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신 이항복에게 내리는 문서:이수경

2019년 이항복 종가에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이항복 초상화 2점, 이항복이 손수 쓴 『천자문』 등 모두 1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이 가운데 이항복 관련 기증품은 6점이고, 나머지는 이항복 후손 초상화와 교지 등이 7점, 초상화 함과 보자기가 5점이었습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재상 이항복이 쌓아온 공적의 결실이자 후손이 지켜온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李恒福 扈聖功臣敎書)>, 한호(韓濩)가 글씨를 씀, 조선 1604년, 비단에 먹, 화면 33.5×189.0cm, 전체 36.9×271.3cm, 2019년 이근형 기증, 증9377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李恒福 扈聖功臣敎書)>, 한호(韓濩)가 글씨를 씀, 조선 1604년, 비단에 먹,
화면 33.5×189.0cm, 전체 36.9×271.3cm, 2019년 이근형 기증, 증9377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공신 이항복의 삶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관련된 ‘오성과 한음’ 설화의 영향으로 해학적인 성품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항복은 과거시험을 치던 23세 무렵 이덕형을 처음 만났고, 그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나라를 이끌어간 정치적 동료였습니다. 이항복은 학계에서 실무 능력이 탁월한 관료 학자이자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항복은 선조 임금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다섯 차례나 공신의 반열에 오름으로써 조선시대 공신으로 가장 많이 임명된 명재상이었습니다.
이항복은 37세인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3품 도승지(都承旨)로서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를 의주까지 모셨고, 전쟁 중에는 시의적절한 판단으로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습니다. 그는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병조판서를 다섯 차례 역임하며 안으로는 국방을 책임지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단을 전담하는 외교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전란이 수습된 1599년(선조32) 그는 정1품 공신에게 주어지는 작호를 받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나이 49세인 1604년(선조37)에는 임진왜란 때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던[扈] 공(功)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 자리에 올랐습니다.

교서 뒷면의 제목 부분교서 뒷면의 제목 부분

호성공신 명단 부분호성공신 명단 부분

호성공신 교서에 담긴 이항복의 공적

조선시대에는 공신 선정이 총 28번 있었는데, 호성공신은 14번째로 공신 86명이 임명되었습니다. 이항복과 정곤수(鄭崑壽, 1538~1602) 이렇게 두 명이 1등 공신 자리에 올랐습니다. 2등은 31명으로, 선조의 넷째 아들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 1578~1592)와 다섯째 아들로 훗날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 1580~1619)가 있고,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류성룡(柳成龍, 1542~1607)도 포함되었습니다. 3등에는 이순신 장군을 적극 옹호해 죽음을 면하게 한 정탁(鄭琢, 1526~1605) 등 53명이 있습니다. 선조를 보좌한 내시들, 말을 관리하는 이마(理馬)와 의관(醫官)들도 이례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허준(許浚, 1539~1615)도 호성공신 3등에 임명되었습니다.
공신에 임명되면 국왕이 공신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인 공신 교서가 발급됩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현재 전하는 유일한 호성공신 1등 교서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공신 교서에는 공신의 호칭[功臣號]과 업적, 공신이 받는 혜택(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 노비, 은자)과 함께 임명된 공신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앞부분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앞부분

