省[지금의 지린성] 송화강松花江[지금의 쑹화강],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한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의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왜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전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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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대체 텍스트입니다.)
      고구려의 고분은 현실의 세계와 중공계의 세계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고분의 주인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길 원한다. 하지만 어떻게 두 세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고구려인들은 고분벽화를 통해 그 방법을 찾았다. 천 오백년 전, 고구려인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와 말초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그 은비의 기세를 맹렬하게 펼쳐나갔다. 나라의 위세가 커짐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면서 개방적이고 성숙한 문화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 문화의 흔적은 무덤 속 고분벽화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신들의 삶과 죽음 너머에 이상 세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은 모두 2만여 개, 그 중 벽화가 그려진 고분은 100여개가 넘는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부터 7세기까지 4백여년의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벽화의 주제는 사회 환경과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생활풍속, 장식 무늬, 사신도 등이 선택되었다. 5세기 초까지는 무덤 주인의 살아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벽화 속에 옮겨 놓은 게 많다. 초기 생활 풍속 계열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생전에 살았던 집안 대문처럼 꾸며 졌다. 무덤 칸의 모서리와 벽의 윗 부분에 갈색 알료로 그린 기둥과 들보는 목조 가옥의 뼈대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안악 1호분의 전각도에서 고구려 귀족의 저택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저택은 바깥채와 안채로 나눈다. 앞 쪽에는 커다란 바깥채를 두었고, 뒤쪽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창고와 고깃간등 부속 시설을 두었다. 고구려 귀족의 삶은 넉넉하다. 부엌에서는 여인들이 한 상 가득 음식을 준비 했고, 고깃간에는 돼지와 노루 같은 짐승들이 널려있어, 풍요로움을 전해주고 있다. 주인 부부가 생활하던 안채다. 머리 장식이 돋보이는 부인은 남편을 향해 다소곳이 앉아 있고, 정좌를 한 남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에게서 보호를 받고 있어, 이들 부부가 고위층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손님을 맞이 할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주인과 손님이 갖가지 음식 시중을 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융성한 손님 접대 또한 넉넉한 생활의 단면이다. 고구려인의 춤은 고구려의 세련된 문화의식과 예술 성향을 가늠하게 한다. 남녀가 두 줄로 나란히 선 합주된 노래장단에 맞춰 긴 소매를 나풀거리고 있다. 행군을 하는 도중이나 군대의 진영 안에서 펼쳐지는 춤은 고구려인의 위용과 문화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고분 벽화에서 확인된 악기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망라하여 30가지가 넘는다. 거문고, 뿔나팔은 그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악기다. 고구려인이 사람들의 정서를 하나로 모으는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은 격투기도 즐겼다. 씨름과 수박희는 현실 세계의 놀이이기도 했지만, 죽은 자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장성의식의 하나이기도 했다. 수박희의 동작은 오늘날의 태권도와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냥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다.

      왕이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대규모의 사냥은 고구려의 제일 놀이요, 일종의 군사 훈련이였다. 산과 들의 짐승을 적으로 삼는 모의 전투를 통해 기마, 무술과 같은 전투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그 포획물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것이다. 한껏 몸을 돌려 목표물을 조준하는 무사,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그에 질세라 앞 뒷발을 힘껏 내디며 달리는 호랑이와 사슴, 물결치듯 흐르는 산세도 사냥터의 긴장감에 숨을 죽인 듯 하다.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고분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습과 더불어 상징적인 세계로 확대된다. 문지기는 무덤을 지키는 상서로운 존재로 자리 잡았다. 무덤의 칸의 천장에는 나무기둥을 대신하여 하늘 세계를 떠받치는 우주의 영사가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신화적인 존재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태양 신의 아들이다. 하늘 세계의 해와 달은 고구려인들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분벽화는 해와 달은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해는 동그라미 안에 새발 까마귀가 들어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달은 두꺼비, 옥토끼, 계수나무가 들어있다. 역시 모두 신화의 근거한 것이다. 이제 고분은 현실의 연장이기보다는 죽은 자를 위한 또 다른 세계가 되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고구려인의 우주관과 신앙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5세기의 불교가 크게 확산되면서 고분벽화의 주제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많아 졌다. 연꽃은 5~6세기의 걸쳐 벽화의 주요 소재로 그려졌다.

