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보각선사서』 고려 1387년, 25.2×15.5㎝,
보물, 구9950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는 송나라의 선종(禪宗)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당시의 이름난 사대부들, 제자 및 신도 총 42명과 주고받은 62편의 편지글을 모은 것입니다. 때문에 ‘편지’라는 의미를 가진 ‘서(書)’자를 써서『대혜서(大慧書)』,『대혜서장(大慧書狀)』,『서장(書狀)』이라고 약칭하고, 또는 더욱 간단하게『서(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종고의 법문을 모은『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전체 30권)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권25~권30을 따로 뽑아 별도의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로 공부를 하듯 조선시대 승려들에게도 단계별 교육과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력(履歷)’이라고 부르는데,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의 4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집과는 중등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단계로서 당나라 승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고려 승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 종밀의 저서를 요약하고 해설을 붙인『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송나라 승려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의 법문을 모은『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그리고 이제 소개해드릴『대혜보각선사서』가 핵심 교과서였습니다. 조선시대에『대혜보각선사서』는 승려라면 누구나 다 한번쯤 읽어 보는 책이었던 것입니다.
선(禪) 수행의 길을 밝힌 큰스님, 대혜종고(大慧宗杲)
종고는 선주(宣州) 영국현(寧國縣),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선성시(宣城市) 출신으로 성이 해씨(奚氏)이고 자(字)는 담회(曇晦), 호(號)는 묘희(妙喜) 또는 운문(雲門)입니다. 혜운원(慧雲院)의 혜재(慧齋)에게 출가한 후 담당문준(湛堂文準, 1061~1115) 문하에서 배우고, 나중에는 환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을 스승으로 모시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1137년에 항주(杭州)의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로 옮겨 가 선종(禪宗)을 크게 선양하였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와 설법을 들었고, 제자만도 2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4년 뒤 글을 쓸 때 역대 황제의 이름 글자를 사용하지 않도록 한 피휘(避諱)에 저촉되어 형주(衡州)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4년 만에 사면을 받아 풀려난 후 여러 곳을 떠돌다가 묘희사로 돌아왔는데, 이 무렵에 당시 황제였던 효종(孝宗)에게 설법을 하고 ‘대혜선사(大慧禪師)’란 존호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종고를 부를 때 일반적으로 ‘대혜종고(大慧宗杲)’라고 합니다. 1163년 8월에 입적(入寂)하자 효종이 다시 ‘보각(寶覺)’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습니다.
종고는 선승(禪僧)이었지만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해서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리를 문답하였고, 비판을 할 때는 매우 엄격한 태도로 일관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를 준열하게 비판했던 주희이지만, 과거시험을 볼 때『대혜보각선사어록』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입니다.
『대혜보각선사서』는 편지글이기는 하지만, 선사상(禪思想)의 핵심을 뽑아내어 토론하거나 가르치는 내용이라서 후대에 승려와 학자, 일반 신도 사이에 널리 읽혔습니다. 주된 내용은 당시 선종 종파 중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던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묵조선은 묵묵히 자리 잡고 앉아서 고요한 성품을 성찰하는 선 수행의 방식인데, 종고는 이것을 소극적인 선풍(禪風)이라고 비판하고, 여러 조사(祖師)들이 선 수행을 돕기 위해 사용했던 간결한 문구인 공안(公案)을 화두로 삼아 탐구해 가는 간화선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길이라고 역설한 것입니다. 종고의 영향으로 이후 간화선은 주류 선풍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도 전파되어 한국 선종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대혜보각선사서』의 간행과 가장 오래된 판본
