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급제 김명육이요~!”
장원급제(壯元及第)!
과거를 치르러 모여든 숱한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의 영예를 차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1797년(정조 21) 음력 12월 5일, 제주에서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하여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서 치러진 감제시(柑製試)의 장원은 유학(幼學, 벼슬하지 않은 선비) 김명육(金命堉)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 김명육, 그의 입꼬리는 기쁨으로 치솟다 못해 찢어지지나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김명육의 인생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를 급제시킨 독권관(讀券官) 이병모(李秉模, 1742~1806)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에게 다음과 같은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던 것입니다.
“신(臣)이 김명육의 시권(試券, 시험지)을 자세히 보니 운율이 어긋나고 대구가 맞지 아니하여 일정한 격식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글자체가 기울고 비뚤어져서 글씨가 괴이함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신은 정신이 모두 나가서 혼동한 나머지 우등으로 매겼습니다. 지금 문체를 바로잡고 필법을 바르게 하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시권은 결코 유생들에게 반시(頒示, 반포하여 보이는 일)할 수 없으니, 바라옵건대 명하여 빼내 버리게 하고 이어 신의 죄를 정하소서.”
- 『정조실록(正祖實錄)』 권47, 정조 21년 12월 5일
이 차자를 받은 정조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우연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장의 규범이 지극히 엄하니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되, 경은 안심하고 일을 보도록 하라.”
이로써 우리의 김명육 선생은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과거 합격의 기쁨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의 필체라도 “기울고 비뚤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탄탄대로를 걸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참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일화는 정조 재위 후반기, 그가 벌였던 문화운동인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정조는 단순히 유행하는 글투뿐만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글씨체까지 순정(純正)하게 바꾸고자 했던 것이지요.
글씨는 이래야 한다, 정조의 서예철학
정조는 글씨란 모름지기 곧고 바르고 우아하며 질박(質朴, 꾸밈없이 수수함)해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어요. 그는 당나라 유공권(柳公權, 778~865)이 황제에게 간언했다는 “심정즉필정(心正則筆正)”의 고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상(上)께서 이르기를, “옛사람은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모름지기 글자를 쓴 다음의 공교함과 졸렬함은 서투른가 익숙한가에 달려 있지만, 점획(點畫)과 범위(範圍)는 바르고 곧고 법도에 맞으며 우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근래 사대부의 필법은 대부분 가늘고 경박하고 날카롭고 삐뚜름하니, 이는 절대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62, 「일득록(日得錄)」 2, 문학(文學) 중에서
정조가 보기에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개성 넘치는 백하체(白下體)나 원교체(圓嶠體)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나라의 안진경(顏眞卿, 709~784),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나 중기의 한호(韓濩, 1543~1605) 같은 서풍(書風)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글씨 솜씨가 제일이라고 칭찬할 뿐만 아니라 그 글씨들을 집자(集字)해서 중요한 비석을 새기기도 했죠. 대표적인 예로 아산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묘역 앞에 세울 신도비(神道碑) 글을 정조 스스로가 짓고, 글씨는 안진경의 것을 집자해 세웠던 일을 들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정조는 질박한 글씨체를 보존하고 있는 지방의 서리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국가 문헌의 필사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이는 지방민, 하층 신분의 참여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정조 자신의 서예철학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감영(監營) 내에 있는 글씨에 능한 서리(書吏)를 뽑아 내각으로 올려 보내 『오경백편(五經百篇)』 1부를 베껴 쓰도록 하여 목판에 새겨 출판하였다. 이는 영남(嶺南)의 서체가 질박하고 돈후(敦厚)하여 근래의 가늘며 힘이 없고 삐딱한 맛이 없는 점을 취한 것이니, 이 또한 순수하고 질박한 것으로 (글씨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의도에서다.
- 『홍재전서』 권181, 「군서표기(群書標記)」 3, 어정(御定) 중에서
용무늬 종이 위에 드러난 군주의 풍모
이쯤 되면 “본인은 얼마나 글씨를 잘 썼기에?” 같은 의문이 들 겁니다. 왜 있잖습니까, 자기는 못 하면서 남의 일에 훈수는 잘 두는 사람들. 왕이라서 신하들이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예~”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정조는 스스로도 대단한 명필이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적지 않게 남아있는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이번에 소개할 정조의 어필(御筆) <제문상정사(題汶上精舍)>입니다. 장황(裝潢)까지 합쳐 세로 190.9cm, 가로 91.5cm에 이르는 대작인데다, 글씨며 내용이며 재질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정조, <제문상정사>, 조선 1798년, 종이에 먹, 190.9x91.5cm, 보물, 덕수2736
누구나 첫인상이 중요한 법, 이 글씨의 첫인상은 어떠한가요? 묵직하지만 결코 무겁지는 않아 보입니다. 정사각형보다 조금 납작한 글자의 형태에는 빈틈이 없고, 그러면서 언뜻 보기에도 붓의 움직임은 활달합니다. 청나라에서 들여온 운룡문(雲龍文) 종이 위에 써 내려간 짙은 먹은 지금도 윤기가 흐릅니다. 글자 획 하나하나는 두터워 여유로워 보이지만 획 안에 뼈대가 느껴집니다. 유려한 기교보다는 장중함과 강건함으로 승부를 보는 글씨라고 할까요. 정조의 다른 글씨에서도 이런 특징이 나타나지만, 이 작품에서는 유달리 강조된 느낌입니다.
