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관료들의 기영회(耆英會)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기영회는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만 70세 이상의 원로 관료와 종친(宗親)들의 모임으로, 덕을 갖춘 원로들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윗부분에 제목을 썼는데 전서체로 ‘耆英’이 보이고 ‘會’는 글자가 지워져 일부만 보입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알려진 기영회도 중에 가장 크며, 연회의 주인공 외에 악공이나 시녀와 같은 부수적인 인물도 묘사해 당시 풍속과 기물, 복식 등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작가 모름, <기영회도>, 조선 1584년, 비단에 색, 163x128.5cm, 국립중앙박물관(신수14888), 보물 제1328호
1584년에 열린 성대한 잔치
그림 속 건물의 대청마루에서 잔치가 한창입니다. 마루에 놓인 두 개의 촛대에 촛불을 밝혀놓은 것으로 보아, 때는 저녁 무렵인 듯합니다. 일곱 명의 원로 관료가 붉은 꽃을 꽂은 검은색 사모[烏紗帽]를 쓰고 흉배가 없는 담홍포를 입고 있습니다. 그중 다섯 명은 호피 방석에 앉아 있고, 나머지 두 명은 가운데로 나와 서로 술잔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참석자들의 명단을 적은 아래쪽 좌목(座目)을 통해 일곱 명의 원로가 홍섬(洪暹, 1504~1585),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정유길(鄭惟吉, 1515~1588), 원혼(元混, 1505~1588), 정종영(鄭宗榮, 1513~1589), 박대립(朴大立, 1512~1584), 임열(任說, 1510~1591)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영회도> 하단 오른쪽의 좌목 부분, 참석자들의 품계와 관직, 이름, 자, 본관, 호 순으로 적혀 있다.
대청마루 중앙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세 명의 인물은 조선의 가장 높은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 앉은 인물이 최고령자인 홍섬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홍섬은 홍문관 대제학을 거쳐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문인으로,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습니다. 그는 1571년 좌의정이 되어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이후 영의정에 세 번이나 거듭 임명되었습니다. 홍섬의 좌우에 앉은 이들은 좌의정 노수신과 우의정 정유길로 보입니다. 오른쪽은 종1품 원혼, 정종영, 박대립의 자리입니다. 정2품 한성부판윤인 임열은 홀로 왼쪽에 앉아 있다가 술을 받으러 나온 상황입니다.
이 연회는 언제 열렸을까요? 1584년은 노수신과 정유길이 70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1581년 노수신은 어머니 상을 당해 좌의정을 사직하고 고향 상주로 내려갔다가 1584년 5월에 상경하여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므로 이 잔치는 노수신이 관직에 복귀한 후에 열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박대립이 1584년 6월에 병환으로 사망하기 때문에 5월과 6월 사이에 열린 잔치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전통을 따라 건국 초부터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양로회(養老會)를 베풀었습니다. 태조 때부터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만 70세 이상의 원로 사대부들을 예우하기 위해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고 연회를 마련했습니다. 기영회는 산이나 강가처럼 경치가 좋은 야외에서 열리기도 했지만, 성종대부터는 주로 훈련원(訓鍊院)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아마도 연로한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기영회를 기념하고 후대에 전하고자 연회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1512년 9월 20일, 중종(재위 1506-1544)은 중국의 이름난 기영회도를 예로 들며, 연회 장면을 그린 병풍을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에는 <향산구로도(香山九老圖)>와 <낙중기영회오로도(洛中耆英會五老圖)>가 있었다. 양로(養老)는 곧 국가의 중요한 일이니, 화공(畫工)을 시켜 그리도록 하여 병풍을 만들고, 대제학(大提學)에게 시와 찬(贊)을 짓도록 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올리라.”
