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흩어진 그림, 박물관에서 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서로 이어지는 두 폭의 걸개그림이 있습니다. 한 폭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29년에 구입하여 <삼학사도(三學士圖)>(본관11415)라는 명칭으로 등록했고 다른 한 폭은 그 이듬해에 다른 소장가에게 구입하여 <사연도(賜宴圖)>(본관11596)라는 명칭으로 따로 등록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두 그림이 한 작품의 일부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그림들이 <권대운 기로연회도>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두 작품을 같은 형식의 족자로 새로 장황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박물관에는 <권대운 기로연회도>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삼학사도>와 <사연도>를 병풍과 비교해 보면, 각각 병풍의 제4, 5폭과 크기와 묘사 내용, 표현이 거의 일치합니다. 흩어진 병풍의 여덟 폭 가운데 두 폭이 우연히 박물관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 흥미롭습니다.
작가 미상, <권대운 기로연회도>, 조선 1689년경, 비단에 색, 각 139×60cm, 본관11415, 본관11596
권대운이 기로회 입소와 정치적 재기를 자축하기 위해 열었던 연회를 그린 그림입니다. 원래 8폭 병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모임 참석자를 묘사한 중앙의 두 폭이 남아있습니다.
계회도의 전통을 잇다
조선시대에는 계모임을 그린 계회도(契會圖)가 발달하였습니다. 문인 관료사회에서는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기나 같은 근무처 선후배와 계를 꾸려 동료의식을 두텁게 다지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초기의 계회도는 산수화에 가까웠습니다. 모임 장소의 풍광을 산수화로 표현했고 참석자는 작게 그렸습니다. 대신 그림 아래에 참석자의 이름과 벼슬을 쓴 좌목(座目)을 두어 모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권대운 기로연회도> 병풍의 제8폭은 좌목이므로 이 그림이 계회도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9명의 남성들은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1612~1699)을 필두로 모두 사모관대에 도홍색 단령(團領)을 갖춘 관리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도홍색은 복숭아 빛이라는 의미로 요즈음은 여성적 색채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성 복식의 색으로도 사랑받았습니다. 도홍색 단령은 관리들의 일상 근무복이었습니다. 반면 흉배를 붙인 어두운 녹색이나 남색 단령은 조례(朝禮) 등 공식 행사에서 입는 정장이었습니다. 이 연회는 국가의 공적 행사가 아니었기에 참석자들이 도홍색 단령을 입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선에 빗댄 아취 있는 모임
이들이 모인 권대운의 저택은 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택 지붕 너머 청록산수로 그린 산허리의 일부가 남산이라는 배경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병풍을 보면 계곡과 기암괴석이 이어지고 학이 노닐고 있어 세속에서 벗어난 별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택을 감싼 소나무와 대나무도 공간의 격조를 높이고 있습니다. 못에는 연꽃이 피어있고, 석축 둘레에는 옥난간을 둘렀습니다. 높고 넓은 기와집 대청마루에는 푸른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돗자리를 깔았고, 연회 자리 뒤에는 수묵으로 그린 산수화 병풍을 둘러쳤습니다. 술을 따르는 탁자에는 중국의 고대 청동기와 채색자기가 놓여있습니다. 권대운의 저택이 실제로 이러한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사인물화에 등장하는 고전적인 모티브를 빌려 아름답게 꾸며 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옥(李沃, 1641~1698)은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四老宴會屛序)」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글에 따르면 권대운은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연 이도회(履道會)나 북송 때 문언박(文彥博, 1006~1097)이 주관하고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기록으로 남긴 진솔회(眞率會)와 같은 역사 속 유명한 기로회를 본받아 이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종남사로회(終南四老會)’, 즉 종남산 네 노인의 모임이라 불렀습니다. 남산의 별칭이 종남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남산은 원래 중국 시안(西安) 근교에 위치한 산입니다. 왕유(王維, 699?~761?)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노래한 명승이며 종리권(鐘離權), 여동빈(呂洞賓) 등 신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저택의 배경을 환상적으로 묘사한 것은 이 모임을 중국 역대의 기로회에 비기는 회화적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시중을 드는 여인들은 중국 당나라 때의 복식을 입고 있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마른 몸매는 명대의 화가 구영(仇英, 1494?~1552)이 전형화한 고전적 미인 그림에 가깝습니다. 관람자는 이러한 여성 표현을 보며 선녀들이 시중드는 신선이나 당ㆍ송 때 사대부들의 격조 높은 모임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 부분
술을 나르는 여인들은 당나라 때의 고전적인 복식을 입고 있어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탁자에 놓인 고동기(古銅器)또한 연회의 높은 격조와 아취를 보여줍니다.
