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신선을 본떠 주전자를 만들었던 고려 사람들:강민경

 청자 선인모양 주자(정면), 대구 달성군, 고려 13세기, 28×19.7cm, 국보,  신수3325

청자 선인모양 주자(정면), 대구 달성군, 고려 13세기,
28×19.7cm, 국보, 신수3325

1971년, 대구 교외의 한 사과 과수원에서 땅을 파다가 높이 28cm, 바닥지름 19.7cm의 청자 주전자가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4년 7월 9일, 이 청자 주전자는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167호)로 지정됩니다. 도대체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주전자가 뭐가 대단하기에 국보로 대접받는 걸까요? 고려의 청자는 남아 있는 수가 상당히 많지만, 출토지가 분명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이외의 지역에서 출토된 고급 청자는 더욱 드물지요. 특히 사람 모습으로 만든, 이른바 인형(人形) 청자는 매우 희귀합니다. 하지만 드물다는 것만으로 국보라는 칭호를 얻을 수는 없지요. 사실 이 아름다운 고려청자 주전자에는 생활 속에서 도가(道家)의 이상세계를 그렸던 고려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신선 세상을 꿈꾸었던 고려 사람들, 청자에 그 바람을 담았으니

노자(老子, 생몰년 미상)와 장자(莊子, BC 369~BC 289년 무렵)의 사상을 발전시킨 도가 사상은 타락한 인간의 작위(作爲)를 경계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 곧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도가에서는 그러한 경지에 있는 이를 신선(神仙)이라 하고, 신선이 되어 몸에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오르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최고의 경지로 꼽았습니다.
도가사상은 일찍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같은 기록에는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 7년인 624년,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도가 서적과 도사(道士)들을 보내 주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고구려 고분벽화 속 사신(四神)이나 백제 금동대향로(옛 지정번호 국보 제287호)에 보이는 삼신산(三神山)처럼, 이 땅의 사람들은 이미 상당히 많은 도가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삼국시대 고분 유적에서 종종 출토되는 운모(雲母)는 신선이 되기 위해 먹는다는 단약(丹藥)의 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던 광물입니다.
그러나 도가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널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고려 때였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유학, 불교, 도가의 어느 하나만을 취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여 일상생활의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유학을 공부해 과거를 보아 관료가 되고, 도가서(道家書)를 읽으며 소일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절에서 임종을 맞고 절 근처에 묻히거나 다비(茶毘)하여 장사 지내는 것이 당시 관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노자처럼 푸른 소를 타고 경(經)을 외우던 윤언민(尹彦旼, 1095~1154) 같은 인물도 적지 않았고, 불교와 도가,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적 요소들이 혼합된 팔관회(八關會)가 고려 관민(官民)이 모두 즐기는 최고의 행사였다는 데서도 그러한 고려인의 인식이 잘 드러납니다.
그중에서도 도가가 종교화된 도교(道敎)는 고려 중기에 번성했습니다. 이는 송(宋)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인데, 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됩니다.

신(臣)이 듣기에, 고려는 지형이 〈중국의〉 동해(東海)를 끼고 있어서 〈바다 가운데 있는〉 도산(道山)이나 선도(仙島)와는 멀지 않으니 고려 백성들이 도교[長生久視]의 가르침을 숭모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나이다. 다만 중국[中原]에서 이전에는 정벌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청정무위(清浄無爲)의 도로써 교화함이 없었을 뿐이옵니다. … 대관(大觀) 경인년(1110)에 천자께서 현묘한 도[妙道]를 듣고자 하는 저 변방(고려)의 뜻을 헤아렸나이다. 그래서 사신을 파견하는데 도사 두 사람에게 따라가도록 하고 교법(教法)에 통달한 사람을 신중하게 뽑아 가르치도록 하였사옵니다. 예종[王俣]은 신앙이 독실하여 정화(政和) 연간(1111~1118)에 복원관(福源觀)을 처음으로 건립하고 덕이 높고 참된 도사 10여 명을 받들었습니다. … 또 듣건대 예종은 재위할 때에 항상 도가의 책[道家之籙]을 전수하여 불교[胡敎]를 대체하려고 하였는데, 그 뜻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던 것 같나이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8, 도교

이 시기 고려의 임금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은 당시 고려 지배층과 결탁하여 큰 교세(敎勢)를 누렸던 불교의 영향력을 도교 진흥을 통해 줄여 보려고 했습니다. 서긍도 말했듯이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이야기는 역으로 고려 사람들에게 미쳤던 도교의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쓰던 그릇, 청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고려청자 대접이나 매병(梅甁)에는 구름이 둥실 뜨고 학이 유유히 나는 운학문(雲鶴文)이 유독 자주 나타납니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저 유명한 청자 상감 구름 학무늬 매병(옛 지정번호 국보 제68호)처럼 바탕 전체를 꽉 채운 것도 있으나, 대개는 텅 빈 허공에 한가로이 뜬 구름과 학 몇 마리를 새긴 경우가 많지요. 이를 장수(長壽)의 상징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속세에서 초연히 벗어나려는 허정무위(虛靜無爲)의 이미지로 보아야 맞지 않을까 합니다. 학은 고귀한 자태나 하늘을 나는 모습, 맑은 울음소리 때문에 신선들이 타거나 변신하는 선금(仙禽)으로 여겨졌으며, 구름도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이자 신선 세계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학과 구름을 새긴 그릇은 곧 신선들의 그릇이요, 그 그릇을 쓰던 고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신선 세상을 꿈꾸었겠지요.

