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일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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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영상] 토기사랑 한평생 - 인권변호사 최영도
서슬퍼런 군사 정권이 사법부의 공정한 법 집행에 외압을 가하던 1970년대.
공정한 재판을 지키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선 판사들
권력의 하수인이 되길 거부한 판사들 중에 최영도 선생이 있었다. 최영도 선생은 훗날 사법권 독립 선언서로 알려진 건의서를 제출하고 동료 판사들과 집단 사표를 제출하며 부조리에 저항했다.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판사 재임용에 탈락한 그는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들을 돕는 인권 변호사가 되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을 주도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출범에도 앞장섰다.
거대 권력에 대항하며 쉽지 않은 길을 가던 그의 삶에 즐거움이자 위로가 있었으니 바로 고미술품과 유물 수집이었다. 서화에 안목이 깊었던 아버지를 따라 전람회를 다니며 미술품에 눈 뜬 최영도 선생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사장으로 있던 보성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우리 문화재와 미술품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변호사로 전향한 후, 고미술품을 조금씩 사 모으던 그는 당시 수집가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토기에 눈을 돌렸다.
<최윤상 최영도 변호사 아들 인터뷰>
어느 날 토기를 한 점 사가지고 오셔서 토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 문화적 가치와 예술성에 대해서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토기가) 해외로 다 반출되면 어떡하나 누군가는 수집을 해야된다(고 하셨습니다.)
토기 수집에 뛰어들다.
뜻을 정하니 물러섬이 없었다. 그는 주말이면 전국 곳곳을 뒤지고 다니며 토기들을 수집했다.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수입이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최윤상 최영도 변호사 아들 인터뷰>
늘상 하셨던 이야기가 골프 라운딩을 한 번 하면 값싼 토기 두 점은 살 수가 있는데 내가 왜 그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골프를 치겠느냐
토기 수집 기록 수첩.
단순히 수집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 시대별, 출토지별 토기의 특징을 정리하고 이론화해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토기의 학술적 기반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모은 토기들이 어느새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되자 최영도 변호사는 이 토기들을 후세에 온전히 남길 방법을 찾고자 했다.
<최윤상 최영도 변호사 아들 인터뷰>
아버님께서 토기를 수집하실 때부터 늘상 하셨던 이야기가 있어요. 문화재라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과 사회의 것이다. 문화재 수집가는 잠시 맡아 보관하는 창고지기이다.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최영도 변호사는 기증을 택했다. 소중한 유물들을 모두의 유산으로 가장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20년 넘게 수집해온 토기 1,500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고, 이후에도 토기 수집을 계속해 총 여섯 차례 1,700여점을 기증했다.
<최윤상 최영도 변호사 아들 인터뷰>
‘잘 기른 딸 자식을 명문가에 시집 보낸 아비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 인터뷰>
이 한반도에 있었던 모든 토기, 모든 시대의 토기를 수집한다라는 그런 아주 큰 포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한 기종, 기형, 이런 부분들이 거의 대부분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기증자께서 얼마나 열심히, 혼신의 힘들 바쳐서 수집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가치를 몰라 사라져가던 토기들을 일찍이 알아보고 온 힘을 다해 수집하며 지켜왔던 최영도 변호사. 덕분에 우리는 수천 년을 함께 해온 토기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