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인 심사정(沈師正, 1706~1769)이 그린 묵모란도(墨牡丹圖)입니다.
<묵모란도>, 심사정(1706~1769), 조선 후기, 1767년, 종이에 수묵, 136.4×58.2cm, 덕수3672
검은 모란이지요. 하지만 검은 모란은 없습니다. 흰 모란과 붉은 모란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란의 색입니다. 어쩐지 매우 낯선 느낌입니다. 그림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니 모란 이외에도 몇 가지 식물과 새 한 마리가 보입니다. 새가 앉아있는 나무는 목련입니다. 목련과 모란꽃 밑에는 괴석(怪石)이 듬직하게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난초도 보입니다. 목련, 모란, 난초, 괴석, 새를 종이에 먹으로만 그린 꽤 큰 세로형 그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련 가지가 끝나는 곳을 눈으로 쫓아가니 ‘정해년(1767) 겨울, 먹으로 즐기노라[墨戱]’라고 썼습니다. 작가 나이 61세 때의 겨울에 그렸다는 것을 적은 것이지요. 목련과 모란은 모두 봄에 피는 꽃들입니다. 추운 겨울 작가는 다가올 봄의 꽃들을 상상하며 이 그림을 그렸나봅니다. 꽃과 새, 화초를 그린 그림을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난초와 괴석이 더해진 셈입니다. 난초는 사군자에 속하는 주제이고 괴석도 문인, 사대부들이 애호하던 주제였습니다. 심사정은 문인신분의 화가였기에 계절감을 보여주는 화사한 꽃과 새를 문인다운 소재와 함께 조화시켜서 수묵으로만 그린 것 같습니다. 목련은 꽃눈이 붓과 같다하여 목필(木筆)이라고도 하고 꽃봉우리가 모두 북쪽을 향해 피기 때문에 북향화(北向花)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군자의 도를 다하는 꽃이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북쪽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문인화가다운 선택이지요. 조선 후기에는 묵모란도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그림처럼 여러 가지 소재가 잘 어우러진 큰 그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중간에 화려하게 피어있는 두 송이 모란입니다. 활짝 피어오른 큼직한 모란은 마치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먹을 쓰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작가의 먹을 쓰는 솜씨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타오를 듯 뜨거운 색감의 적모란은 흔히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합니다. 먹으로 그린 불꽃같은 모란은 붉은 모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 테지요. 그러나 이 검은 모란은 마치 검은 옷을 입은 지적인 미인처럼 보입니다. 아름답지만 절제되고 세련된 모습입니다. 화려함을 절제한 고급스러운 아름다움을 이 그림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란도(부분)>, 《제가화첩》, 심사정(1706~1769), 조선 후기, 종이에 색, 29×19cm, 본관5041
이 모란도는 같은 작가의 이른 시기 모란꽃 그림입니다. 수묵이 아닌 연한 채색을 써서 그렸고 꽃술과 꽃잎까지 세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61세에 그린 검은 모란에 비하면 풋풋하고 고와 보이네요. 색을 써서 화려한 모란을 그렸지만 담담하고 청신(淸新)합니다. 마치 연분홍 저고리를 단정히 입은 소녀같습니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이 좋아했던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랑 받은 꽃 - 모란
모란은 장미와 함께 인간이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품과 같은 꽃입니다. 아름답고 기품 있으며 무엇보다 화려합니다. 예로부터 모란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부귀(富貴)를 상징하고 꽃의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란은 중국문화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모란과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으로는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 그리고 『삼국사기』에 전하는 설총(7세기 말~8세기 전반)의 「화왕계花王戒」가 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와서도 모란을 심는 기록이나 모란에 대한 시가 빈번히 등장하여 모란에 대한 사랑이 꾸준히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모란은 우리 민족이 신분을 초월하여 사랑하던 꽃입니다.
<모란도(부분)>, 필자미상, 조선시대, 종이에 색, 192.5×57.5cm, 신수15749
왕가에서는 괴석 위에 여러 가지 색의 모란이 화려하게 표현된 병풍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특별히 ‘궁모란병(宮牡丹屛)’이라 합니다. 무척 화려하고 웅장해 보입니다. 그래서 모란병풍은 왕가의 영광과 번영을 기리는 모든 행사에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또한 모란병풍은 임금의 초상화 뒤에 배치되었고 국장(國葬)에까지 사용되었습니다. 화려한 모란병풍은 점차 사대부가에서도 쓰기 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의 혼례 식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화가 유행하면서부터는 이와 같은 ‘궁모란병’ 스타일을 따른 민화도 수없이 그려졌습니다. 민화 모란병풍은 소박한 필치이지만 부귀와 영화라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소망을 보여주듯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사귐 속에서 피어난 모란꽃
<모란>, 《표암첩豹菴帖》, 강세황(姜世晃, 1713~1781), 조선 18세기, 비단에 담채, 28.5×22.3 cm, 덕수3104
이 그림은 표암(豹菴) 강세황(1713~1781)의 모란 그림입니다. 강세황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사대부 화가로,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손꼽힙니다. 조선시대 화가들 중 그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글로 써서 남긴 사람이 많지 않은데 강세황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 후기의 화가와 그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대단히 고마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심사정의 <묵모란도>는 강세황과의 사귐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강세황은 지금 전해지지는 않지만 심사정이 그린 <수묵화죽도(水墨花竹圖)>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평가하였습니다.
수묵이 어둑한 것을 그림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니
연지와 백분으로 뭇 꽃 그리기 무어 어려울까?
가슴 속에 안개와 구름의 자취가 없으면
붓 아래 달고 속된 기운 어찌 없앨까?...중략
또 그 위에 몽땅 붓으로 꽃을 그리니
화폭 위에 방긋 웃는 미인의 자태라...중략
먹빛이 무르녹음에 실물과 분간하기 어려워라...중략
일찍이 그대와 방외의 사귐 맺었더니
헤어져 있음에 무슨 수로 자주 만날까?
축에 담은 그림 다만 두어 점...중략
때때로 펴볼 때 마다 낯빛이 환해지고
궁벽한 곳에서 함께 하니 나는 외롭지 않네...중략
어떤가요? 서로 헤어져 있으나 그림으로 사귐을 이어가는 두 선비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화려한 색채로 꽃을 그리기는 쉬우나 수묵으로 그 모습을 재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심사정이 수묵을 써서 속된 기운 없이 실물과 분간하기 어렵게 꽃을 그렸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 평가가 비록 묵모란 그림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수묵을 써서 그린 꽃 그림에 대한 것이니 그가 먹으로 꽃을 대단히 잘 그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가를 한 사람이 당대의 손꼽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강세황의 모란 그림은 살짝 붉은 색을 썼으나 수묵으로 모란의 화려함을 충분히 살려냈습니다. 모란 옆 꽃가지를 함께 그려 그림의 균형도 잘 살렸네요. 조선 후기 모란꽃과 사군자를 함께 그려낸 전통은 이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 말기에는 ‘허모란’이라 불린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8-1893)가 묵모란 그림으로 명성을 떨치며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심사정의 <묵모란도>는 화왕(花王)으로 불리는 화려한 꽃의 대명사 모란을 세련되고 고급스런 수묵화로 재해석한 뛰어난 작품입니다. 조선시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위엄과 부귀의 상징으로 사랑받은 모란꽃은 지금에 와서도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문화 표상 중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