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일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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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영상] 조건 없는 문화재 사랑 – 기업가 김홍기
질박하지만 높은 뜻을 실천한 토기를 닮은 부부의 생애
조건 없는 문화재 사랑 홍산 김홍기·엄순녀
서울의 한 장학 재단, 기초과학 분야의 학자금과 연구비를 지원해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는 이곳은 기업인이었던 홍산 김홍기 선생의 유지로 만들어졌다.
<천영주 김홍기 선생·엄순녀 여사 며느리, 홍산장학재단 대표 인터뷰>
(아버님이) 공장을 운영하실 때 기계들이 아주 열악했어요. 그래서 일본 기계를 도입하셨고 그때 공장에 일본인들이 많이 오셔서 기술을 전수하셨거든요. 그때 ‘우리나라가 기계 쪽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우리가 살길은 과학기술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과학 분야와 이과 쪽으로 지원을 많이 하셨어요.
홍산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6·25전쟁 당시 혈혈단신 월남했다. 그는 전쟁통에 부두 노동자와 연탄 장사 등을 하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건축 자재와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등 7개 기업을 설립했을 만큼 자수성가했다.
<천영주 김홍기 선생·엄순녀 여사 며느리, 홍산장학재단 대표 인터뷰>
(아버님은) 새벽 4시쯤에 일어나셔서 신문 보시고 항상 연구하시고 책을 가까이하시고 잠도 매우 늦게 주무시고, 농사도 많이 지으셨고요. 그리고 분재를 좋아하셔서 어떤 토기에 심는 것이 분재를 더 살릴 수 있을까? 연구하시면서 토기에 관심을 두게 되신 것 같아요.
홍산, 토기 전문 박물관을 만들다
홍산 선생은 전국을 다니며 토기 수집을 시작했다. 뭐든 시작하면 열심인 성품이었다. 그렇게 모은 토기가 천 점을 넘어섰다.
<천영주 김홍기 선생·엄순녀 여사 며느리, 홍산장학재단 대표 인터뷰>
집에는 (토기를) 잘 가져오지 않으셨어요. (아이들이) 깰까 봐서요. 취급이 굉장히 어려웠어서 (토기는) 따로 모아두셨습니다. 아들(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꼭 박물관을 만들어서 후대에 (유물을) 전하라’고 유언하셔서 박물관을 만들게 됐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홍산박물관이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홍산박물관은 1992년 문화부에 등록된 사립박물관 1호 박물관입니다. 토기를 전문으로 하는 박물관이고요. (홍산박물관은) 한 7년간 유지를 했었는데 IMF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IMF 구제금융 위기를 겪으며 폐관하는 사립박물관이 늘어나면서 홍산박물관도 폐관 순서를 밟아야 했다.
사립박물관 문 닫아도 문화재 유실 수수방관
문닫는 개인박물관 늘고 있다...운영난으로 폐관 급증
아이들은 오백 원, 어른들은 천 원씩 입장료를 받아서 사실은 운영이 너무 힘들었어요.
생계만 남기고 모두 내놓다
박물관 이전 터를 구하고 재개관을 준비하던 가족들은 난관에 봉착했다. 박물관을 옮기려고 했던 곳은 접근성이 떨어졌고 이것은 유물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하라는 선친의 유지와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순녀 여사의 결심, 문화재 기증
고민 끝에 홍산 선생의 아내 엄순녀 여사는 기증을 결심했다. 엄순녀 여사는 홍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 일체를 국립청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만도 1,512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 중 토기가 천여 점에 이르는데 <달개 붙인 긴 목 항아리>는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인터뷰>
홍산 선생의 기증품은 매우 특별합니다. 우리나라 토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대별로, 또 각 시대의 기종별로 아주 체계적으로 수집이 되어있으므로 우리나라 토기 문화의 흐름을 한눈에 살필 수 있지요.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인터뷰>
엄순녀 여사께서는요, 부군 김홍기 선생 이상으로 숭고한 뜻을 가지신 분입니다. 실제로 부군께서 남긴 유지를 받드는 게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지신 것을 다 내놓으신 거예요. 회사 유지할 것,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것을 남겨놓고는 다 내놓으신 거거든요. 그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죠, 그런 높은 뜻을요.
기업 활동을 통해 모은 재산이라 하더라도 일정 규모 이상이면 사유재산이 아니므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 홍산 김홍기
홍산 김홍기 선생과 엄순녀 여사에게 ‘문화재 기증’이란 당연히 실천해야 할 사회적 의무였다. 홍산 선생이 사랑으로 수집하고 엄순녀 여사가 조건 없이 기증한 소중한 유물들은 부부의 바람처럼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더 큰 울림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