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경기도 양평 남한강가의 한 절터에서 불상 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은 얼굴 곳곳에 도금이 벗겨지고 두 손과 발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불상과 짝을 이루는 화려한 광배도 화사한 연꽃 대좌도 없이 그저 불상만 덩그러니 전합니다. 불상이 봉안되었을 사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서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상을 만들었는지 사연을 전해줄 어떠한 단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지극히 평범하고 사연 없어 보이는 단순한 상입니다. 그런데 웬걸요. 이 불상은 무려 ‘국보’입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불상에 어떤 특별함이 있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가 된 걸까요?
7세기 전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
다시 한번 자세히 불상을 살펴보시죠. 타원형을 이루는 장대한 신체 비율과 터질 듯한 팽만감이 한눈에 들어오실 겁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있어 평온해 보이지만 턱을 살짝 들어서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집니다. 둥그런 어깨 아래로 이어지는 신체는 마치 원기둥처럼 단순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부처의 옷인 대의(大衣)는 두 어깨를 덮고 그 아래로 부드럽게 몸을 감싸며 떨어집니다. 신체를 타고 규칙적으로 새겨진 옷 주름 하나하나가 단정하고 묵직한 느낌을 줍니다. 두 손은 파손되었지만 남아 있는 부분의 모양으로 보아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을 나타내는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손갖춤[手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인 육계(肉髻)는 낮고 펑퍼짐하며 큼직한 나발(螺髮)이 있었던 흔적이 보입니다. 커다란 귀는 목까지 내려와 있고 삼도(三道)가 새겨지지 않은 목은 길고 굵게 표현된 점이 특이합니다.
금동여래입상, 경기도 양평 출토,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30㎝, 국보, 신수3300
묵직하고 단순한 원통형의 신체 표현과 팽팽한 입체감이 특징인 이 불상은 7세기 전반 불교조각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입니다.
이 상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뒷모습과 옆모습입니다. 상을 만든 장인은 불상의 뒷모습까지 꼼꼼하게 조각했습니다. 옆에서 보았을 때도 입체감이 한층 살아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 차이는 확연합니다. 상의 정면뿐만 아니라 측면과 뒷면까지 고려한 보다 입체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이런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양감이 표현되었다는 것, 즉 신체 표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커다란 변화입니다. 변화의 흐름은 중국 불교조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남북조시대를 지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중국의 사상, 종교, 신앙,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6세기 후반~7세기 초는 짧은 기간 동안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 당(唐)나라가 차례로 쓰러지고 세워지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왕조의 새로운 취향, 인도나 동남아시아 같은 지역으로부터의 영향 등에 힘입어 중국의 조상(造像) 전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해지고 풍성함을 갖추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체 표현은 초기의 추상적이고 괴체적(塊體的)인 조각과 비교해보면 극적이리만큼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해갔습니다.
1. 금동여래입상, 강원도 횡성 출토,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29.4㎝, 덕수2958
2. 금동여래입상, 경상북도 영주 숙수사지 출토,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14.8㎝, 신수484
원기둥 모양의 신체 표현, 낮고 평평한 육계, 신체를 덮은 U자 모양의 차분한 옷 주름 등 양평 출토 금동불상과 유사한 상들이 강원도 횡성, 경북 영주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불상들은 이러한 다양한 실험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나름의 미감으로 완성한 결과입니다. 양평에서 발견된 이 불상은 북제, 북주, 수나라로 이어지는 조각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이후 통일신라시대 조각으로 나아가는 구간에서 변곡점 역할을 합니다. 신체 비율이 길어지고 입체감이 강조되기 시작하는 7세기 전반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합니다. 동아시아 고대 불교조각의 도도한 흐름을 이 크지 않은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불상과 비슷한 모습을 한 상들이 강원도 횡성, 경북 영주에서도 발견되어서 당시 새로운 변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동하는 불상, 삼국시대 금동불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양평의 한 절터입니다. 처음부터 그 절에 봉안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이었을 수도 있고 그 절에서 수행하던 승려가 소지했거나 우연한 이유로 그곳에 남겨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상은 지금까지 전하는 삼국시대 금동불 중에는 비교적 크기가 큰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원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봉안되었던 주불(主佛)로 보기에는 작은 규모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574년에 완성된 경주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은 인도의 아소카 왕이 보내온 쇠로 만든 불상으로 그 크기가 4~4.64m에 달했다고 합니다. 불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황룡사 터에 남아 있는 거대한 대좌를 보면 당시 상의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상들은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존재하고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봉안된 장소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상들과는 달리 이 글에서 소개하는 양평 출토 금동불이나 더 작은 상들은 이동이 가능합니다. 처음 봉안되었던 장소를 떠나거나 제작된 곳과 봉안된 장소가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 불상인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이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불상은 신라 영토에서 발견되었지만 원래 평양의 한 사찰에서 만든 고구려의 불상이었습니다.
이동 가능한 불상들은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삼국시대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와 뿌리 내리고 기틀을 잡았던 시대입니다. 새로운 사상과 의례, 새로운 불상과 보살상들이 창안되고 전파되었습니다. 이동 가능한 크기의 금동불들은 최초 제작지에서 여러 사용처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양식과 형식을 함께 전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국경을 넘어서는 일이 되기도 하면서 이질적인 조각 전통이 갑자기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전해진 상들은 불교 사원의 거대한 주불을 만드는 데에 모본이 되기도 하고 5㎝가 안 되는 아주 작은 불상들은 개인 신앙생활의 중요한 수단으로도 쓰였을 것입니다. 삼국시대 불교와 불교미술 발전의 이면에는 이처럼 이동하는 불상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한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186호) 금동불을 혹시 전시장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꼭 한번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바라봐 주시길, 그리고 이 상이 간직한 새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