      이는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난 부부, 다음 세상에서도 인연을 이어가려는 애틋함이 엿보인다. 6세기 중엽부터 고구려는 평양과 지안 대개에 지역문화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불교 외에 음양오행설과 도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고분벽화의 주제도 변화되었다. 초기 고분의 무덤 칸의 천장을 조그맣게 장식하던 장식하던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벽면 전체를 차지하며 무덤을 지키는 상서로운 존재로 등장한 것이다. 평양 지역 고분벽화의 사신은 배경이 거의 생략되어 있는 벽면에 그려져 있다. 세련된 필체와 선명한 채색이 잘 어우러진 사신은 상상 속의 동물임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실감이 느껴진다. 사신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 하늘의 28개의 별자리와 관련된 상상 속의 동물이다. 초기에는 쌍으로 등장하던 청룡과 백호가 이때부터가 단독으로, 주작은 암수의 쌍으로, 현무는 뱀과 거북의 자웅합체로 그려졌다. 지안 지역의 고분벽화는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담고 있다. 배경과 조화를 이루는 연출력과 오색을 써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회화적 표현을 통해 사신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천장 고임에는 해과 달신을 비롯하여 농사의 신, 대장장이신 등 여러 신들이 능숙한 솜씨로 표현되어 있다. 이제 고구려인이 상상하는 신화의 세계와 우주의 창조는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고분벽화는 668년 고구려 멸망과 함께 성장의 속도를 멈추고 지하 깊은 곳으로 사라져 갔다. 압록강변에서 기원한 한국의 고대국가 고구려. 강대한 기상과 원대한 꿈을 펼쳐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우뚝 선 나라. 700년의 역사 속에서 광대한 생활권을 확보하고 고도의 문화를 누렸던 위대한 선조의 나라. 고구려의 활약은 이제 역사의 일부로 남았지만, 문화 대국으로서의 패기와 자부심은 고분벽화를 통해 부활하고 있다. 고분벽화의 표출된 고구려인의 당당하고 개방적인 태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거침없는 상상력과 세계관은 고구려인의 역사인 동시에 오늘 우리가 이어 가야 할 진정한 자산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무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무덤' 에 대한 대체 텍스트 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을 위한 고분.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서로 경쟁하며 강력한 왕국을 건설해 나갈 무렵 거대한 무덤 고분이 등장하였다. 고분은 각 나라의 중심지인 수도와, 그 인근 지역에 조성되었는데, 그 수가 무려 수 만개에 이르렀다. 살아 있을 동안 최강의 나라를 꿈꾸며 전력을 다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자들. 죽은 뒤에도 자신의 힘과 권위를 과시하고자 헸던 그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영원한 왕국을 세웠다. -고구려 옛 고구려의 수도, 지안. 밀집되어 있는 고분의 수가 무려 1300여개. 그 크기는 집 한 채만한 것에서부터 산처럼 웅장한 것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고분은 축조한 방식에는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과 널판 위에 돌을 쌓고 흑으로 마무리한 돌방무덤이 있으며, 두 형식이 비슷한 비율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고분 하나.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군총이다. 무덤은 한 면의 길이가 33M가 넘고, 전체 높이는 13M에 이르며, 정교하게 깎은 1100여개의 화강암을 쌓아 완성했다. 장군총은 1500년의 세월을 비켜간 듯 오늘날까지 위풍당당하다. 그 비결 하나가 들여쌓기에 있다. 고구려의 독특한 축조기술인 들여쌓기. 수많은 성벽을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던 이 기술은 작은 틈새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을 특징으로 하여 오랜 세월을 견뎌낸 힘으로 작용했다. 장군총은 강성했던 고구려의 힘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장군총보다 더 큰 고분도 있다. 태왕릉이 바로 그것인데, 무덤 한 면의 길이가 66M, 전체 높이 15M에 달하는 거대 규모의 고분. 장군총보다 많이 훼손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웅장했던 규모를 가늠케 한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고분에서 방울 하나가 발견됬는데, 신묘면 호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호태왕, 그는 누구인가. 호태왕은 고구려의 19대 왕으로,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강대한 왕국을 건설했던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의 다른 이름이다. 