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명
세한歲寒 -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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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1실
- 전시기간
2020-11-24~2021-04-04
- 담당부서
미술부 오다연
(02-2077-9483) - 전시도록
- 공유하기
세한歲寒의 시간, 송백松柏의 마음
‘세한’은 설 전후의 가장 심한 추위를 이르는 말로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전시 1부에서는 19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예술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1840년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겪은 세한의 시간과 <세한도>의 제작 배경을 조명합니다.
2부에서는 김정희 곁에서 소나무처럼 한결같이 힘이 되어준 벗들과
김정희 사후 그의 학문과 예술을 이어갔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세한도>가 176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올 수 있도록 결심한
손창근孫昌根(92세) 선생과 부친 고故 손세기孫世基(1903~1983) 선생의 숭고한 뜻을 알립니다.
<세한도> 기증을 기념하는 이번 특별 전시에서 세계적 문화유산인 <세한도>와
그 역사적인 기증이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o 전시품
: 김정희의 <세한도>, <불이선란도>, 허련의 <김정희 초상> 등 15점
* 리플렛과 전시안내 내려받기
* <세한도>에 적힌 모든 감상 글 알아보기
* 전시도록 살펴보기
o 강연 동영상(4회)
- 강연 동영상은 공개일 오후에 박물관 누리집과 국립중앙박물관 YouTube에 업로드합니다.
이후 계속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연번 |
강사 |
세부내용 |
공개일정 |
1 |
유홍준(명지대학교) |
김정희의 삶과 예술 1 (제주 유배 이전) |
12.3.(목) |
2 |
유홍준(명지대학교) |
김정희의 삶과 예술 2 (세한도와 그 이후) |
12.8.(화) |
3 |
최완수(간송미술관) |
김정희와 세한도 |
12.15.(화) |
4 |
박철상(한국문헌문화연구소) |
김정희의 금석학 |
12.22(화) |
* 특별전과 연계하여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는
테마전 "김정희와 그의 벗"(2020.10.12.~2021.4.6./무료)가 진행됩니다.
김정희와 그의 사람들
인물관계도 및 인물 소개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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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 <김정희 초상>, 19세기 중반
- 김정희, 1786~1856, 조선 문신·금석학자·서화가.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경주 김씨 명문가 장남으로 태어난 조선 19세기 대표적인 문인이자 서예가이다. 그는 ‘추사’, ‘완당’ 등 100개 이상의 호를 썼고 수백 개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책을 많이 읽었으며 청나라에서 유행한 최신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24세 때 사행단의 일원인 부친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가서 만나고 싶었던 금석학의 대가인 78세의 옹방강을 만나 능력을 인정받고 이후 편지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50대에 종2품 벼슬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세도가문 안동 김씨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견제를 받아 55세 때 유배형 중 가장 무거운 제주도 자택감금형에 처해졌다. 한겨울 추위와 같은 세한(歲寒)의 유배 생활은 1년, 2년, 3년 속절없이 지나갔다. 김정희에게 정체성과도 같은 소중한 서적을 보내주는 등 유배를 간 스승을 극진히 살핀 이상적의 소나무와 측백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마음에 감사하며 한 편의 서화를 보냈다. 세한의 시기를 버티게 해준 소중한 벗에게 보내는 김정희의 마음을 전시에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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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경이 두 며느리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 1828년 12월 17일
- 김노경, 1766~1837, 조선 문신, 유당
김정희의 든든한 부친 김노경은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김한신의 손자로, 종1품에 오를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아들이 없는 형 김노영에게 자신의 아들 김정희를 양자로 보내 김정희가 종손이 되었다. 사행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김정희를 데려가 아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집안 여인들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를 많이 남겼다. 그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가까이에서 모신 중요한 인물이었다. 63세 때 중요한 요직인 평안감사로 부임했는데, 40대 초반의 김정희는 부친을 따라 평양에서 지내기도 했다. 45세 때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안동 김씨 세력의 상소가 빗발쳐서 고금도(완도) 유배에 처하여 3년 동안 지냈다. 복직하여 69세 때 종1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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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 1842년
- 예안 이씨, ?~1842, 김정희의 부인
김정희는 15세에 첫 결혼을 했지만 20세 때 사별하고 23세에 예안 이씨와 재혼했다. 부부 금슬은 좋았으나 자식이 없어 김정희의 12촌인 김태희의 아들 김상무를 양자로 들였다. 김정희가 부인 예안 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많이 전한다. 편지에는 아내를 살피는 살뜰한 남편의 면모와 반찬 투정을 하는 철없는 남편의 면모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예안 이씨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때에 사망했다. 사망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김정희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부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뒤늦게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정희는 “형벌을 받을 때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부인의 상으로 놀라 그 마음을 진정할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라며 절망적인 심정을 토해냈다. 유배지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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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돈인, 세한도, 19세기 중반
- 권돈인, 1783~1859, 조선 문신·서화가
