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몸[劍身]의 폭이 좁고 긴 세형동검(細形銅劍)은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한반도 전 지역에서 출토되어 ‘한국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데, 손잡이나 검집이 주로 나무로 만들어져 대부분 검몸만 발견됩니다.
1988년 처음 시작된 다호리 유적의 발굴 조사는 세형동검이 어떻게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호 무덤 바닥에서 세형동검이 꽂힌 검집이 발견된 것입니다.
세형동검과 검집, 창원 다호리 유적, 1988년 발굴, 초기철기시대, 길이 61.1cm(좌), 60.9cm(우)
발견의 순간
1988년 1월의 어느 겨울날, 삽과 호미, 붓,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다호리 마을의 논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은 누군가가 땅을 파헤쳐 도굴 갱으로 보이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유적이 더 이상 파괴되는 것을 막고자 땅을 파고 안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1미터 넘게 깊숙이 파 내려갔을 즈음 흙과는 조금 다른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온전한 형태의 통나무 관이었습니다. 관을 들어내자 무덤 바닥 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묻은 대바구니도 발견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검과 검집, 청동창, 청동거울, 허리띠 장식, 청동방울, 철도끼, 철손칼, 오수전(五銖錢), 붓 등 다양한 껴묻거리[副葬品]가 담겨 있었습니다.
1호 무덤의 통나무 관
대바구니에 담긴 유물 출토 모습
제작 방법
대바구니에서 확인된 검과 검집은 모두 3점입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흙과 녹이 엉겨 검과 검집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엑스레이(X-ray) 촬영을 통해 검의 크기와 형태를 확인한 후 보존 처리를 하여 검을 빼냈습니다. 세형동검 2점과 철검 1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검집은 가운데 마디가 돌출된 대나무 형태입니다. 두 개의 얇은 나무판을 겹친 다음 청동금구를 끼우고 실을 감거나 옻으로 접착해 단단히 고정했습니다. 검집 안쪽에는 나무를 파 검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세형동검은 검몸과 손잡이를 하나로 만드는 ‘중국식동검’과 달리 각 부분을 따로 만든 뒤 조립하여 완성합니다. 일반적으로 청동으로 만든 검몸과 ‘T’자형 손잡이, 손의 뒤쪽을 받쳐 주는 받침, 칼자루 끝장식으로 나뉩니다. ‘T’자형 손잡이의 머리 부분에 뚫린 구멍에는 검몸 끝의 슴베를 끼워 넣고, 손잡이 꼬리 부분은 받침에 뚫린 구멍에 끼워 고정합니다. 그리고 받침 아래쪽에 칼자루 끝장식을 놓고 실을 단단히 감으면 검이 완성됩니다.
검집의 세부 모습
세형동검의 세부 모습
옻칠
검과 검집의 나무로 만들어진 부분에는 검은 옻을 칠했습니다. 옻칠은 방수·방충·방부(防腐)·내열 등의 효과가 있으며,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광택을 살려 심미적 가치를 높여 줍니다. 또 검과 검집을 조립할 때 견고함을 높이기 위해 접착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다호리 유적 주변에는 칠원면(漆原面), 칠서면(漆西面), 칠북면(漆北面) 등 옻과 관련된 지명이 많습니다. 오래전부터 다호리 일대에서 옻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
지금까지 다호리 유적에서는 수백 점의 청동기와 철기가 출토되었으며, 그릇과 무기·붓·부채 자루 등 다양한 유물에 옻칠을 했습니다. 그중에는 청동거울, 청동방울, 오수전과 같이 외부에서 수입된 유물도 있습니다. 이는 다호리 유적이 가까운 낙동강을 이용해 주변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 줍니다.
1호 무덤의 주인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도굴되었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청동기 15점, 철기 44점, 유리구슬 298점 및 각종 칠기와 목기, 감, 밤, 율무, 대바구니, 돗자리, 노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형동검과 검집은 원료를 채취하고 제작하는 과정이 복잡한 귀중품으로, 일부 특권층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세형동검과 검집은 2,000년 전 다호리 마을에 살았던 지배자의 힘과 권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