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특별전 개최
  • 등록일2013-06-20
  • 조회수8523
  • 담당부서 미술부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특별전 개최  

       ㅇ 개 막 식 : 2013. 6. 24(월), 16:00

       ㅇ 전시기간 : 2013. 6. 25(화) ~ 8. 25(일)

       ㅇ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

       ㅇ 전시유물 :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등 81건 103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2013년 6월 25일(화)부터 8월 25일(일)까지 조선후기 대표 화가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탄신 300주년을 기념하여 “표암 강세황-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특별전을 개최한다.『표암유고』등 집안에 대대로 전해 오는 유물들과《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등 산수화, 초상화, 사군자화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망라하였으며, 그가 글을 남긴 다른 화가들의 작품도 선별하여 총 103점의 유물이 선보인다. 이 가운데, 강현, 강세황, 강이오 초상 등 보물 6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알려진, 강세황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강세황을 통해 화려하게 꽃피운 조선 18세기 예술계의 역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표암 강세황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이다. 개성 지역 유람하고 제작한 《송도기행첩》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강세황이 살았던 조선 18세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며 문예가 활짝 꽃피었던 시기다. 도시가 발달하고, 세상을 보는 눈과 생활 패턴이 빠르게 바뀌어 갔던 역동적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서양 문물을 포함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에 눈떴고 개성이 가득한 저술과 예술 작품을 창출하였다. 강세황은 예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 지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구었으며, 문예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비평가로서 업적을 남겼다. 그의 활발한 활동과 탁월한 안목은 임금에서부터 궁중의 화원, 재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문예를 매개로 신분과 지위를 넘나드는 네트워크 형성을 가능케 했다. 이 네트워크는 개별적 교유交遊를 넘어, 함께 예술의 지향을 공유하는 물줄기가 되었다. 강세황은 18세기 예술계의 역동을 이해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될 화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강세황 예술 세계의 면모를 6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의 주제는 ‘문인화가의 표상’으로, 70세에 강세황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 강세황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하여 정조의 명으로 이명기李命基(1757~?)가 그린 초상, 궁중화원 한종유韓宗裕(1737~?)가 그려준 초상 등 강세황 초상을 한 자리에 모아 살펴본다. 초상화가 크게 유행하던 조선시대에도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자화상은 흔치 않았다. 그런 이유로, 자화상을 여러 점 그리고, 자찬自讚까지 곁들인, 강세황의 자화상(보물 590-1호)는 그의 강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종유가 부채에 그려준 강세황 61세 초상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작품이다. 야외에서 한가롭게 앉아있는 자유로운 모습을 포착한 점에서도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흔치 않은 예이며, 강세황이 손자 강이대姜彝大(1761~1834)에게 준 것이라 스스로 적은 글을 통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각별한 사연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의 일생은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출세를 포기하고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한 뒤 벼슬길에 올라 상경하게 되기까지 30년 동안을 살았고, 61세가 되던 1773년, 뒤늦게 시작된 관직생활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현재의 서울시장)까지 올라가고, 70세 이상 정2품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으며, 중국 사행使行에 부사副使 자격으로 참여하여 건륭제乾隆帝를 알현하는 등 말년에는 남부럽지 않은 출세길을 달리게 되었다.  


