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묘수
삼채 진묘수, 중국 당 중기, 높이 79cm(좌),
높이 69.5cm(우), 신수14210
진묘수(鎭墓獸)는 무덤 입구나 외곽을 수호하도록 무덤에 부장품으로 매장한 도용을 말합니다. 진묘수의 기원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시작된 인면수신(人面獸身) 형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이 형상은 기원전 2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전해졌습니다. 중국의 진묘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 나라 무덤에서 발견된 나무 재질의 사슴뿔이 달린 동물형상 진묘수입니다.
중국 진묘수의 형태와 기능
중국에서 진묘수는 원래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죽은 자를 지키는 역할 즉, 무덤을 지키는 기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후(死後)에도 안녕하기를 바라는 내세사상이 점차 발전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겸하게 됩니다.
진묘수, 중국 남북조시대, 높이 26.0cm, 길이 17.5cm(좌), 높이 26.4cm, 길이 16.9cm(우), 구4257
무령왕릉 석수, 공주 무령왕릉 출토, 삼국시대, 높이 30.0cm, 길이 47.3cm, 너비 22.0cm, 공주619,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는 비록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지만, 불교가 전래되면서 윤회사상과 내세를 위한 후장(厚葬: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는 것) 풍습은 지역적으로 차이를 보이며 그 명맥만은 유지하였습니다. 북위(北魏)를 중심으로 현세에 사용하던 물건과 함께 신하, 가축 등을 도용으로 만들어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동물 모양 도용을 제작하여 입구에 배치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묘수입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진묘수는 동물 형상에 갈기나 뿔이 달린 모습이었습니다. 이렇듯 남북조시대의 진묘수는 고양이 같은 귀여운 표정과 마치 집을 지키는 듯한 웅크린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상은 우리나라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석수)와도 그 느낌이 유사합니다.
이렇게 동물과 비슷한 모습의 진묘수는 중국 당대(唐代)가 되면서 점차 변하게 됩니다. 중국 전역을 통일한 당(唐)나라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자신의 안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의 풍요로운 삶을 열망하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귀족과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적으로 제한했던 후장풍습이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무덤의 지상에 측백나무를 심고, 돌로 만든 사자, 돌로 만든 사람 등을 설치했습니다. 무덤 안에는 진묘수, 천왕용(天王俑), 무사용(武士俑), 12지신상(十二支神象)을 세트로 매장하였습니다. 이 중 진묘수는 신왕용(神王俑)과 괴수용(怪獸俑)으로 나누어 제작하여 그 역할을 달리하였습니다. 신왕용은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만든 것이고 그 모습은 불교의 천왕상(天王像)과 유사합니다. 괴수용은 무섭고 흉악한 액막용의 진묘수 입니다. 이는 남북조시대의 진묘수를 모델로 새로운 진묘수가 탄생한 것입니다. 당대 초기 진묘수는 이미 인면수신(人面獸身)의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먼저 도용의 형상을 만들고 붉은색 등의 안료로 채색하고 검정색으로 수염을 그려 넣어 흉악하고 무섭게 보이도록 꾸몄습니다.
채색 진묘수, 중국 당 초기, 높이 25cm, 본관9139
당대 중기 이후, 삼채 제작의 발전으로 진묘수 역시 삼채 유약을 바르면서 형태가 정형화되었습니다. ‘수면수신(獸面獸身)’과 ‘인면수신(人面獸身)’ 형상을 세트로 제작하여 받침대 위에 직립의 자세로 올려놓고 무덤 입구에 배치하였습니다. 수면수신 진묘와 인면수신 진묘의 몸체는 화려한 삼채로 제작하였고, 인면수신 진묘의 얼굴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채색만 하였습니다. 또한 당 초기 진묘수에 비해 귀와 뿔을 매우 과장되게 만들어 강렬한 인상을 풍기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진묘수는 사실성과 입체감이 극대화되면서 대상의 내면까지 표현하는 예술의 경지로 승화되었습니다.
당대 진묘수는 삼채 등 예술품과 제작 기술이 집약되어 나타난 결과물로 당시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사고의 표현 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