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저승나라 열 명의 신의 세계, 시왕도十王圖

무릇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사람도 태어나는 시작이 있으면 죽음이라는 끝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상황은 누구도 알 수 없기에 미지(未知)의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고 화두(話頭)이기도 합니다. 죽음 이야기는 때로 ‘전설의 고향’처럼 한 많은 처녀 귀신을 등장시기도 하고, 영화 ‘신과 함께’가 보여 주는 것처럼 저승에 판타지를 꿈꾸게 합니다.

여기 사후(死後) 세계에서 만나는 열 명의 왕과 지옥을 그린 불화(佛畫)가 있습니다. 불화는 1대왕부터 10대왕까지 그린 10폭과 사자도(使者圖) 2폭이 있는 12폭이었는데, 제5대왕(염라대왕)도 1폭과 사자도 1폭이 결실되어 현재 10점만이 남아 있습니다.

 작자미상, <시왕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각 156.1×113cm, 덕수1868 왼쪽 상단부터 1대왕도-2대왕도-3대왕도-4대왕도-6대왕도 왼쪽 하단부터 7대왕도-8대왕도-9대왕도-10대왕도-사자도

작자미상, <시왕도> ,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각 156.1×113cm, 덕수1868
왼쪽 상단부터 1대왕도-2대왕도-3대왕도-4대왕도-6대왕도
왼쪽 하단부터 7대왕도-8대왕도-9대왕도-10대왕도-사자도

시왕도의 도상과 특징

불교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사후 세계는 저승사자와의 만남에서 시작해 3년여에 걸쳐 열 명의 왕[十王]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습니다. 긴 노정에서 만나는 열 명의 왕이 이 시왕도의 주인공입니다. 죽은 이[亡者]는 시왕을 만나기 전에 먼저 저승사자와 만납니다. 그는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시왕이 머무는 명부(冥府)로 인도됩니다. 저승사자가 그려진 불화에는 망자의 죄가 적힌 두루마리 장부를 시왕에게 전달하는 직부사자(直府使者)와 망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재사자(監齋使者) 그림이 한 쌍을 이룹니다.

 작자 미상, 〈사자도〉, 조선 18세기, 삼베에 색, 142.3×85.5cm(좌: 직부사자도), 133.0×86.5cm(우: 감재사자도), 덕수2412

작자 미상, <사자도>, 조선 18세기, 삼베에 색, 142.3×85.5cm (좌: 직부사자도), 133.0×86.5cm(우: 감재사자도), 덕수2412

망자는 저승사자의 인도로 시왕 가운데 제1대왕인 진광대왕(秦廣大王)을 만나 심판을 받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시왕도에 재현되어 있습니다. 진광대왕은 털가죽으로 장식한 큰 의자에 홀(忽)을 들고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진광대왕의 주위에는 그를 보좌하는 판관(判官), 녹사(綠事), 그리고 동자(童子) 들이 있습니다. 왕의 업무를 돕는 신하가 있는 것처럼 저승에도 왕의 신하가 있겠지요? 우리 조상들이 상상한 저승의 왕과 신하들 모습에는 현실 속의 모습이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진광대왕의 탁자 위에는 각종 기물(器物)이 놓여 있습니다. 붓 등 필기구가 꽂혀 있는 필통, 연적(硯滴), 인장(印章)을 보관하는 인장함, 책들. 이와 같은 문방구의 표현은 19세기 조선시대 왕이 쓰시던 물건들이 모티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부를 상징하는 중요한 지물인 업경대(業鏡臺)입니다. 업경대는 죽은 자가 살아 있는 동안 지은 선악의 행적을 그대로 비춰 준다는 거울입니다. 이승에서의 죄악이 거울에 비쳐집니다. 업경대의 거울은 나무판에 금박을 입히고 테두리는 불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거울을 받치는 받침대는 사자가 연꽃을 받쳐 든 모습으로 만들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권선징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업경대는 18세기 시왕도에서는 제5염라대왕도에만 표현되었는데 19세기에 이르면 1대왕도를 비롯해 9대왕도까지 왕의 책상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화면 하단에는 진광대왕이 주재하는 지옥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구름과 성벽으로 구분한 그림의 하단에는 옥졸이 망자를 온통 칼로 뒤덮인 산인 도산지옥(刀山地獄)에 던지려 하고, 던져진 망자는 뱀들에게 감겨 있는 처참한 모습입니다. 성 밖에서는 말머리 모양을 한 마두옥졸(馬頭獄卒)이 칼을 휘두르며 죄인들을 지옥의 성문으로 들여보냅니다. 포승(捕繩)에 묶여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4명의 망자는 곧 닥칠 응보(應報)를 아는 것처럼 두려움에 휩싸인 모습입니다. 성문 밖에는 지옥의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지장보살이 합장하며 서 있습니다. 또 망자를 3일 만에 극락으로 천도해 주는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도 앉아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이 불화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구세주로 다가옵니다.
살아생전 착한 일만 했던 선자(善者)나 악행만을 저지른 악자(惡子)들은 아마 1대왕의 심판만 받아도 다음 생애가 정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도 하고, 종종 나쁜 일도 일삼는 평범한 사람들의 심판은 1대왕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1대왕에게 7일간의 심판을 받고 통과하지 못한 망자는 2대왕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2대왕인 초강대왕(初江大王)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3대왕, 4대왕, 5대왕, 6대왕, 7대왕에게까지 차례로 생전의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심판 받는데, 그 시간은 모두 49일이 걸리게 됩니다. 저승에서 망자가 이토록 험난한 노정을 거치는 동안 살아 있는 사람은 49재(齋)를 지내 망자를 위무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49일간 지난 삶에 대해 심판 받는 과정을 거친다고 보면 됩니다. 49일까지도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망자는 8대왕에게 이르는데, 그 기간은 100일이 걸립니다. 그리고 죽은 지 1년이 되는 날에는 9대왕, 3년째 되는 날에는 10대왕인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을 만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도전륜대왕의 심판을 받은 망자는 모두 다음 생의 길이 정해집니다. 그래서 제10 오도전륜대왕도(五道轉輪大王圖)에는 빙산(氷山)이나 철산(鐵山) 같은 지옥 대신 선악의 응보에 따라 육도(六道)로 윤회를 시작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시왕도(제1진광대왕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156.1×113cm, 덕수1868 <시왕도(제1진광대왕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156.1×113cm, 덕수1868