   2부에서는 ‘가문과 시대’라는 주제로, 강세황의 일생을 담고 있는 각종 자료들을 소개한다. 현재 진주 강씨 문중에 전하는 강백년姜柏年(1603~1681), 강현姜鋧(1650~1733), 강세황 관련 자료들, 특히 관직 임명 교지敎旨, 각종 필묵들, 유고遺稿 등을 통해 일생을 재구성해 본다. 또한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강세황까지 삼대가 연속으로 기로소에 들어가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라 불린 가문의 위상을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씨를 통해 살펴본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 속에서 강세황의 예술가적 재능은 아들, 손자에게까지 이어져 강이오姜彛五(1788~?), 강이천姜彛天(?~1801), 강진姜晉(1807∼1858) 대대로 화업을 이었던 사실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3부에서는 ‘문인의 이상과 꿈’이라는 주제로, 안산에서 교유했던 여러 문사들, 화가들과의 만남을 살펴보았다. 30대 초반부터 안산에서 30년간 살면서, 강세황은 처남 유경종柳慶種(1714~1784)과 어울리면서 서화 감식안을 키우고, 화가 허필許佖(1709~1768)과 어울리면서 합벽첩을 제작하였으며, 안산 지역에서 열리는 시회에 참석하여 훗날 “안산15학사”라 불리는 문사들과 시를 나누고 폭넓게 교유하면서 문예 활동 영역을 확장하여 갔다. 그러한 교유관계는 <지상편도池上篇圖>(개인 소장),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개인 소장) 등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안산에서의 활발한 문예 생활을 거쳐 강세황이 평생 문인화가로서 서화수련에 힘썼던 삶을 살펴볼 것이다. 


   4부에서는 ‘여행과 사생’이라는 주제로, 실경을 그린 강세황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송도(지금의 개성), 전라북도 부안, 금강산 일대 그림, 건륭제 천수연千叟宴에 가는 길에 만난 중국 풍경을 그린 등을 선보인다. 아름다운 경치가 그림의 대상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그 풍광이 아름다워서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 지역을 찾게 된 강세황과 그를 초대한 지인 사이의 각별한 인연이 담겨 있다. 강세황이 송도를 방문하고 그린 <<송도기행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오수채吳遂采(1692~1759)와의 인연이, <지락와도知樂窩圖>에는 정택조鄭宅祚(1702~1771)와의 인연이, <우금암도禹金巖圖>에는 아들 강완姜俒과의 인연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강세황은 “진경산수는 그곳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시보다는 기행문이, 기행문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믿었다. 또한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금강산을 현장의 구별 없이 일률적인 기법으로 그려냈음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현장을 꾸밈없이 그대로 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송도기행첩>>와 <우금암도>에서 보이는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구도와 묘사는 그러한 강세황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우금암도>(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소장)는 아들 완俒이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재임할 시기, 강세황이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실경산수화로,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강세황이 영조英祖의 당부를 듣고 절필을 선언했던 기간 중에 그려진 작품이면서, 금강산처럼 즐겨 그리던 지역이 아닌 전라북도 부안 일대를 유람하며 남긴 유일한 실경산수화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5부에서는 ‘다양한 화목, 청신한 감각’이라는 주제로, 소재와 채색 구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추구했던 강세황의 면모를 조명한다. 봉숭아, 해당화 등 참신한 소재의 선택, 산뜻한 노란 색, 푸른 색 등의 감각적인 구사를 주목하였다. 강세황의 문인 필치와 감각적인 채색이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매난국죽을 한 벌로 그려 사군자의 의미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난죽도권蘭竹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시원시원한 구성과 완숙한 필력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강세황 사군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사군자 분야에서도 강세황의 끊임없는 서화수련은 계속되었다. 72세의 고령에 몇 달이 소요되는 중국 사행을 떠나면서 그 여정 중에도 혹시 중국 화가들의 대나무 그림이 조선 그림보다 더 좋은 이유가 종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중국 종이에 대 그림을 그려보았던 사실은, 그림의 더 좋은 완성도를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화가로서의 태도를 보여준다.

  

  6부에서는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라는 주제로,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보여주는 강세황의 비평이 담겨있는 조선시대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등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에 강세황은 친필로 화평을 남겼다. 그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지만,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 비평을 함으로써 자신만의 문예적 소양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강세황이 남긴 화평은 감식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화평 한 줄 한 줄은 오늘날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이번 전시는 18세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강세황의 대표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강세황이 역동적인 삶 속에서 평생 이어간 서화세계를 통해, 정조가 삼절三絶의 예술이라 칭송했던 그 예술의 정수精髓를 느껴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관련 행사>


ㅇ강세황 탄신 3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 일시 7월 5일(금) 오전 9시~ 오후 6시