이로써 태왕릉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태왕릉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비. 고구려인들이 왕릉을 지킬 때 많은 인력과 정성이 들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은 무려 330여가의 인력을 동원하여 왕의 무덤을 관리하게 했다고 전하였다. 무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또 다른 집이라고 여겼던과 다르게, 왕릉은 그 권위만큼 크고 웅장하게 만들고 관리 또한 철저했으리라. 그런데 고구려의 주검은 땅속이 아니라 지상에 안장되어 있다. 태왕릉에선 주검이 7층 높이에 있는 널방에, 장군총에서는 5층의 널방에 안장되어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무덤인 돌무지무덤의 내부적 구조로 인한 독특한 현상이였다. 돌무지무덤은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을 말한다.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 무덤은 맷돌을 네모지게 깔고, 그 위에 널을 놓은 뒤 다시 맷돌을 덮는 구조였다. 다음단계의 무덤에서는 땅 위의 돌무지가 흩어지지 않도록 무덤 아랫 부분에 네모단 판석을 둘러 기단을 마련했다.

      이후에는 기단 위에 겉면의 구획을 잡아서 돌로 곽벽을 쌓아 올린 뒤, 겉면의 둘레에 새로운 단을 만드는 것처럼 윗 부분에 몇 겹의 돌을 덮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발전한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유행하게 되는데, 다듬은 돌로 장방형 또는 방형의 널방을 만들고 한쪽 면에는 널방과 통하는 널길을 두어 흙을 덮어 매장을 마감하는 무덤 형식이다. 태왕릉과 장군총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돌무지 무덤에 굴식 돌방무덤이 결합된 돌무지 돌방무덤이다. 이형태 무덤에는 널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널길이 있기 때문에 추가장이 가능하다.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의 왕국인 고구려. 무덤이 영원히 보존되기는 바라는 그들의 마음은 태왕릉의 전표에 남아있다. 태왕의 능이여 산처럼 안전하고 견고하게 보존되소서. -백제 공주 송산리 고분군. 두꺼운 벽돌을 걷어내자. 150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열린 적 없었던, 비밀의 문이 열렸다. 무덤 밖을 향해 서있는 기괴한 모습의 돌짐승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널길따라 무덤안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유물들이 흩어져있었다. 이곳에서 무려 3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덤의 주인이 신었던 금동신발, 지배층, 권력자만이 지닐수 있었던 화려하게 장식된 고리자루칼, 꽃줄기가 타오르는 불꽃 모양으로 형상화된 섬세함 금제관 꾸미개로 출토되었다. 무덤 형식도 낯선 것이였다. 수천 장의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 널길과 널방을 만든 벽돌무덤으로 천장은 둥근 아치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벽돌무덤은 백제 초기 한성시대의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다르고, 후기인 부여 능산리의 굴식 돌방무덤과도 다른 생소한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오직 송산리 고분군 이외에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연꽃무늬가 아름다운 이 벽돌무덤은 중국 남정 양나라의 무덤과 동일한 형식이였다. 무덤 형태, 수많은 유물들, 과연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해답은 돌짐승 앞에 있는 두 개의 돌탑. 즉 지석에 있었다.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이 62세되던 계모년 5월 7일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마왕은 누구일까. 삼국사기 백제 본괴에 의하면 무령왕의 이름이였다. 삼국시대의 수많은 고분들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순간이 였다. 지석 위에는 양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보여진 90개의 철제오수전이 놓여져 있었다. 이것은 무령왕이 죽은 해에 만들어 진 것으로, 당시 백제와 양나라 간의 문화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려준다. 무덤 안의 밝혀 던 것으로 보이는 6개의 등잔은 현재 남겨진 가장 오래된 백자로 추정된다. 발견된 다른 도자기들도 양나라 수도 난정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남았던 나무 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말해준다. 나무 널의 재료는 침엽수종으로 금송으로 밝혀졌는데 일본에서만 자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유사한 것이 일본 규수 구마모토현의 고분과 나라현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됬었으며, 무령왕릉의 청동거울 또한 일본의 칸노야마 고분 출토품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무령왕은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백제를 재건하는데 힘썼으며, 519년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이제 백제는 다시 강국이 되었노라. -신라 경주의 대릉원. 