<시왕도(제10오도전륜대왕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156.1×113cm, 덕수1868 <시왕도(제10오도전륜대왕도)>,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156.1×113cm, 덕수1868

1대왕도부터 9대왕도까지 9폭의 시왕도는 구성과 형식이 대부분 비슷합니다. 용머리 장식을 한 등받이 의자에 앉은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배치하고, 하단에는 지옥 장면을 묘사합니다. 오도전륜대왕의 마지막 심판을 그린 10대왕도는 1대왕도부터 9대왕도까지 그려졌던 왕들의 모습이나 지옥의 모습도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도전륜대왕은 털모자를 쓰고 칼을 든 무장(武將)의 모습입니다. 하단의 지옥도 다른 왕들의 지옥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망자는 오도전륜대왕을 마지막으로 다음 생애로 윤회를 해야하기에 이 대왕도에서는 지옥의 장면은 사라지고 다음 생애로의 길이 펼쳐집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人], 천상[天]을 형상화한 여섯 갈래 길[六道]이 바로 다음 세상으로 가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머리에 광배를 표현한 것이 다음 생에 천[天]으로 가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망자는 오도전륜대왕까지 3년동안 10명의 왕 앞을 지나며 심판을 받고 명부를 마무리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이 장면은 죽음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겠지요?

불화의 봉안처와 화승

불화에는 일반적으로 조성 연대와 봉안처, 불화를 그린 화승(畫僧)을 기록한 화기(畫記)가 적혀 있습니다. 화기는 불화를 조성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시왕도에는 화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왕들의 이름이 적힌 방제(傍題)를 보면 글자가 잘린 흔적이 있습니다. 이 흔적으로 미루어 불화가 원래의 봉안처를 떠난 뒤 무슨 연유로 화기가 훼손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박물관에서 불화를 수장(收藏)하게 된 연유를 적은 소장 카드에 따르면, <시왕도>는 1909년 개인에게 구입한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화는 북한산성 내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로부터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불화의 원봉안처라고 전해지는 태고사는 고려 말기에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주석(駐錫)했던 절입니다. 하지만 전하는 기록일 뿐 정확한 출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되는 불화의 복장물(腹藏物) 가운데 이 시왕도와 관련 있어 보이는 것이 있어 주목됩니다. 복장물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해 다라니(陀羅尼), 직물 조각, 정갈히 접은 황초폭자(黃稍幅子) 등으로 형식상 불화 속에 봉안되었던 복장물입니다. 여러 물목(物目) 가운데 직물 조각에서 중요한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시왕도의 원문(願文)으로, 왕실의 시주로 시왕도를 새롭게 조성했다는 기록과 함께 주상전하인 순조(純祖, 재위 1800~1834)를 비롯해 왕비, 세자, 세자빈의 축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화승(畫僧)은 신겸(信謙)과 신선(愼善)이며, 청나라 도광(道光) 9년인 1829년에 조성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불복장물, 조선 19세기, 고적29298 불복장물, 조선 19세기, 고적29298

 <시왕원문十王願文>, 조선 1829년, 고적29298(10-4) <시왕원문十王願文> , 조선 1829년, 고적29298(10-4)

이 직물 조각, 즉 시왕도의 원문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조성연대를 비롯하여 왕실이라는 축원대상, 그리고 제작화승이 신겸이라는 점입니다. 신겸은 19세기 경상도에서 이름을 떨쳤고, 그 명성이 한성부를 넘어 경기도까지 전해진 화승입니다. 그는 1829년 북한산성 내에 있던 중흥사(重興寺)로 초청을 받아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세계를 그린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를 조성했습니다. 이 해에 신겸은 중흥사에서 다른 불화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추론할 뿐입니다. 그런데 원문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을 통해 그가 시왕도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시왕도가 신겸이 제작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겸이 조성한 불화 가운데에는 시왕도 초본(草本)이 남아있어 앞의 시왕도가 비교가 됩니다. 신겸이 그린 시왕도 초본과 앞의 시왕도 10폭과 비교해 보면 도상(圖像)이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유려한 필선에 섬세함 대신 강함을 더했으며 적색과 녹색의 대비가 뚜렷하고, 무엇보다 검(劍) 등의 지물(持物)은 신겸이 제작한 <시왕도> 도상의 특징으로 지적됩니다. 그렇다면 이 <시왕도>는 신겸이 세 폭의 <삼세불회도>를 조성한 후 중흥사에서 조성한 <시왕도>라고 추정해도 무리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태고사와 중흥사는 모두 북한산성 안에 있었던 사찰입니다. 일제강점기 화재로 중흥사가 전소되었고, 그 후 사찰의 성보문화재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 때 시왕도는 태고사로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후 태고사에 있었던 불화가 박물관으로 입수된 것은 아닐까요? 100여 년 전의 사찰문화재가 어떻게 박물관으로 이동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남아있는 자료와 기록으로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과 함께’가 1편에 이어 2편까지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해 ‘국내 최초 쌍천만 시리즈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두려움을 넘어 판타지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명부(冥府)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이 시작이요, 다음 생으로 가는 제10오도전륜대왕 편이 끝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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