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토기’ 하면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떠올립니다. 무늬가 가득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대비되는 용어로 청동기시대 문화를 상징합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됩니다. 금속이 새롭게 출현하는 시기라 ‘청동기’라는 시대 명칭이 붙었지만 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양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민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시대’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청동기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에 끊임없이 다루어져왔고 많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정말 무늬나 색깔이 없을까
민무늬토기는 넓은 의미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토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개 좁은 의미에서 거친 바탕흙의 토기, 즉 정선되지 않은 바탕흙으로 빚고 거칠게 다듬은 뒤 80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는 토기를 말합니다. 민무늬토기는 무늬가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무늬를 내거나 색을 입힌 토기들이 발견됩니다.
점토를 붙이거나 도구를 사용해 새기거나 눌러 장식한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달리 안료(顔料)와 소성 방법(토기를 굽는 방법)으로 무늬나 색을 냈습니다. 이 토기들은 ‘붉은간토기[赤色磨研土器, 紅陶],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라고 불립니다. 붉은간토기는 일반적인 민무늬토기와는 달리 정선된 바탕흙으로 빚어 붉은색을 입힌 뒤 매끄럽게 윤을 낸 것이고, 가지무늬토기는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무늬를 내고 싶은 부분에 흙 등을 덮어 구워 검은빛을 띠도록 만든 것입니다.
붉은간토기, 전 경남 산청, 청동기시대, 높이 12.8cm, 신2287
가지무늬토기, 전 경남 사천, 청동기시대, 높이 20.0cm(왼쪽),
경주1538, 국립경주박물관
붉은간토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붉은간토기의 특징은 표면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문질러 ‘윤’을 냈다는 점[磨硏]입니다. 이 두 특징은 청동기시대에 처음 등장한 토기 제작 방법은 아닙니다. 신석기시대에도 드물지만 붉은 칠을 한 토기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토기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는 광을 내지 않고 붉은색만 칠한 토기를 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붉은간토기의 경우 청동기시대의 토기로 여겨졌습니다. 이 두 시대의 토기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주칠(朱漆)토기’ 또는 ‘적색토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붉은간토기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입자가 고운 바탕흙으로 만든 점토 띠를 쌓아올려 모양을 잡습니다. 그다음 손이나 도구로 다듬고 붉은색을 칠합니다. 토기가 어느 정도 마르면 붉은색 안료가 잘 붙고 광이 날 수 있도록 도구를 사용해 문지릅니다. 그 후 일정 시간 건조 과정을 거친 뒤 굽습니다.
그런데 선사시대에 어떻게 토기에 붉은색을 냈을까요?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산화제이철을 많이 포함한 붉은색 흙인 석간주(石間硃)를 이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분석에서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는데요. 안료가 잘 붙을 수 있도록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옻입니다. 분석 대상이 된 토기들에서 옻칠의 주성분이 확인되어 보존과학자들은 붉은 칠이 단단히 잘 붙을 수 있도록 옻칠을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붉은간토기는 어떤 모양일까
붉은간토기는 민무늬토기와 모양이 달랐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종류는 비슷하지만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모양은 달랐습니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크게 목을 지닌 항아리[壺], 몸체에서 아가리로 올라갈수록 점차 벌어지는 바리[鉢], 굽다리를 지닌 토기[豆形土器, 臺附土器]로 나뉩니다.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특징에 따라 항아리는 짧은 목 항아리[短頸壺]와 긴 목 항아리[長頸壺], 바리는 깊은 바리[深鉢形土器]와 얕은 바리[淺鉢形土器], 굽다리 토기는 굽다리 항아리[臺附壺]와 굽다리 바리[臺附鉢] 등으로 좀 더 자세히 나뉩니다. 목이 없고 깊은 몸체를 지녔으나 아가리가 오므라드는 토기는 바리가 아닌 ‘옹(甕)’으로 부르기도 하며, 얕은 바리 중 높이가 낮고 높이에 비해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는 경우 ‘완(盌)’이라고도 합니다.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에 붉은간토기는 대부분 굽다리 토기와 항아리의 형태였습니다. 민무늬토기가 바리와 항아리 위주인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 송국리 문화가 유행하던 시기에 들어서면 굽다리 토기는 거의 사라지고 플라스크 모양의 항아리와 함께 작은 크기의 옹(甕)이나 완(盌)이 붉은간토기로 만들어졌습니다.
민무늬토기 바리와 항아리, 청주 용정동, 청동기시대, 높이 35.1cm(오른쪽), 청주6894 등,
국립청주박물관
다양한 모양의 붉은간토기, 진주 대평리 옥방2지구 등, 청동기시대, 높이 30.0cm(왼쪽 맨 뒤), 국립진주박물관 등
붉은간토기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붉은간토기는 민무늬토기에 비해 출토 수량이 많지 않고 제작 시간과 공을 더 들인 토기라는 점에서 실생활보다는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집터보다는 무덤 안에서 출토될 때가 많습니다. 단순히 껴묻거리로 넣었다기보다는 그릇이기에 무언가를 담아서 무덤 안에 넣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문지르기 과정을 거치면서 민무늬토기보다 방수 기능이 좋아졌기 때문에 액체류를 담았던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왜 토기에 붉은색을 칠했을까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붉은색은 장송 의례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피의 색깔인 붉은색은 생명력을 나타내고 안 좋은 기운을 물리치는 힘을 지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붉은색 안료 덩어리 자체가 무덤 안에서 실제로 발견된 사례도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신석기시대 가덕도 장항 유적을 들 수 있습니다. 35호 남자 인골 왼쪽 팔 옆에, 4세 전후 유아로 추정되는 41호 인골 팔 옆에 붉은색 안료가 놓여 있었습니다.
붉은간토기가 죽은 이를 보내는 장송 의례에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청동기시대에 농경 발달로 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마을 내에서도 다양한 생활 의례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서, 큰 건물의 기둥에서, 논과 밭에서, 도랑이나 구덩이에서도 붉은간토기가 발견되는데 무덤과 달리 깨진 조각으로 출토될 때가 많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의례 과정에서 일부러 깨뜨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붉은간토기는 그릇의 기능을 넘어 상징적인 물건으로 다양한 의례에 사용된 청동기시대 아주 특별한 토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