권돈인은 “몸은 각각이지만 마음은 하나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친한 죽마고우이자 평생지기였다. 권돈인은 학문에 조예가 깊은 김정희와 막힘없이 학예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중에 가족에게는 하지 않는 힘든 심경을 털어놓으며 권돈인에게 많이 의지했다. 권돈인은 김정희가 먼저 사망한 후 크게 상심한 와중에도 그의 복권을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다. 김정희가 관직을 되찾게 되자, 관복을 입고 있는 김정희의 초상화를 주문하여 제작할 정도로 벗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그는 김정희의 <세한도>와 같은 이름의 그림을 그렸다. 김정희가 건조하고 메마른 세한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먹으로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거칠게 그린 것과는 달리 물기 있는 먹으로 소나무, 대나무, 바위로 이루어진 아늑한 공간을 표현하여 재미있는 대비를 이룬다. 그림 오른쪽의 커다란 ‘세한도’글씨는 김정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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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련, <완당탁묵첩> 중 수선화부, 1877년 이후
- 허련, 1808~1893, 조선 19세기 화가
허련은 김정희가 가장 아꼈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역시 스승을 가장 각별히 모신 제자였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을 때, 먼 길을 마다않고 세 번이나 스승을 찾아뵈었다. 허련은 김정희의 그림 주문을 전달하는 중개인 역할도 했는데, 김정희는 초의선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날마다 허련에게 시달림을 받아서 병든 눈과 팔로 애써 바구니 가득 그림을 그립니다. 다 자기 빚이거늘 나에게 대신 갚게 하고 있습니다.”라며 한탄 아닌 한탄을 남기기도 했다. 허련은 스승의 글씨를 목판에 새기고 이를 인쇄하여 책으로 만들어, 김정희의 서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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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 <이상적 초상>, 청 1859년
- 이상적, 1804~1865, 중국어 통역관, 문장가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23세에 역관이 된 후 연경을 12번이나 왕래하였다. 스승에 대한 마음에 변함이 없어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간 후에도 청나라에서 구한 귀한 서적 등을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김정희는 어려운 시기에 이처럼 자신을 잊지 않고 한결같이 곁을 지켜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렸다. 『논어』에서 인용한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은 김정희의 그러한 마음을 잘 드러낸다. 이상적 역시 그에 응답하듯 <세한도>를 청나라로 가져가 소개하고 문인들에게 많은 감상 글을 받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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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 1846년
- 초의선사, 1786~1866, 승려
다산 정약용, 소치 허련,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문인 및 예술가들과 널리 교유한 승려이다. 김정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가 당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겼다. 김정희가 제주 유배 중 부인상을 당한 후에는 그를 위로하며 한동안 제주도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김정희가 가장 아꼈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허련을 그에게 소개한 것도 초의선사이다.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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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오세창, <완옹무고예>
- 오세창, 1864~1953, 서예가·언론인·독립운동가
김정희의 제자였던 중국어 통역관 오경석의 장남으로, 김정희가 해배된 후 과천에서 말년을 보낼 때 그의 제자가 되었다. 부친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가로 활동했으며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서화와 금석문을 연구하여 서화와 전각을 제작하고, 우리 미술의 역사를 정리해 『근역서화징』을 저술했다. 외형보다 정신을 중시하라는 김정희의 고예 임모 방법에 감명 받아, 김정희가 남긴 글씨에 “완옹무고예”라는 제목을 남기기도 했다. 손재형이 일본에서 찾아온 세한도에 마지막으로 감상 글을 남겼다.
※완옹무고예: 김정희가 따라 쓴 옛 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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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쓰카 지카시가 김정희 연구 성과를 경성일보에 연재한 글, 1939년
- 후지쓰카 지카시, 1879~1948, 학자
20세기 전반 본격적으로 김정희를 연구하고 그의 작품과 관련 자료를 수집한 일본인 학자이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후지쓰카는 청나라 경학을 연구하다가 청대 문인들의 글에 등장하는 김정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김정희를 순수하게 존경하여 이익을 따지지 않고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하여 김정희를 청조 학문에 정통한 경학의 대가임을 밝히는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김정희 사후 76년째가 되는 1932년 미쓰코시 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린 김정희 전람회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를 출품했다. 태평양 전쟁의 혼란을 뚫고 일본까지 찾아온 손재형에게 감동하여 조건 없이 <세한도>를 돌려주었다. 얼마 후 미군의 도쿄 공습으로 후지쓰카의 연구소에 있던 모든 자료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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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형, <해내존지기>, 1955년, 개인 소장
- 손재형, 1903~1981, 서예가, 국회의원
어릴 때부터 서예를 배운 손재형은 김정희를 연구한 스승의 영향을 받아 김정희를 알게 되고 그의 예술 세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42세 손재형은 후지쓰카가 일본으로 가져간 <세한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말에 일본으로 향했다. 당시 병중에 있던 후지쓰카를 두 달간 매일같이 찾아가는 정성을 보여 마침내 <세한도>를 받아 귀국했다. 손재형의 노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는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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