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초상화는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48~1941)이 그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의 초상화입니다. 초상화에서 최익현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그려진 반신상으로 그려졌고, 머리에는 모관(毛冠)을 쓰고, 몸에는 심의(深衣)을 걸친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 왼쪽 아래에는 ‘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라고 씌어 있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의 74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최익현은 을사년(1905)에는 75세였고, 74세상을 그렸다면 병오년(1904)에 그려진 초상화입니다.)
이 초상화는 채용신이 그렸던 전형적인 초상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즉 수없이 많은 붓질로 인물의 형태와 양감, 음영 등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모관은 가느다란 세필(細筆)로 마치 영모화(翎毛畵)를 그리듯이 묘사하였고, 심의는 탁한 흰색으로 두텁게 표현하여 맹춘(孟春: 정월)에 입었을 만한 겨울복색을 그렸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 또는 유학자의 초상화는 관복에 사모 또는 심의에 복건을 착용한 모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급제해 정3품까지 벼슬을 했던 최익현이 겨울철 사냥꾼이나 쓰던 가죽감태를 쓴 모습을 하고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은 굉장한 ‘파격(破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익현 초상>(모관본), 조선 1905년, 51.5×41.5cm, 보물, 신수1452
조선시대의 많은 초상화 가운데 모관을 쓴 사대부를 그린 유일한 초상화입니다.
초상화, 주인공과 화가
최익현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고, 185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지적하다가 한직으로 밀려났고, 제주도와 거제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최익현은 위정척사 세력의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항일운동과 의병봉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대마도에 구금되어 있다가, 1906년에 숨을 거둡니다.
최익현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채용신이 초상화를 그리기 전에도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습니다.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察)· 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 …(중략) 이제 또 화승(畵僧)을 데려와서 선생의 초상을 그리고, 3개월 동안 모시다가 돌아갔다. …(후략)”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연보(年譜), 병자년(1876년) 윤5월 선생 44세
채용신은 37세의 늦은 나이에 무관에 합격하여 10여 년간 무관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51세가 넘어서 많은 어진과 공경(公卿)을 그리며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채용신은 칠곡과 정산의 군수로도 임명되었는데, 특히 정산 군수로 있는 동안 최익현을 만나 스승으로 섬기게 되면서 그와 그의 제자,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특히 한일합방(1910년) 이후로는 많은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최익현의 초상화는 이전에도 두 본(本)이상 그렸는데, 최익현의 아들 최영조는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채용신에게 부탁해 2본씩 2번을 그려 총 4본을 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자 최영조가 문인 조재학(曺在學)과 더불어 선생(최익현)의 화상을 그려서 간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린 것이 두세 벌 있었으나 모두 참모습이 아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영조가 조재학과 의논하고 다시 그리려 하던 터에 전주(全州) 사람 채용신(蔡龍臣)이 마침 정산 고을 원이 되었는데 그림으로 유명하였다. 드디어 문인 조영선(趙泳善)을 시켜, 가서 맞이하여 두 벌을 그렸는데 한 벌은 집에 간직하고 한 벌은 조영선이 가져갔다. 그 후에 또 두 벌을 모사해서 한 벌은 태인(泰仁) 태산사(泰山祠)에 모시고, 한 벌은 문인 오봉영(吳鳳泳)이 가져갔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을사년(1905, 광무 9) 2월 20일(계해) 선생 73세
최익현의 문집에 을사년(1905)은 선생(최익현)이 73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채용신이 을사년(1905년)에 그렸다면 73세상이 맞고, 채용신이 74세상을 그린 것이 맞다면 을사년이 아닌 병오년(1906년)에 그린 것이 맞습니다. 왜 이런 오류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익현의 아들인 최영조가 채용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최익현이 사망한 이후에도 최익현의 초상화를 채용신이 그렸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전략)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최익현)의 영정이 압수를 당했는데, 생각건대 혹은 들으셨는지요? 남은 사당만 텅 비어 바라보려 하여도 할 곳이 없어 하늘을 다하는 애통한 마음을 다시 어찌 말하겠습니까? 지금 홍산(鴻山: 지금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지역)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제자인) 지헌하(池憲夏) 친구가 선생을 위하는 정성으로 한 본을 모사하여 과거의 것에 따라 봉안할 계획인데, 이 일은 영공(領空: 채용신)이 아니면 상의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멀리 오실 일을 꺼리지 아니하고, 이에 편지를 올립니다. 진실로 팔순의 시력으로 그림을 그리시기에 어려움이 있겠으나, 바라건대 이 정세를 이해하시어 은혜를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단청(丹靑)은 과거대로 하고 모자와 띠와 예복(禮服)이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곡성(谷城)· 함평(咸平)에는 모두 이미 되돌려 봉안하였는데, 다만 정산(定山)· 포천(抱川)의 두 본은 불에 탔다고 하니, 더욱 통탄스럽습니다. 지금 영정을 그리고 사당에 제사하는 것이 허가가 났으니, 이것으로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이 마비되어 이것으로 간략히 이만 씁니다.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임술(1922) 후월(後月: 윤5월) 21일에 최영조(崔永祚)는 절하고 올립니다.”
이두희, 이충구 공역, 『석지 채용신 실기』 중
이렇듯 채용신은 최익현과 교유하면서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최익현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파격의 초상화
그렇다면 채용신은 어떻게 <최익현 상>(모관본)과 같은 파격적인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요? 이와 비슷한 초상화가 조선후기에도 있었는데, 바로 <강세황 자화상>입니다. 강세황은 조선후기 예단의 총수이자 문인화가답게 여러 본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세황 자화상>은 문인화가가 그린 자화상으로 매우 드문 예이기도 하고, 복색이 당시의 제도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즉 평상복인 옅은 푸른색의 두루마기에 관복을 입었을 때만 쓰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있습니다. 강세황이 당시의 제도를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 이유를 화상찬에 썼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名簿)에 걸린 게라
가슴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露竹)인데
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壬寅年)이라."
즉 강세황은 현재 벼슬에서 물러나 있지만, 과거의 권세와 영광을 잊고 있지 않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이 자신의 마음을 <강세황 자화상>에서 표현한 것처럼, 채용신도 최익현의 상황과 심정을 <최익현 초상>모관본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초상화가 ‘을사년(1905년)’에 그려졌다면 최익현이 73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이때 최익현은 관직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기를 반복하면서, 일본을 배척해야 한다는 우국충정의 상소를 여러 번 올렸습니다. 2월에는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2월 20일에는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최익현이 74세가 되는 1906년에 초상화를 그렸다면,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직전에 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여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병이 나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채용신은 최익현이 73세 또는 74세 때의 모습을 초상화로 그렸습니다. 채용신은 ‘화려한 관복의 고관대작’ 또는 ‘정자관에 단정한 심의의 대유학자’의 모습을 그리기보다는 감태에 두터운 겨울옷을 입은 최익현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항일운동을 하는 ‘의병장’,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상화는 대부분 주인공 또는 후손의 주문으로 그리는 것과 달리 주인공과 화가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