『대혜보각선사서』는 종고가 입적한 직후인 건도(乾道) 2년(1166) 8월, 그가 생전에 머물렀던 중국 항주의 경산 묘희사(妙喜寺)에서 제자 혜연(慧然)과 거사(居士) 황문창(黃文昌)에 의해 처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소개되었는지 확실하지 않고, 또 묘희사에서 간행한 판본이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묘희사 판본을 판목에 대고 다시 새겨서 만든 복각본(覆刻本)이 온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고려 신종(神宗, 1198~1204) 연간에는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혜보각선사서』의 원간기(原刊記), 고려 1387년, 25.2×15.5㎝, 보물,
구9950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우왕(禑王) 13년(1387)에 승려 지담(志淡)과 각전(覺全)이 간행한 것으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662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대표적입니다. 이외에 간송문고와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및 영남대학교 등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만, 간송문고본이나 영남대학교 소장본 등에는 간기와 발문이 아예 없거나 손으로 베껴 써서 추가한 것임에 비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온전한 체재를 갖추고 있어서 고려시대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혜보각선사서』는 묘희사본의 번각본으로 송나라에서 간행한 최초 판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첫 장의 제목 다음에 묘희사본을 간행한 혜연과 황문창의 이름이 보이며, 편지 내용이 끝난 뒷부분에는 편찬 및 간행의 배경을 서술한 황문창의 후기와 간행 비용을 시주한 자들의 이름, 그리고 ‘건도 2년(1166) 무술 8월[乾道二年歲次 丙戌八月], 황제의 명으로 경산 묘희암에서 간행함[勅賜經山妙喜庵刊行]’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묘희사본에 원래부터 있던 것을 그대로 새겨 찍은 것입니다. 각 페이지의 테두리를 한 줄로 둘러 친 사주단변(四周單邊)이나 각 행의 구획선인 계선(界線)이 없는 무계(無界) 형식, 한 페이지에 글자를 11행으로, 각 행마다 글자 수는 20자(字)로 한 것이나 앞뒤 페이지가 맞닿아 접히는 부분인 판심(版心)에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모양 무늬가 없는 무어미(無魚尾) 형식 또한 묘희사본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색 초상, 조선, 142.0×75.0㎝, 본관11422
달라진 점은 고려에서 판각하던 당시에 새로 쓴 발문과 시주자들의 이름을 추가하였다는 것인데, 이때 발문을 쓴 사람이 바로 고려 말의 가장 유명한 문신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입니다. 이 글에서 이색은 선승(禪僧)이자 스승으로서 종고의 뛰어난 경지를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과 관련한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지눌은 항상 혜능(慧能, 638~713)의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대혜보각선사서』를 곁에 두고 보았는데, 그를 모시는 시자들이 밤마다 지눌과 혜능, 그리고 종고가 함께 있는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색 당시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이 책을 높이 받들고 깊게 믿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지담과 각전 두 승려가 후학들을 위해 이 책을 널리 유포시키고자 개인 자산을 털어 판각했다고 하면서 이들의 업적을 크게 찬탄하였습니다. 이 발문 마지막에 ‘홍무(洪武) 20년(1387) 10월’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어서 이 판본이 고려 말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색의 발문 뒤에는 『대혜보각선사서』의 판각에 힘을 보탠 시주자 명단이 이어집니다. 가장 먼저 고려 32대 왕 우왕의 비(妃)인 근비(謹妃), 환관으로서 조선 개국 후에도 관리를 지냈던 강인부(姜仁富), 지담과 각전을 포함한 승려 7명, 마지막으로 중앙 관리인 판사(判事) 이세진(李世珍)과 군기시(軍器寺) 소윤(少尹) 김윤보(金允寶)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신인 이색이 발문을 쓰고, 왕비와 중앙 관리들이 시주를 한 것을 보면 이 책의 간행이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혜보각선사서』의 이색 발문과 시주자 명단, 고려 1387년, 25.2×15.5㎝,
보물, 구9950
『대혜보각선사서』는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26회 이상 다시 간행됩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같은 판본을 다시 목판에 새겨 만든 복각본이 유통되다가 조선 중기부터는 글자 크기를 더 크게 하고 행수와 1행당 글자 수도 바꿔 새로 옮겨 쓴 후 간행한 독자 판본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판본들은 모두 고려시대 판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들입니다. 결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혜보각선사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이자 이후 제작·유포된 여러 판본의 모본(母本)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