城東十里好盤桓 성 동쪽 십 리 남짓 서성이기도 좋은 곳에
窈窕村容碧樹灣 그윽한 마을 모습, 푸른 나무 물굽이로세
汶水知爲齊魯半 문수(汶水)가 제(齊)·노(魯)를 나누는 것 알던가
任他篁韻不須攀 그에게 맡긴 대숲의 운치 부여잡을 것 없네
문수는 춘추시대 제나라와 노나라의 경계에 있던 강으로, 주변에 대숲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왜 이 시에서 옛날 중국의 강 이름을 언급했을까요? 『논어(論語)』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大夫) 계씨(季氏)가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閔子騫)을 비(費) 땅의 관리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민자건이 계씨의 사자(使者)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를 위해서 말을 잘해다오. 만일 나에게 다시 그런 말을 하면 나는 반드시 문수가로 나가 버릴 것이다.”
이는 예의 없는 계씨 밑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정조는 자기가 아끼는 신하를 출세의 때를 알았던 민자건에 견주고, 그의 집을 현인이 사는 곳에 비유한 것입니다.
정조, <제문상정사>, 조선 1798년, 종이에 먹, 190.9x91.5cm, 보물, 덕수2736
그리고 왼쪽 아래에 “戊午菊秋”라고 적었습니다. 무오년은 1798년, 정조 재위 22년째 되는 해입니다. 국화꽃 핀 무오년 가을 어느 날, 임금은 아끼는 신하를 위해 붓을 들어 글씨를 적었습니다.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려 임금은 글 첫머리에 ‘규장지보(奎章之寶)’를, 말미에는 ‘홍재(弘齋)’, ‘만기지가(萬幾之暇)’라는 도장을 찍었습니다. 정조가 곁에 두고 썼던 어용인(御用印)들입니다. 굳이 호나 이름을 적지 않아도, 이 글씨가 임금의 솜씨임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임금의 글씨를 위해 최고의 장황사(裝潢師)가 동원됩니다. 연한 상앗빛 비단과 짙은 옥색 비단으로 옷을 입히고, 붉은빛 유소(流蘇)를 드리웠습니다. 족자봉의 끄트머리 축두(軸頭)에는 옥을 붙였고요. 그냥 글씨만으로도 빛이 나거늘, 멋진 옷을 입으니 글씨가 더욱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능력을 갖춘 절대자도 불가능했던 것
자, 그 모든 과정을 거친 이 <제문상정사>가 지금 우리 앞에 남아있습니다. 어제 쓴 듯 생기 넘치는 이 글씨를 보니 과연 정조가 자부심을 갖고 나라의 문장과 글씨체를 바꾸고자 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왕의 당당함이 글씨 한 자 한 자에서 풍겨나고, 섬세한 장인의 손끝이 족자 구석구석에서 느껴집니다. 여러모로 정조 어필 <제문상정사>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18세기 조선 문화의 정수를 보는 듯합니다. 오늘날 이 작품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632-2호)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런 수준을 갖춘 나라의 국왕으로 스스로도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정조의 눈에, 요즘 젊은 신하들이 즐긴다고 하는 ‘것’이 성에 찼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정조가 만년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문화운동은 성공했을까요? ‘난잡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글 대신 고문(古文)이 위상을 확고히 하거나, <제문상정사>같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글씨체가 확산되었을까요? 역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문체반정으로 당대의 문인들을 탄압했어도 조선 문단에 명(明)‧청(淸)의 소품문(小品文)이 대유행했고, 정조 사후 조선의 서단은 청나라 글씨와 금석학의 영향 아래 ‘괴(怪)’한 추사체(秋史體)가 휩쓸었죠. 정조가 길러낸 사람들이 정국을 주도했던 19세기였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역사의 흐름이란 그 어떤 사람, 심지어 최고 권력자가 나서도 쉽게 방향을 틀기 힘들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알게 됩니다. 정조 어필 <제문상정사>는 그런 역사의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큰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