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귀하고 귀한 마음을 담아:박혜선

소중한 것, 특별한 것, 내가 보물로 생각하는 것.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물건을 어디에 보관하시나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을 상자에 담고 그보다 좀 더 큰 삼단 합에 넣어둡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 두 번 세 번 감싸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가 조선에도 있었나봅니다. 18세기에 제작된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白磁靑畵透刻牡丹唐草文壺]>는 보기 드물게 내항아리와 외항아리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군가 귀하고 귀한 것을 담으려고 솜씨 좋은 도공에게 의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며, 이 특별하고 귀한 항아리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26.5cm, 입지름 14.3cm, 바닥지름 16.5cm, 보물, K71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높이 26.5cm, 입지름 14.3cm, 바닥지름 16.5cm, 보물, K71

고도의, 고급의 장식 기법―투각(透刻)

조선백자의 장식 기법은 상감,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청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화려하고 돋보이는 장식 기법을 꼽자면 단연 투각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투각 기법은 도자기의 형태를 만든 후 흙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기면에 문양을 그린 후 구멍을 뚫어내는 기법입니다. 삼국시대 토기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복잡하고 장식적인 효과가 극대화되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입니다. 이후 투각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도자기를 장식하는 기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748년 조선 후기 문신 조명채(曺命采, 1700~1764)가 기록한 사행록(使行錄)인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처소의 창문을 보니, 위에 판자벽을 만들어서 물과 물에 뜬 꽃 형상을 꿰뚫어 새겼는데, 하늘빛이 맑게 비치어 바라보기에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하다.(見坐處窓戶 上作板壁 而透刻水形及浮花狀 天色照澈 望之恰似水流矣)”

이전 시기에는 투각이라는 용어가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지만, 예부터 전해져온 전세품(傳世品)들을 통해 훨씬 이전부터 기법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실제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투각 기법에는 음·양각 후 배경 부분을 도려내거나 도자기에 그린 무늬 자체를 뚫어내는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전자의 방법이 주로 쓰였습니다. 조선시대 투각 백자에는 음·양각 기법이 함께 등장하는데 청화나 동화 안료를 같이 써서 장식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약해서 제작 할 때 깨질 위험이 아주 크다는 단점이 있어서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장식 기법입니다.

세련된 장식, 정교함을 담다

‘조선백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주로 달항아리를 필두로 한 순백자이거나 그림이 있어도 여백을 한껏 살린 절제미 가득한 것들입니다. 실제로 조선 전기 백자들은 대개 간결하고 단순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이 항아리는 기면 전체에 큼직한 모란꽃을 네 군데 배치하여 정성스럽게 양각한 뒤 시원시원한 투각 기법을 베풀어 화려한 장식미를 극대화했습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아주 이례적인 백자입니다. 동그란 주둥이 아래로 목이 반듯하게 서 있고 어깨는 당당하고 건장해 보입니다. 바닥으로 갈수록 서서히 좁아지지만 불안감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입지름보다 바닥지름을 살짝 더 크게 만든 도공의 탁월한 미감 덕분일 것입니다. 어깨가 시작되는 부분에 푸른색 청화 안료를 사용해 당초문대를 둘러 화사함을 더했고, 잘록한 허리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양각하여 작품 전체가 화려하고 안정감 있게 보이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거기에 맑고 푸른빛이 감도는 투명한 유약이 자칫 과할 수 있는 화려함을 지그시 눌러주어 세련된 멋을 풍깁니다. 바닥은 살짝 들여 깎은 안굽이고,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있습니다. 이 항아리에 사용된 주된 장식 기법인 투각은 제작 첫 단계부터 불에 구워내는 마지막 공정까지 손이 많이 가고 파손율도 높아서 남아 있는 유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항아리는 세심하면서도 대범함을 풍기는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 윗면과 바닥면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 윗면과 바닥면

귀하고 귀하게, 두 번 감싸다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는 투각 기법 외에도 구조상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내항아리와 외항아리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독특한 항아리로, 내부를 살펴보면 원심력의 흔적이 남아 있어 물레를 사용해 제작한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작 방식을 좀 더 자세하게 추정해보면, 물레를 사용해 먼저 안쪽 항아리를 원통형으로 길쭉하게 만들고 남은 흙으로 바깥쪽 항아리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물레를 이용해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를 각각 만든 후 서로 접합하는 방법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접합하면 금이 가거나 깨지는 등 파손의 위험이 있어 제작 공정의 효율성 측면에서 봤을 때 전자의 방법을 선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든 이중구조의 항아리를 제작하는 일은 일반 항아리보다 손이 많이 갑니다. 따라서 제작 첫 단계부터 이중구조의 투각 항아리를 염두에 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과연 누가 무엇을 담으려고 이렇게 귀하고 귀하게 두 번을 감싼 특별한 항아리를 만들어달라고 했을까요? 지금처럼 주문서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단박에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쉬운 마음에 숨겨진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보물이 된 항아리, 박물관에 기부되다

1940년 7월 31일, 조선총독부는 관보(官報) 제4058호를 통해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제1조에 따라 새로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그 가운데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가 포함되어 보물 제375호(구, 지정번호)로 지정된 사실이 공표되었습니다. 원래 이 항아리는 ㈜조선철도 부사장인 니타 도메지로[新田留次郞]가 소유하던 도자기로, 그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데 항아리 입수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평가서(E002-001-001-001~2)평가서(E002-001-001-001~2)

보고문서(E002-001-002-001~3)보고문서(E002-001-002-001~3)

보물 백자 투조 모란문호 기부 건
1. 보물 제375호 백자 투조 모란문호 1개
위 물건은 경성부 남미창정 281번지 니타 도메지로로부터 박물관 진열품으로 기부받아 별지대로 신청한바, 해당 물품은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제1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쇼와[昭和] 15년 7월 31일 자로 보물로 지정되었으므로 이조시대 도자기의 특색을 발휘한 귀중한 학술참고 자료로 인정되니 기부 채납하여도 되겠습니까.
참조 보존령 발췌: 제1조 건조물, 전적, 서적, 회화, 조각, 공예품 기타 물건으로 특히 역사의 증징(證徵) 또는 미술의 모범이 되는 것은 조선총독이 보물로 지정할 수 있음.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항들이 많습니다. 먼저 1941년 12월 20일, 조선총독부박물관 협의원 네 명이 모여 항아리를 살펴보고 평가서를 작성합니다. 이후 같은 달 29일에 해당 항아리를 기부 받겠다는 내용을 보고하는데, 이때 앞서 협의원들에게 받았던 평가서를 첨부합니다. 평가서에는 네 명의 협의원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바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오쿠다이라 다케히코[奧平武彦],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였습니다. 네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에 참여했거나 박물관 조사 사무를 맡는 등 조선의 유적, 유물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을 협의원으로 위촉하여 유물을 기부 받는 것이 타당한지 검증을 거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은 기부자의 이름, 주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가격 정보까지 나와 있다는 겁니다. 항아리의 평가 금액은 5천 원이었습니다. 1941년 11월 2일 자 『매일신보』 기사[미곡 최고 가격 결정-경성은 백미(1두) 4원 45전]를 바탕으로 1두에 16kg이라고 하면, 당시 쌀 한 가마니(80Kg) 가격이 22.25원(圓)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5천 원으로 책정된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무늬 항아리의 가격은 대략 쌀 225가마니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물론 소중한 유물의 가치를 가격으로만 매길 수는 없지만, 당시 조선백자가 지닌 가치와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백자 청화 투각 모란당초문의 항아리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귀하고 특별한 백자 항아리가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되고 박물관에 기부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입니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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