교서 오른쪽에는 “알린다(敎)”에 이어서 “추충분의 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 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이라는 이항복의 공신 호칭이 있습니다. ‘추충분의 평난공신’은 1590년(선조23) 8월 15일 이항복이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난을 평정하고 받은 평난공신(平難功臣)의 칭호입니다.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 호성공신’은 호성공신의 칭호입니다.
그다음에는 “왕은 이르노라(王若曰)”로 시작해 이항복의 공적이 이어집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고,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함을 겪었으니 경(卿)의 어질고 수고로움을 어느 누가 넘을 수 있겠는가”라며 이항복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또한 “대사마(大司馬, 병조판서)에 발탁되어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고 있어서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와 “추호(秋毫)라도 명나라 은혜로 황제의 힘을 빌려 대국의 계략을 끌어들였다 해도, 또한 경(卿)의 계책에 의지하였으니 어찌 한갓 임금 한 사람만이 즐거워할 일이겠는가. 실로 우리 만백성이 의지할 일이로다”라고 우러러 칭찬했습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재상으로서 이항복의 공적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이항복이 1등 공신으로 받은 혜택이 나옵니다. 초상화를 제작하고, 관작과 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의 관작과 품계도 올리고, 적장자에게는 세습되는 특권과 더불어 대대로 영원히 죄를 사해주겠다는 내용입니다. 물질적 혜택으로는 호위병, 노비, 땅, 말과 함께 은자 50량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교시하니 마땅히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故玆敎示 想宜知悉)”라는 문구로 끝을 맺습니다. 그다음 호성공신 명단이 나오는데, 명단이 끝나는 교서 마지막 부분에는 발급 날짜인 ‘만력(萬曆) 32년’이 쓰여 있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인문(印文)이 있습니다.
이 공신 교서의 글은 『호성·선무·청난 삼공신 도감의궤(扈聖宣武淸難三功臣都監儀軌)』에 실려 있습니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공신에게 주는 혜택 부분이 실려 있는데, 공신 교서와 내용을 비교했을 때 은자의 수량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공신 교서의 ‘은자 50량’과는 달리 의궤와 실록에는 ‘은자 10량’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은자 수량에 이렇듯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의 가치

이 공신 교서를 쓴 인물에 대한 1차 정보는 겉면에 붙어 있는 “한호가 쓰다(韓濩書)”라고 적힌 종이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서 제작 관련 기록 가운데 『호성·선무·청난 삼공신 도감의궤』를 살펴보면 “교서 서사관 중 글씨를 잘 쓴 사람은 한호(韓濩, 1543~1605)인데, 가장 두드러졌다”라는 내용이 있어 호성공신 교서를 한호가 썼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조실록』 37년(1604) 9월 30일 자에는 “한호가 공신도감 교서를 쓸 때 현저히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고, 일부러 틀리게 쓰는 짓을 하여 공역(功役)을 남비(濫費)하기까지 하였다”라며 파직을 명하라는 사헌부의 요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에 따르면 호성공신 교서 제작에 한호가 참여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당대 최고 명필인 한호가 1등 공신 교서를 썼을 것이라는 짐작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물론 이 교서의 글씨는 서사관 서체여서 한호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명필 한호가 공식적인 글을 쓸 때의 서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습니다.

『보사녹훈도감의궤(保社錄勳都監儀軌)』에 담긴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재제작 관련 기록『보사녹훈도감의궤(保社錄勳都監儀軌)』에 담긴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재제작 관련 기록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좌우를 장식한 비단 부분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 좌우를 장식한 비단 부분

이 교서의 흥미로운 부분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과 똑같이 만든 부본(副本)이라는 점입니다. 보관하던 원본 교서가 병자호란 때 소실되자 이항복의 후손이 한호 후손 집에서 부본을 얻어 장황(粧潢: 원본에 비단이나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로 꾸미기)을 한 뒤 충훈부(忠勳府)에 올려 도장을 받았다는 내용을 『보사녹훈도감의궤(保社錄勳都監儀軌)』의 「일방의궤」 1681년 5월 20일 자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황 상태 또한 이 교서가 1681년에 다시 만들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교서 위아래와 좌우에 붙인 비단의 크기와 비율이 원본 호성공신 교서와 다르고 1680~1681년 제작 교서와 유사합니다. 호성공신 원본 교서 위아래에 붙인 자주색 비단의 세로 길이가 각각 0.8cm인데, 이 교서는 1.7cm입니다. 원본은 교서 장황 양 끝에 붙인 비단 너비가 1:2의 비율인데, 이 교서는 1:1로 1680~1681년에 제작된 다른 교서와 같습니다. 또한 원본의 좌우 장황 비단에는 무늬가 없는데, 이 교서는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꾸며졌습니다. 따라서 1681년 호성공신 교서 부본을 장황했다는 기록과 이 교서의 장황 상태를 살펴봤을 때 이 교서가 부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옛 물건이 현재까지 보존되려면 그 물건에 담긴 의미와 가치가 높아야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수고로움이 더해져야 합니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전란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이항복의 공적과 소실된 원본 대신 부본을 찾아 간직해온 노력의 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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