환국의 한복판에서 남긴 집단 초상화
「사로연회병서」에는 그림의 제작 배경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을 반대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되찾았습니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실각했던 남인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을 탄압해 재집권에 성공한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 중앙을 양분하듯 솟아오른 오동나무는 의미심장합니다. 성군의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봉황이 깃드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환국을 단행한 숙종은 성군이며, 남인은 성군을 모시는 군자의 붕당이라는 상징을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됩니다. 숙종은 권대운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해 기로대신(耆老大臣)으로 우대하였습니다.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1617~1704), 예조판서 이관징(李觀徵, 1618~1695), 공조판서 오정위(吳挺緯, 1616~1692)는 모두 칠순을 넘은 나이였습니다. 권대운의 초대로 모인 네 명의 남인 노대신은 정치적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연회에는 노대신의 아들 가운데 관직에 오른 권규(權珪, 1648~1722), 목임일(睦林一, 1646~?), 이옥(李沃, 1641~1698), 오시만(吳始萬, 1647~1700)과 권대운의 손자 권중경(權重經, 1658~1728)이 배석했습니다. 「사로연회병서」의 기록과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마루 안쪽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목내선과 권대운이고 그 좌우가 이관징과 오정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 옆에 좌우로 늘어앉은 인물들이 각 대신의 아들이며, 가장 오른쪽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권중경입니다. 나이에 따라 마루높이를 달리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관복의 색이 더 밝은 것도 흥미롭습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 부분
왼쪽부터 이관징, 목내선, 권대운, 오정위의 모습입니다. 각각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이목구비의 개성이 뚜렷합니다. 네 사람이 모두 정면을 향하도록 그린 것도 집단 초상화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화가는 각각의 얼굴 특색이 잘 드러나는 집단 초상화에 가깝게 아홉 사람을 그렸습니다. 기로연회도 속 권대운의 모습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선현영정첩(先賢影幀帖)》 중 <권대운 초상>과 비교해 보면 깊이 파인 눈두덩, 날카로운 콧날과 같은 개성이 잘 포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병풍의 제1폭에 「사로연회병서」, 제8폭에 좌목이 있었으므로 텍스트만으로도 모임의 의의를 충분히 밝힐 수 있었음에도 참석자의 면면을 최대한 시각적으로 전하고자 한 점이 독특합니다. 실제 공간을 왜곡하여 아홉 명 모두가 평행으로 배치된 상을 앞에 두고 늘어앉은 모습으로 표현한 것도 단체사진처럼 참석자의 앞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권대운은 일흔이 넘은 네 대신이 평생 정치적 부침을 함께했던 점을 강조하며 동료애와 임금의 은혜가 후대에 망각되지 않도록 자손들이 힘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화원을 불러 모임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옥에게 그림의 서문을 쓰게 한 것은 되찾은 권세를 영원히 남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소망대로 남인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글과 그림으로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5년 후,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은 몰락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관작을 잃고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최연소자인 권중경은 붕당과 가문의 쇠락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고,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는 권력을 기념하는 그림이면서도 그 무상함을 전하는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