약 12만평의 대지의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20여개가 모여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황남대총. 1972년 황남대총의 북분 발군이 시작되었다. 막대한 양의 흙과 돌을 걷어내자 널이 있던 자리에 무덤 주인의 흔적이 나타났다. 무덤주인의 머릿 부분에 반짝이는 고깔모양의 무엇인가 있었다. 그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금관이였다. 대릉원에서 발견된 금관만 다섯, 모두 순금재이다. 금관은 신라 천년의 역사 가운데서 5~6세기에 대형 돌무지 덧널무덤에서만 발견되었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땅속이나 땅 위에 주검을 안치한 관과 껴묻거리를 넣은 상자를 넣고, 이것들을 덧널로 덮은 뒤, 그 위를 돌로 덮고 나서 공투를 씌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돌방무덤이나 벽돌무덤과는 달리 출입이 불가능하고 덧널이 썩어 함몰되면 끝내 굴을 돌무지와 공터가 메꾸게 되므로 추가장이 불가능한 구조이다. 황남대총은 돌무지 덧널무덤을 두 개를 이어 붙여서 표주박 모양으로 조성한 쌍분으로 북분과 남분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무려 57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북분에선 목걸이와 팔찌, 고곡 등의 꾸미개가 남분에서는 철기, 토기 등의 무기가 주로 출토되었다. 그 중 당연 눈길을 뜨는 것은 황금제 유물이다. 13줄의 띠두르기가 달려있는 금제허리띠 꾸미개, 금판과 금판을 덧대어 만든 화사한 금제 팔찌, 나팔형 받침이 달린 금제굽다리접시 등 정교하고 화려한 금제품들이 대량으로 발견 된 것이다. 특이하게도 로마 유리계통으로 추정되는 유리병들도 출토 되었다. 이처럼 호화로운 부장품과 함께 황남대총에 묻힌 사람은 누구였을까. 특히 북분에서 발견된 금과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금관과 발견된 은제허리띠에 그 주인을 추정할만한 단서가 있었다. 허리띠에 부인대라는 명분으로 보아 금관의 주인이 여성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금관의 주인공은 여왕이 아니였을까. 한편에 남분에서는 금관이 아닌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와 함께 고리자루칼이 발견되어 무덤주인이 지배 계급의 남성임을 짐작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남분의 주인은 신장이 약 170CM인 60세 전후의 남성이다. 그런데 이 남성이 신라 최대의 무덤에 고리자루칼과 함께 매장됬을 정도의 권력이라면 그의 신분은 왕이였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쌍분은 부부묘를 전제할때 북분의 여성은 왕비로 생각했다. 신라 최대의 고분 황남대총, 그곳에서 발견된 금관의 주인은 절대 권력자인 왕이 아니라 왕비였던 것이다. 1924년에 발견된 금령총 금관은 다른 금관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금관의 작은 방울이 매달려 있어 금령총이라 부르는 데, 출토된 금관의 관태 지름은 16.4CM 이는 다른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들에 비해 작은 크기이다. 함께 발견된 금제허리띠 꾸미개 길이도 71CM로 다른 무덤에서 발견된 허리띠 꾸미개 길이보다 짧은 길이다. 따라서 금령총 금관의 주인은 어린아이로 추정된다. 이와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금관은 최고 지배자 이외에 왕족이나 유력자들도 남녀노소 상관없이 지닐 수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 5세기 무렵에 등장하려 약 150여년간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던 금관의 주인들. 이들이 사라진 후 이 땅에서 금관은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고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거대한 무덤들은 점차 사라진다. 더 이상 무덤을 통해 자기 집단의 세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가 사회의 기본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화장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삼국시대 말기부터는 거대한 무덤이 점차 사라지고 규모가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거대한 무덤, 우리는 삼국시대의 지배자들의 권력의 상징인 고분을 통해 수천년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만나 보았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각 나라의 문화가 고스란히 보관되어있는 고분은 그 사회의 거울이자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보여주는 비밀의 열쇠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대체 텍스트입니다.)
