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아미타여래구존도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 고려의 금강산 신앙

세로 22.5cm, 가로 13cm의 작은 나무판 양면에 섬세한 필치의 금선묘(金線描)로 불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1307년 노영(魯英)이 제작한 〈아미타여래구존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옛 지정번호 보물 제1887호)는 조성 연대와 작가, 발원자(發願者)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려시대 불화입니다.

노영, 〈아미타여래구존도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앞면과 뒷면, 고려 1307년, 칠 위에 금, 22.5×13.0cm, 보물, 본관12360

노영, 〈아미타여래구존도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 앞면과 뒷면, 고려 1307년, 칠 위에 금, 22.5×13.0cm, 보물, 본관12360

나무판 하단 양 끝에는 촉이 있어서, 어딘가에 꽂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예배도에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명문(銘文)이 남아 있습니다. 촉과 촉 사이 바닥 면에는 ‘大德十一年丁未八月日 勤畫魯英同願□得□(대덕십일년정미팔월일 근화노영동원□득□)’이 남아 있고, 지장보살이 그려진 면에는 직사각형 구획 안에 ‘同願□惠朴益松全亘申良成幹(동원□혜박익송전긍신량성간)’이라는 명문이 있습니다. 이로써 대덕 11년, 즉 1307년 8월에 화사(畵師) 노영이 그렸고, □득을 비롯해 □혜, 박익송, 전긍, 신량, 성간이 함께 발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판 가장자리는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 테두리처럼 금강저(金剛杵) 문양으로 장식되었고, 그 안쪽에 화려한 금니(金泥, 금물)로 부처와 보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앞면 상단에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취한 아미타여래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팔대보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발(鉢), 버드나무 가지, 금강저와 같은 지물(持物)을 든 팔대보살이 두 줄로 서서 중앙을 향해 몸을 살짝 틀었습니다. 빈 공간은 구름무늬로 채워져 있습니다. 반대 면에는 지장보살과 담무갈보살이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하단을 보면 암벽 위에 원형 보주(寶珠)를 들고 지장보살이 앉아 있고, 좌우에 지장보살을 향해 예를 올리는 세 인물이 있습니다. 오른쪽에 묘사한 사람은 명문으로 화사 노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 주변은 구름으로 메워져 있습니다. 구름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 보면 상단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지장보살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예배자를 배치해 좌우 균형을 이룬 하단과 달리, 상단의 구성은 다소 독특합니다. 여러 권속(眷屬)을 거느린 보살이 오른쪽에 치우쳐 있고, 왼쪽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봉우리 사이로 보이는 절벽 위에는 보살에게 예배를 드리는 한 인물이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물 옆에 ‘태조(太祖)’라고 쓰여 있어 이 인물이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王建, 877~943)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의 세부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예배도>의 세부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불국토(佛國土)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회양 정양사조(淮陽 正陽寺條)」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올랐을 때 담무갈보살이 돌 위에 몸을 나타내어 광채를 발산하였고, 태조가 신하들과 함께 절을 드린 뒤 정양사(正陽寺)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따라 화면 속에 광채를 뿜으며 서 있는 보살이 담무갈보살, 즉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보살의 의역)이고 주변의 암벽으로 금강산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담무갈보살예배도〉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금강산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금강산은 담무갈보살의 진신(眞身)이 머무는 불국토로 추앙받았습니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 머무는 곳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 있으니, 예부터 보살 무리가 그 안에 머물렀다. 지금은 법기보살이 보살 천 이백 인과 함께 그 가운데 계시며 설법하고 있다.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 제32, 『대방광불화엄경』 80권본

네 개 큰 바다 가운데 보살이 사는 곳이 있는데, 이름을 지달(枳怛)이라 하였다. 과거의 여러 보살들이 항상 그곳에 머물렀다. 지금은 그곳에 담무갈이라고 하는 보살이 있어 1만 2천의 보살 권속과 함께 항상 설법하고 있다.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 『대방광불화엄경』 60권본