 청자 양각 구름 학무늬 완의 조각, 강진 사당리, 고려 11~12세기, 높이 6.4cm, 입지름 15.9cm, 고적9359 청자 양각 구름 학무늬 완의 조각, 강진 사당리, 고려 11~12세기,
높이 6.4cm, 입지름 15.9cm, 고적9359

 철화로 “소전색”이라 쓴 청자 잔, 고려 12세기, 높이 6cm, 입지름 8.6cm, 동원1200 철화로 “소전색”이라 쓴 청자 잔, 고려 12세기, 높이 6cm, 입지름 8.6cm, 동원1200


또 고려에는 소전색(燒錢色)이나 태일전(太一殿) 같은 도교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이 있었는데, 그런 관청의 이름이 쓰여 있는 청자 그릇도 드물지 않게 확인됩니다. 도가의 신선들에게 제사를 올리며 쓰던 제기(祭器)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할 선인(仙人)모양 청자 주전자만큼이나 고려에 끼친 도교의 영향력을 직접 보여 주는 청자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주전자를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하늘의 복숭아를 받쳐 든 그대, 과연 누구이신가

 청자 선인모양 주자(우측면)

청자 선인모양 주자(우측면)

이 주전자를 보면, 꽃이 꽂힌 보관(寶冠)을 머리에 쓰고 장식된 도포(道袍)를 입은 사람이 구름 위에 앉아 큼지막한 복숭아를 얹은 쟁반을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탐스러운 복숭아 아래 잎사귀가 동그랗게 말려 주전자의 귀때 노릇을 하게 되어 있군요. 옷깃과 옷고름, 보관, 그리고 천도복숭아에는 백토를 도톰하게 점으로 찍어 꾸몄고, 눈동자에는 흑토(黑土)를 상감했으며, 맑고 윤이 나는 담록빛 유약이 두껍게 발려 있습니다. 이분의 얼굴을 보니 엄격하면서도 근엄하고 진지하군요. 인상을 쓸 때 나타나는 팔자주름까지, 퍽 섬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상화된 인물은 누구일까요? 800여 년 전 사기장이 과연 누구를 생각하고 이 주전자를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런저런 정황을 통해 추정은 할 수 있습니다. 의복이 퍽 실감 나서 실제 고려에 살았던 도사를 본뜬 것으로 보이지만, 들고 있는 복숭아로 볼 때 전설 속의 신선인 서왕모(西王母)나 동방삭(東方朔, BC 154~BC 93)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왕모는 곤륜산(崑崙山) 정상에 살면서 신선 세계를 주관하는 최고위 여신으로, 신선들은 아침저녁으로 서왕모에게 꼭 문안을 드려야만 했다고 합니다. 서왕모는 3,000년에 한 번 열매가 맺힌다는 반도(蟠桃) 나무를 길렀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곧, 서왕모는 신선을 꿈꾸던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동방삭은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 때 살았던 실존 인물입니다. 넉살 좋은 성격에 말솜씨가 뛰어났으며, 우스갯소리로 무제를 즐겁게 하면서도 때에 따라 직언(直言)을 했던 사람이지요. 그는 풍자와 해학으로 권력자에 영합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시대의 모순을 꿰뚫어 보았고, 조정 속 은자(隱者)를 자처하면서 자적(自適)하곤 했습니다. 그런 달관의 경지는 뒷날 도교에서 그를 신선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서왕모의 궁에 몰래 들어가 복숭아를 따 먹고 3,000갑자(180,000년)를 살았다는 전설을 낳았습니다. 글쎄요, 과연 이 주전자가 누구를 본떴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하나는 분명합니다. 이 주전자의 귀때에서 흘러나오는 술은 고려 사람들에게 불로장수를 기약케 하고 신선을 꿈꾸게 만드는 “반도연(蟠桃宴)의 천일주(千日酒)”였으리라는 것을요.

불로초로 술을 빚어 / 만년배(萬年盃)에 가득 부어 / 비나이다 남산수(南山壽)를
약산동대(藥山東臺) 어즈러진 바위 / 꽃을 꺾어 주(籌)를 노며 / 무궁무진 잡으시오

이 술 한 잔 잡으시오 / 이 술을랑 반도연의 천일주니 / 쓰나 다나 잡으시면 / 만수무강하오리라

- <권주가(勸酒歌)>

하지만 아직도 궁금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분명 개경 어디에선가 쓰였을 물건이 왜 대구까지 내려와 땅속에 묻혔는지, 과연 누가 이 주전자를 사용했을지, 사라진 뚜껑은 어떤 모양이었을지 … 복숭아를 받쳐 든 그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으련만, 전시실 진열장 안에 계신 그분은 언제 보아도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혹시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박물관에 오셔서 이 선인모양 주전자를 만나보십시오. 자주 뵈어 혹 친해진다면, 쟁반 위 복숭아 한 알을 내어 주며 그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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