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장복(九章服)은 국왕이 지녀야 할 덕목을 의미하는 9종류의 장문(章紋)을 옷에 그리거나 수놓아 군왕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의복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까지 황제, 왕, 왕세자, 왕세손이 입던 예복의 하나인 면복(冕服)입니다. ‘면복’이란 머리에 쓰는 면류관(冕旒冠)과 몸에 착용하는 곤복(袞服)을 합한 명칭이며 구장복은 곤복의 구성품 가운데 ‘의(衣)’에 해당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장복은 중요민속문화재(옛 지정번호 중요민속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된 2건입니다.
구장복(은조사 재질) 전면(左)과 후면(右),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총길이 137.5cm, 화장 94.5cm, 중요민속문화재, 신수6328
구장복(갑사 재질) 전면(左)과 후면(右),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총길이 136.5cm, 화장 97cm, 중요민속문화재, 신수6328
면복은 혼례 등의 가례(嘉禮)를 비롯하여 종묘사직의 제사인 길례(吉禮), 그리고 국상과 같은 흉례에서 대렴의(大斂衣)로 사용했습니다. 면복은 중국의 전형적인 법복(法服)으로, 면류관에 늘어뜨린 줄 수와 의와 상(裳)에 장식한 문양 종류에 따라 구분합니다. 황제는 십이류면 십이장복(十二章服), 왕은 구류면 구장복(九章服), 왕세자는 팔류면 칠장복(七章服)으로 구분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명(明) 보다 2등급이 낮은 친왕제가 시행됨에 따라 왕은 구장복, 왕세자는 칠장복을 입었습니다.
면복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지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이미 ‘면류관’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구장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문종 19년(1065)에 거란으로부터 구장복과 옥규(玉圭)를 받았을 때부터입니다. 원 침략기의 공민왕 때 잠시 십이류면, 십이장복을 착용하기도 했으나 공민왕 19년(1370)에 명이 세워진 이후에는 명의 태조(太祖)에게 받은 구류면 구장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국왕의 면복 제도를 제정한 것은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 길례 조가 최초입니다. 명의 멸망과 청(淸)의 성립 이후 청도 명과 같이 조선에 면복을 사여하고자 하는 시도가 빈번하였으나 제도가 일정하지 않아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식 면복 제도의 필요성이 커졌고 영조대인 1744년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를 통해 국속제(國俗制)의 면복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왕의 면복은 영조대 제정한 것이 국말까지 큰 변화 없이 적용되었습니다. 다만 복잡한 제도적 구성으로 인해 왕조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면복은 규(圭), 면(冕), 의(衣), 상(裳), 대대(大帶), 중단(中單), 패(佩), 폐슬(蔽膝), 수(綬), 말(襪), 석(舃)으로 구성됩니다. 곤의는 현의(玄衣: 검은빛을 띄는 웃옷)와 훈상(纁裳: 붉은색의 치마형태의 하의)을 함께 칭하는 용어입니다. 현존하는 것은 현의와 중단이 결합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사용한 직물의 종류에 따라 1건은 은조사구장복[은조사(銀條紗); 경사 2올이 서로 꼬이면서 위사와 짜인 조직을 가진, 무늬가 없고 얇은 견직물], 다른 1건은 갑사구장복[갑사(甲紗); 작은 크기의 마름모형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순인(純鱗) 바탕에 무늬가 있는 견직물]으로 구분합니다. 현의와 중단 모두 홑옷이며 깃이 달려있지 않고 깃에서 섶 아래까지 선단으로 이어지는 교임형입니다. 통이 넓은 소매의 끝과 도련의 주변에도 선단을 둘렀습니다. 뒷길 상부에는 직물로 매듭을 맺은 매듭단추인 암단추 4개를 달았는데 뒷고대 중심에 있는 1개는 방심곡령(方心曲領)을 부착할 때 사용한 것이고, 진동선상에 있는 3개는 후수(後綬)가 달린 대대(大帶)를 부착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홑옷이므로 옷의 안쪽에 어깨 바대와 겨드랑이 바대가 달려 있으며 겉고름과 안고름은 모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장복의 장문(章紋)은 왕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필요한 덕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현의에 안료로 장문을 그리는 것은 ‘양(陽)’을 상징하고 상과 폐슬에 색실로 장문을 수놓는 것은 ‘음(陰)’을 뜻합니다. 현의에 그리는 5개의 장문은 용(龍), 산(山), 화(火), 화충(華蟲), 종이(宗彛) 모양입니다. ‘용’은 신기변화(神奇變化)를 상징하며 양어깨에 얼굴이 마주보도록 그리고, ‘산’은 천하를 진정(鎭定)시키는 의미를 가지며 등의 가운데에 그립니다. ‘화’는 홍색의 불꽃 모양으로 광휘(光輝)를 상징하고, ‘화충’은 꿩 모양으로 문채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종이’는 제기(祭器) 모양으로 효(孝)를 상징합니다. 화, 화충, 종이는 양쪽 소매 뒤쪽 끝에 위에서 아래로 각각 3개씩 그려줍니다. 이 중 종이는 그릇 안에 동물을 그리는데 오른쪽 소매에는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를, 왼쪽 소매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원숭이를 각각 1마리씩 그립니다.
중단은 현의의 받침옷입니다. 길이가 길고 소매와 도련이 넓은 교임형의 홑옷으로, 겉옷인 현의와 형태는 같으면서 현의보다 길이가 선단 너비만큼 긴 것이 특징입니다. 색상이 밝은 청색이고 흑색 선단 고대 부근에 아자(亞字)형 불(黻)무늬 11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다릅니다.
구장복(은조사 재질)의 중단
구장복(갑사 재질)의 중단
면복의 구성물 가운데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이 중단의 색상입니다. 문헌에는 일률적으로 백색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청색입니다. 이처럼 문헌에 기록된 색과 실제 남아 있는 문화재의 색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조 17년 조복(朝服)의 중단인 청색 창의(氅衣)와 백색 창의에 대한 논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비록 제도화 되지는 못했지만 청색의 창의를 중단으로 착용하게 되었는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면복의 중단도 청색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흰색 중단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의례의 내용에 따라 흰색과 청색 중단을 구별하여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중단의 길이는 현의보다 깁니다. 조선 초기부터 현의가 중단보다 조금 짧은 형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영조 19년에 “면의(冕衣)는 옛날에 하사 받은 것인데, 이 옷을 입고 조정에 들어가니, 진실로 중한 것인데 지금은 훈상이 현의 안에 숨겨져 있으니, 상방으로 하여금 그 제도를 고쳐서 위를 현색으로 하고 아래를 훈색으로 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는 의의 길이가 상을 가리지 않도록 조금 짧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구장복 2건의 현의와 중단을 비교해보면 중단이 조금 길어서 아랫단이 보이는데, 이는 영조가 내린 명이 계속 지켜진 것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