『화엄경』에서 말하는 ‘바다 가운데’를 한반도로 보고, 한반도의 금강산을 『화엄경』의 ‘금강산’으로 보는 신앙은 고려 후기부터 나타났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강산의 담무갈 신앙은 주로 12~13세기 기록부터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최자(崔滋, 1188~1260), 민지(閔漬, 1248~1326) 같은 고려인들이 남긴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금강산을 담무갈보살의 진신이 사는 곳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고려 전기에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 혹은 풍악산(楓嶽山) 등으로 불렸고, 고려 후기부터 『화엄경』 「보살주처품」에 근거한 ‘금강산’ 또는 ‘기달산(怾怛山)’ 등의 명칭이 나타납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았을 때,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담무갈보살을 보았다는 일화는 후대인들이 만들어 낸 전설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금강산이 불교 성지로 추앙받았음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보았다는 일화는 비단 태조 왕건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금강산유점사사적기(金剛山楡岾寺事蹟記)』에 따르면 신라시대 승려 의상(義湘, 625~702) 역시 금강산에 나타난 담무갈보살을 만났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도 의상 당시의 기록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조선시대 태조와 세조가 금강산에 가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금강산에 담무갈보살이 머문다는 보살주처(菩薩住處) 신앙을 통해 금강산이 불교 성지로 상징성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새 왕조를 연 인물의 설화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적 인연으로 건국 혹은 정변(政變)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들과, 금강산 불교를 더욱 신성화하려는 목적이 맞물려 금강산 설화가 더욱 성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의 불교 성지, 금강산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63)은 원나라 진종(晉宗, 1293~1328)의 명으로 금강산에 향을 공양하기 위해 고려에 방문했습니다. 금강산은 단순히 보살이 머무는 공간을 넘어서 불교 성지가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문집에는 금강산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양하러 왔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권근(權近, 1352~1409)에 따르면, 천하의 사람들이 금강산에 오고자 하였으며 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걸어 놓고 예배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고려 후기 문인 최해(崔瀣, 1287~1340)는 금강산을 보면 죽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당시의 인식을 기록으로 남겼고, 권근은 금강산에 3번 오르면 삼악도(三惡道)를 면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악도는 악한 일을 한 탓에 죽어서 받게 될 고통의 세계를 의미하고,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의 세계를 삼악도라 합니다. 이처럼 금강산은 경전에 언급된 보살 거처 공간이자, 내세 신앙과 관련된 성지로 숭배되었습니다.
지공의 기록에서처럼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금강산을 불교 성지로 인식하였고, 원 황실은 금강산에 큰 불사(佛事)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순제(順帝, 1320~1370)의 비(妃)였던 고려 출신 기황후(奇皇后)는 원 황제와 황태자를 위해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대규모 불사를 일으키고 금1,000정과 장인을 보내 사찰을 중창하였습니다.
고려 후기 금강산 신앙을 반영하듯 금강산에서 소형의 아미타삼존불상,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금강산(강원도 회양군 장양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큰 화반형(花盤形) 귀걸이를 하고 화려한 영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금강산 출토 소형 불보살상에서는 고려 후기 원나라 황실에서 유행했던 라마교 불상의 영향이 많이 보입니다.

〈금동관음보살좌상〉, 전 회양 장양면 장연리, 고려, 금동, 높이 18.6cm, 보물, 본관11724 〈금동관음보살좌상〉, 전 회양 장양면 장연리, 고려, 금동,
높이 18.6cm, 보물, 본관11724

〈금동관음보살좌상〉, 전 회양 장양면 금강원리, 고려, 금동, 높이 11.2cm, 본관10328 〈금동관음보살좌상〉, 전 회양 장양면 금강원리, 고려, 금동,
높이 11.2cm, 본관10328


금강산 신앙은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원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도 건국 바로 직전(1390~1391년), 금강산 비로봉에 사리구(舍利具)를 봉안했습니다. 금강산의 험준한 암벽에서 발견된 불보살상은 고려시대 금강산 신앙의 일면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금강산에서 발견된 상 대부분이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 해주역사박물관 등 북한에 남아 있고, 금강산의 사찰도 일제강점기 자료로 살펴볼 수밖에 없어서 고려시대 금강산 신앙의 면모를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남북 간 활발한 문화 교류로 고려의 불교 성지였던 금강산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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