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 왕세자의 복과 건강을 기원하다 : 김민송

불교는 삼국시대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오랜 기간 국교(國敎)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도입되면서 불교는 점차 배척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회화, 조각, 공예품의 제작도 전반적으로 줄어들었으나 왕실 비빈들이 여전히 불교를 믿고 의지했기에 관련 회화, 조각, 공예품 등이 조금씩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함께 살펴볼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도 바로 왕실에서 발원한 불교 공예품입니다.

왕세자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다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조선 1620·1759년,  지름 13.7㎝(대리석 사리합), 1.4㎝(수정 사리병), 보물, 신수9427~9430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 조선 1620·1759년, 지름 13.7㎝(대리석 사리합), 1.4㎝(수정 사리병), 보물, 신수9427~9430

은제 사리합, 조선 1620년, 지름 7.1㎝(바닥), 보물, 신수9429

은제 사리합, 조선 1620년, 지름 7.1㎝(바닥), 보물, 신수9429

남색 보자기와 대리석 합 1점, 유제(鍮製) 합 3점, 은제 합 2점, 그리고 수정 사리병 1점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는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의 탑신 중앙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바깥쪽 사리기인 대리석 합 겉면에는 붉은색 꽃과 검은색 줄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대리석 합은 본래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몸체만 남아 있습니다. 대리석 합 안쪽에 뚜껑이 있는 유제 합 세 개가 차례로 들어 있었고 대리석 합과 유제 합에는 직물 조각과 실 꾸러미, 향목(香木) 등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원통형 사리합 안에 사리를 직접 담은 수정 사리병이 들어 있었고, 사리병은 금으로 만든 뚜껑이 덮여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은제 사리합의 뚜껑에는 용과 구름을 새기고 금박을 입혔습니다. 몸체 바닥에는 점을 찍어 글씨를 새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世子戊戍生                     세자 무술생(1598)
壽福無疆                        수복무강
聖子昌盛                        성자창성
萬歷四十八年庚申五月   만력 48년(1620) 경신 5월

사리기를 감싼 비단 보자기, 조선, 60×65.5cm, 신수9431

사리기를 감싼 비단 보자기, 조선, 60×65.5cm, 신수9431

은제 사리합 바닥에 새겨진 글씨를 보면 1620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세자인 이지(李祬, 1598~1623)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이 사리장엄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만, 세 개의 유제 합은 제작 기법으로 보아 영조(재위1724~1776) 때 탑을 수리하며 추가로 봉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사리기들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남색 비단 보자기에는 별다른 문양은 없으나, ‘귀남성취’, ‘김규홍…귀남축원’ 등의 한글이 쓰여 있습니다. 보자기에 적힌 문구들은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제작하면서 발원자들의 소망을 적은 것으로, 보자기 또한 영조 대 추가로 납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봉인사 부도암 터 사리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두 차례에 걸쳐 제작, 봉안되었습니다.

왕실 원당에 모셔진 사리

봉인사에 사리를 봉안하게 된 이유는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조」에 따르면 청나라 사신 웅유격(熊遊擊)이 사리 1과를 바쳤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궁궐이 아닌 사찰로 보내집니다. 이때 사리를 보낸 사찰이 왕실 원당(願堂)이던 봉인사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탑비에 새겨진 「봉인사세존부도탑기」에도 만력 47년(1619) 천마산 봉인사 동쪽으로 200보 떨어진 곳이 탑을 세우고 중국에서 온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西天國佛舍利記 塔中古文
… 萬曆四十七年己未之夏日中華來于此土越明年庚申五月十四日上命禮官送干天磨山奉印寺東二百步許建塔營堂禮畢書…
「奉印寺世尊浮屠塔記」
… 만력 47년(1619) 기미 여름에 중국에서 건너왔으니, 이듬해 경신 5월 14일 예관에게 명령하여 천마산 봉인사 동쪽으로 200보 떨어진 곳에 탑을 세우고 당을 조영하여 (사리를) 모시게 하였다. 「봉인사세존부도탑기」

이 두 기록을 통해 청나라 사신이 바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봉인사 사리장엄구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시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배격했기에 사리를 궁궐에 들이는 대신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씨의 능침 사찰인 봉인사에 모셨던 겁니다. 봉인사 사리장엄구는 조선이 정책적으로 불교를 배격했으나 왕실을 비롯한 개인들이 신앙으로서 불교를 받아들인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출된 탑과 사리장엄구,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다

봉인사 부도암에 세워진 사리탑은 이후 사찰이 화재로 폐사되자 방치되었습니다. 폐사된 사찰에 방치된 사리탑을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일본인 이와다 센소[岩田仙宗]가 헐값에 사서 일본으로 몰래 반출했습니다. 이렇게 반출된 탑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까요?
1979년 봉인사 재건 과정에서 땅에 묻혀 있던 <풍암대사부도비>가 발견됩니다. 이 비석에서 탑에 대한 기록을 확인한 사찰은 기록 속 사리탑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오사카시립박물관에 탑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1983년부터 일본에 탑 반환을 요청했습니다.
지속적인 요청 끝에 탑을 구입했던 이와다 센소의 반환 유언과 정부의 노력 덕분에 1987년 2월사리탑과 탑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봉인사 사리탑과 사리장엄구는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민간 차원에서 되돌려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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