      동아시아의 정복자, 고구려의 이름과 강력함을 널리 알린 동아시아의 위대한 대왕, 광개토대왕 왕의 이름을 물려받은 나, 광개토대왕. 왕의 위엄을 온몸에 새겨 이곳에서 영원히 노래한다. 나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였던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을 기르기 위한 영광의 상징이다.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던 414년 20대왕위를 계승한 장수왕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이름은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의 영광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나는 높이 6.39M, 면의 넓이는 최대 2M, 측면은 최대1.4M, 세계에서 최대 위용을 자랑하는 비석이다. 나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고구려 건국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왕위 계승, 광개토대왕의 무수한 업적들, 그리고 묘지기에 대한 사항이 1775자로 새겨져 있다. 제 1면1행~6행까지 새겨져 있는 첫 부분엔 고구려왕조가 하늘의 신 천제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의 자손임을 알린다. 거룩한 신분을 타고난 시조 동명성왕, 알에서 태어나고 장성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391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대왕의 운명은 담덕, 후에 영토를 크게 넓히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왕이라는 뜻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줄여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시호로 불리게 된다. 제 1면 7행~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눈부신 업적들이 상세하게 새겨져 있다. 대왕은 진안 지역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동부여 남으로 백제, 신라, 가야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세력을 넓혔으며, 일생 64성 1400여개의 마을을 함락했다. 특히, 고구려의 신하국을 자처한 신라가 백제와 왜 침략으로 도움을 요청할 때 마다, 광개토대왕이 몸소 정벌에 나섰으며, 이러한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는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예서체를 사용한 호우 중에 청동 호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 3면 8행~제4면 9행까지는 능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규정이 새겨져있다. 광개토대왕까지 이어진 19대 왕에 걸맞게 선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과 선왕을 지키는 묘를 지키는 묘지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 광개토대왕비 또한, 태왕비를 지키는 영원한 묘지기가 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고구려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다음, 나 광개토대왕비는 세월의 흐름 속에 조금씩 잊혀졌다. 내가 서있는 곳은 청이라는 나라가 되었다. 청나라는 배두산일대를 자신들의 발상지로 신성시 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했고, 나는 홀로 모진 비바람을 건뎌야 했다. 19세기 후말, 청나라의 통제가 풀리며 나 광개토대왕비는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내가 품고 있는 웅장한 비문과 그 위용에 감탄하며 손수 비문을 탁본하였다. 한때 일본은 나의 비문을 증거로 삼아 왜가 신라, 가야, 백제를 식민으로 삼았다는 임나일본설을 주장했지만, 고구려 후손인 수많은 학자들이 비문 탁본 연구 끝에 나의 비문 속에 남긴 고구려의 진정한 역사를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별자가 새겨진 방울이 발견되여 무덤의 주인을 찾은 태왕. 그리고 태왕릉을 지키는 나 광개토대왕비는 이제 전세계에 알려졌다. 지금은 비록 나의 후손들과 떨어져 이국땅에 있지만 저 위대한 고구려의 왕을 기억하라. 나 광개토대왕비를 만들어 세운 이들의 바람처럼 고구려의 후손들은 나와 용맹했던 고구려의 왕을 기억하기 바란다. 선조들이 전하고자 하는 그 영광의 의미를 알기에 나 광개토대왕비를 잊지 않는다면, 많은 세월이 지나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위용과 광개토대왕의 영광을 진실되게 알릴 수 있으리라.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던 동아시아의 위대한 광개토대왕. 그의 영광을 온몸에 그은 나 광개토대왕비는 언제나 같은자리에서 대왕의 영광을 기억하는 후손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