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낭관계회도>는 조선의 재정을 담당했던 관청인 호조(戶曹)의 관원들이 계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긴 그림으로, 16세기 중반 제작되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모임 풍속은 어떠했는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의 기록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림에서 산수 배경을 강조하고 인물들을 역원근법(逆遠近法)으로 표현하는 등 16세기 중엽 화풍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계회도는 고려시대부터 그려질 만큼 역사가 깁니다. 조선시대에는 친목 도모를 위한 관아(官衙) 구성원들의 계모임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계회도가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계회도는 윗부분이 그림 제목인 ‘표제(標題)’, 중간 부분이 계회 장면, 아랫부분이 참석자들의 명단인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호조낭관계회도>는 표제가 남아있지 않지만 계회 장면과 좌목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 호조 낭관들의 모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낭관은 실무 책임을 맡은 관원을 의미합니다.
<호조낭관계회도>의 회화적 특징
<호조낭관계회도>가 같은 시기 제작된 계회도와 다른 점은 ‘계회 장면’을 크게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1540년 제작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868호) <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와 1541년 제작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869호) <하관계회도(夏官契會圖)>가 배경을 크게 계회 장면을 작게 그린 반면, <호조낭관계회도>는 배경과 계회 장면을 대등하게 표현하여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까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계회 장면을 강조하여 그린 것은 1560년경 제작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871호) <연정계회도(蓮亭契會圖)>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미원계회도> 필자미상, <미원계회도>, 조선 1540년, 57×49cm, 보물, 신수13556
<하관계회도> 필자미상, <하관계회도>, 조선 1541년, 97×59cm, 보물, 신수13555
<호조낭관계회도> 필자미상, <호조낭관계회도>, 조선 1550년경, 93.5×58cm, 보물, 신수2234
<연정계회도> 필자 미상, <연정계회도>, 조선 1560년경, 94×58.2cm, 보물, 신수2235
<호조낭관계회도>의 제작 시기
<호조낭관계회도>에는 이 그림이 언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참석자들의 정보가 쓰인 좌목을 바탕으로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좌목에는 전‧현직 정랑과 좌랑 8인의 관직‧성명‧자(字)‧본관(本貫)‧부친의 관직과 성명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은 주로 16세기 중반 활동한 인물들입니다.
필자 미상, <호조낭관계회도>, 좌목 부분
*등장인물: 안홍, 이지신, 강욱, 신희복, 유진, 김익, 신여읍, 황준량(기록 순서에 따름)
순서 | 성명 | 생몰년 | 자 | 관직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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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安 鴻 | 1517-1582 | 子漸 | (전) 정랑 | 사헌부지평 겸직 |
2 | 李之信 | 1512-1581 | 元立 | (현) 정랑 | 춘추관기주관 겸직 |
3 | 姜 昱 | 1511-1574 | 光仲 | (현) 정랑 | - |
4 | 愼希復 | 1493-1565 | 養叔 | (현) 정랑 | 내승 겸직 |
5 | 兪 縝 | 미상 | 縝之 | (현) 좌랑 | - |
6 | 金 瀷 | 1504-미상 | 載淸 | (전) 좌랑 | - |
7 | 申汝揖 | 미상 | 濟■ | (현) 좌랑 | - |
8 | 黃俊良 | 1517-1563 | 仲擧 | (현) 좌랑 | - |
<호조낭관계회도>의 등장인물 정보
*생몰년 정보는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DB에 따름(http://people.aks.ac.kr/index.aks)
『조선왕조실록』에는 좌목의 등장인물 가운데 정랑이나 좌랑으로 활동한 사례로 황준량(黃俊良)의 기록이 확인됩니다. 황준량은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을 편찬할 때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는데, 1550년(명종 5) 9월 작성된 편수관 명단에는 그의 관직이 ‘호조좌랑’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中宗實錄』 105 · 『仁宗實錄』 2, 편수관명단). 또한 신희복(愼希復)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그가 “명종 경술년(1550) 호조정랑으로 내승을 겸하였다.”고 하였는데(『寒水齋集』 24, 參贊愼公神道碑銘), 이는 좌목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 기록들을 통해 <호조낭관계회도>는 1550년 무렵 제작되었으며 등장인물들이 호조의 전·현직 관원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호조의 역할과 <호조낭관계회도>
호조는 조선시대에 국가 재정을 담당한 관청으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합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호조는 인구[戶口] ‧ 세금[貢賦] ‧ 토지와 식량[田糧]등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정5품 정랑(3인)과 정6품 좌랑(3인)은 호조의 실무를 담당한 관원들이었습니다. <호조낭관계회도>에 따르면 전직 관원을 비롯해 현직에 있는 정랑과 좌랑들이 모두 참여하였는데, 실무를 맡은 관원들 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이를 기념하려고 이 그림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자 미상, <호조낭관계회도>, 계회 장면
그런데 좌목에는 계회에 참여한 8명의 이름이 기록된 반면, 계회 장면에는 9명이 묘사된 점이 시선을 끕니다. 계회의 주인공들은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반원 형태로 둘러앉은 반면, 그림 중간에 크게 그려진 인물은 검은 갓을 쓰고 상석에 앉아 인사를 받습니다. 검은 갓을 쓴 인물이 누구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계회가 정랑·좌랑의 모임이었던 만큼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참석했던 호조의 고위 관원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이처럼 <호조낭관계회도>는 16세기 회화의 특징, 관원들의 모임 풍속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