9월 9일 훈련원에서 기영회가 열리고 10여 일이 지난 후, 왕이 잔치의 모습을 그리게 한 것입니다. 홍섬은 1584년의 기영회에 참석하기 20년 전인 1564년에 있었던 원로들의 기영회를 기록하며 화공을 시켜 그림 축(軸)을 제작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이처럼 16세기 중반에 기영회를 기념하며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하나의 관례였습니다.잔치를 아름답고 흥겹게 하는 것들
1584년 원로들의 특별한 날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화원은 잔치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중앙에 건물을 크게 배치하고 지붕의 반은 구름으로 처리하며 아래쪽은 중문과 담장으로 막아 실내의 잔치로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기영회도>의 대청마루 연회 장면
대청마루는 아름답고 품격 있게 꾸며졌습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원로 관료들 뒤쪽의 그림입니다. 가로로 긴 화면이 기둥에 의해 둘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데 왼쪽은 동백과 매화가, 오른쪽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로 오리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림 속 그림’이지만 색을 꼼꼼하게 칠했는데, 장수와 화합과 같은 길상적 의미를 함축한 화려한 화조화는 잔치의 분위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개의 붉은 탁자에 놓인 향로에서는 좋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중앙 기둥 앞쪽에 있는 커다란 탁자에는 꽃가지가 꽂혀 있는 청화백자 항아리[花罇] 두 개가 놓여 있어서 잔치의 화려함을 더해줍니다.
잔치를 흥겹게 해주는 것은 음악과 춤입니다. 난간 쪽에 일렬로 앉은 남성 악공들은 선조(재위 1567~1608)가 보낸 일등 악사입니다. 그들의 연주에 맞추어 두 명의 여성 무용수[女伶]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 아래쪽에는 비슷한 머리 모양과 복식을 한 열 명의 여성이 대기하고 있어 앞으로 펼쳐질 또 다른 무대를 기대하게 합니다. 또 연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입니다. 원로들 앞에 놓인 원형소반에는 먹거리가 담긴 백자사발과 접시가 있습니다. 왼쪽 기둥의 아래쪽에는 왕이 내린 술[宣醞]이 뚜껑이 있는 백자 항아리에 담겨 있습니다. 그 옆 화로 위에는 무언가를 중탕으로 데우는 주전자도 그려졌습니다.
화원은 주인공인 일곱 명의 노인 외에 보조적인 인물들도 공들여 그렸습니다. 백자 항아리 주변에 앉아 있는 의녀들은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쟁반을 들고 한쪽에 서 있는 여종들 또한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마당에서 잔치가 파하기를 기다리는 시종들은 바닥에 반쯤 눕거나 팔걸이에 기댄 채 편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잔치에는 관심이 없어 지루해하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화원이 마치 잔치에 있었던 것처럼 인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았는데, 이듬해인 1585년의 <기영회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기영회도>의 그림 부분 하단에 보이는 시종들의 모습
작가 모름, <기영회도>의 그림 부분, 조선 1585년 이후, 비단에 색, 109.2×61.6cm,
국립중앙박물관(동원2910)
1585년 음력 7월에 열린 기영회에는 좌의정 노수신, 우의정 정유길과 원혼, 정종영, 심수경,
강섬姜暹, 임열任說 이렇게 일곱 명이 참석했다. 이 날의 연회를 그린 기영회도는 여러 점 전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후대에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 가지 복을 누린 신선 같은 노인들
아래쪽 좌목 왼쪽으로 시 다섯 수가 적혀있는데 서체가 모두 다릅니다. 그림 축이 완성되자 기영회에 참석했던 이들 중 다섯 명이 순서대로 써넣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중 첫 번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사는 것 하나도 어질어야 얻는데, 세 가지 복(관직, 장수, 덕)이 나란하니 정녕 천명이라.
‘견마 같은 목숨’이라 하지만, 신선과 더불어 짝하게 되었네.
즐거움이 상산사호(商山四皓)에 못하겠는가, 조심스러움은 응당 낙수 신선에 버금가네.
서리 맞은 흰머리는 술잔에 비치고, 오색 붓 좋은 문장은 맑은 노래 보내네.
문무백관들이 모인 성대한 일이라, 그 풍류를 그림으로 그려 남겼네.
나고 죽길 태평 시절이니. 해가 저문들 무엇을 근심하리오.
壽一人仁得 齊三定命猶 云胡犬馬齒 乃與神仙儔.
樂况商山減 懍應洛仙侔 霜毛侵盃斝 彩筆送淸謳.
盛事衣冠會 風流繪畵留 生終大平世 日暮未須愁.
뛰어난 인재들을 등용하여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렸던 선조조, 높은 벼슬을 했고 오래 살았으며 덕망까지 갖춘 노인들은 임금의 은혜로 태평성대를 이룬 것에 감사하며 이날의 잔치를 충분히 즐겼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