  -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


ㅇ전시 설명

  평  일 : 오전 10시 30분, 11시 30분/ 오후 2시 30분, 3시 30분

  토요일 : 오전 11시 30분/ 오후 1시 30분, 2시 30분

  일요일 : 오전 11시 30분/ 오후 1시 30분, 2시 30분, 3시 30분


ㅇ큐레이터와의 대화

  전시기간 중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 혹은 7시 30분/ 특별전시실



<대표작품>

 

그림1. 강세황, <벽오청서도>

그림2. 강세황, <자화상>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지본담채, 30.5×35.8㎝,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강세황, <자화상自畵像>, 1782년(70세), 견본채색, 88.7×51.0㎝, 보물 제590-1호,

 진주강씨 백각공파 종친회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한 쌍의 오동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선비를 그린 그림으로, 벽오청서碧梧淸暑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종종 그려졌던 주제다. 중국의 화보畫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 실려 있는 명나라 심주沈周(1427~1509)의 같은 주제의 그림을 방倣하되 자유롭게 해석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첨재忝齋’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초기작임을 알 수 있다. 짜임새 있고 안정된 구도, 산뜻한 담채의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강세황이 손수 자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이다. 관모[오사모烏紗帽]에 평상복을 입은 모습은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출사出仕와 은일隱逸을 동시에 지향하는 사대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며, 초상화를 그리는 관행을 넘어선 문인화가로서의 당당한 기개를 보여준다. 화면에 스스로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다”고 적었다. 맑은 담채로 그린 하늘색 포袍와 금니로 장식한 다홍색 세조대細條帶가 어우러져, 담백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준다.

그림3. 강세황, <태종대도>

그림4. 강세황 <우금암도>

 

강세황, <태종대太宗臺>,《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지본수묵채색, 32.8×53.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 <우금암도禹金巖圖>, 지본수묵, 25.4×267.34㎝,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소장

송도(현재 개성)와 북쪽의 오관산五冠山,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 주변의 풍경을 그린 16점의 그림과 3건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 주변 명승지 그림을 한데 모은, 현존하는 유일한 서화첩이라는 데에서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첩에 수록된 글에서 강세황 스스로가 “이 첩은 세상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目擊”이라 평했듯이, 첩의 그림들은 조선시대 여느 그림들과 달리 원근법, 음영법 등의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아들 완俒이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재임할 시기, 강세황이 이틀에 걸쳐 부안의 변산 일대를 유람하며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강세황이 그림과 함께 적은 글은 『표암유고』의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에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다. 변산 특유의 암산巖山의 분위기를 굵은 갈필渴筆로 표현하였다. 명승지를 지나며 빠른 필치로 각 장소의 특징을 사생한 작품으로, 금강산과 처름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지역이 아닌 전라북도 부안 일대를 그린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림5. 강세황, <표암첩>

그림6. 강세황, <난죽도권>

강세황, <무>,《표암첩豹菴帖》, 견본수묵담채, 28.5×22.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 <난죽도권蘭竹圖卷>, 지본수묵, 39.3×283.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 2권에 26폭의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수록된 화첩으로, 강세황이 다양한 화목을 섭렵하고 담채 구사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은 화첩에 수록된 만큼 근경 위주의 생략된 표현들이 주를 이루며 채색에 있어 분홍, 노랑, 연두, 파랑 등 맑고 선명한 채색을 사용하여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처럼 강세황은 여러 화목이 접목되는 화첩에서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만의 개성과 회화세계를 선보였다

강세황이 78세 되던 1790년 봄에 그린 그림이다. 말년의 대나무와 난초그림의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모두 펼치면 3미터에 가까운 대폭의 두루마리이다. 구도를 보면 V자로 펼쳐진 두 그루의 대나무를 중심으로 좌우에 바위와 난초 등을 포치하여 구성하였다. 습윤한 수묵법의 바위와 속도감있게 처리된 경쾌한 갈필법의 난엽과 댓잎은 농담과 소밀의 대조만큼이나 정확하고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노숙하면서도 전형화된 필치는 만년기 강세황의 죽석, 난초 그림에 드러나는 특징이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특별전 개최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