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태자사 낭공대사 비석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사용해 뜻을 기록하고 전달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붓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한 기록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654년에 세운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해서체楷書體로, 삼국시대의 서예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생金生(711-?)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김생은 왕희지王羲之(307-365)와 안진경顔眞卿(709-785) 등 중국 서예가의 필법을 소화했을 뿐 아니라 강하고 활달한 필치로 개성을 드러내며 명필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태자사太子師 낭공대사朗空大師 비석’은 통일신라의 국사國師였던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려 고려 광종 때 세운 비碑로, 김생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해 글씨를 새겼습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으로 당나라에서 문과에 급제했던 최인연崔仁渷이 지었습니다. 오늘날 김생의 글씨는 거의 전하지 않으므로 ‘신라의 왕희지’,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은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비석입니다. 비석 옆면에는 조선 중기의 문인인 박눌朴訥(1448-1528)이 정중한 해서체로 비석을 다시 발견한 감동을 새겨 놓았습니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예술의 가치를 이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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