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松落日 지는 해 속에 길게 뻗은 소나무
匹馬西風 서풍 속으로 한 필의 말을 타고 간다.
從軍萬里 만리 길을 종군하였으니
磊洛英雄 헌걸찬 영웅이로다
해가 질 무렵입니다. 초립을 쓴 남자가 말을 타고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이 없이 홀로 가는 산길에는 적막감이 흐릅니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말 위의 선비는 우거진 소나무 숲을 올려다보며 유유자적한 모습입니다. 세상을 뒤로 하고 홀로 산으로 들어가는 누구일까요? 굽이치는 비탈길을 따라 관람자도 그를 따라 저 숲으로 들어갑니다. 그 곳은 어떤 세계일까요?
이 그림은 구한말 개화 지식인이자 근대기 서화가로 활동한 백련(百蓮) 지운영(池雲英, 1852~1935)의 작품입니다. 청대 건륭제(乾隆帝) 때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기윤(紀昀, 字는 曉嵐)의 시를 인용한 제발이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전합니다. 이 그림의 제발에 따르면 1917년(丁巳年) 이른 봄에 청대 화가 경강(鏡江)의 그림을 따르고, 기윤의 시를 인용해 춘고(春皐) 박영효(朴泳孝)를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근대 서화가들이 선물용으로 중국 그림을 모방한 평범한 그림으로 볼 수 있지만 화가 지운영이 살아온 인생과 그 시대, 근대기 우리 서화의 변모를 함께 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지운영은 우리나라에서 종두법을 개발한 지석영(池錫永)의 형이자, 황철(黃鐵)과 함께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배워와 고종의 초상사진을 찍은 최초의 조선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암살계획은 실패하고 본국에 압송되어 유배생활을 거쳐야 했지만 구한말 당시 그의 이런 행보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격변했던 시대의 흔적이 담겨있습니다.
1852년(철종 3년)에 태어난 그는 1870년대 말부터 김정희의 제자이자 여항문인(閭巷文人)이었던 강위(姜瑋)로부터 시문을 배웠습니다. 당시 청계천 광교부근에 살던 역관(譯官)과 의관(醫官)등 기술직 중인(中人)들이 육교시사(六橋詩社)를 맺었는데 지운영이 스승이었던 강위가 그 중심인물이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박영효를 따라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그해 말 고베에서 하라무라 토쿠베[平村德兵徫]에게서 사진술을 사사했습니다. 이후 국내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서 중앙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종로 마동에 사진국을 개설해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과 함께 1894년 3월 최초로 고종의 초상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기술직 중인 집안의 태생으로 신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개화정책의 최전선에 서고자 했던 것이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입니다. 지운영의 <장송낙일>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박영효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 그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조선 정부로부터 김옥균 암살을 사주받은 것입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김옥균을 암살하려 했던 것은 오직 조선 정부의 사주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의 실력자이자 자신의 정치적 후원을 맡았던 여흥 민씨일가와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충돌하자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향해 칼을 겨눈 것입니다. 하지만 암살시도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나고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으로 압송되어 영변(寧邊)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이후 서화에 몰두한 그는 1895년, 1904년 두 차례 중국을 여행하며 항주, 소주의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상당량의 그림을 그리고, 여기에 적지 않은 배관기와 제발을 남겼습니다.
한말 이후 우리 근대 서화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화보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풍을 선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운영의 서화 활동 역시 이 흐름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1904년 11월 2일자 황성신문에는 그가 유화를 배우러 상해로 떠났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실제 서양화를 공부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당시 상해에서는 각종 화보 및 신문, 잡지 삽화에서 서양화법을 이용한 새로운 화풍이 소개되고 있었고 이를 충분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상해 체류는 당시 그곳을 중심으로 선보였던 다양한 화풍과 상해에서 발간되기 시작한 여러 종류의 화보들을 실견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장송낙일>에서 지운영은 상해에서 1895년 발간된『시중화(詩中畵)』(卷上, 十三)에 실린 모티프와 구도를 차용했습니다. 제발에도 이 화보의 저자인 마수(馬濤, 鏡江의 호)의 그림을 따라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 작품과『시중화』에 실린 그림은 가는 소나무 그루 수를 제외하면 화보와 전체적으로 동일한 느낌을 줍니다. 세로로 기다란 화면에 길게 죽죽 뻗어 올라간 늠름한 일곱 그루의 소나무와 윗부분에만 몰린 청청한 솔잎 및 잔가지들의 치밀한 표현이 시원한 화취를 자아내고 그 밑으로 비탈진 산길로 말을 타고 올라가는 인물이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화보와는 달리 풍성한 솔잎과 가지가 표현되어 있으며 비탈진 산길로 말을 타고 올라가는 인물의 표정을 생생히 그려냈습니다. 세밀한 필선과 담백한 색채는 판화로 찍어낸 화보에서 찾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비록 화보를 모방했으나 그대로 모사하지 않고 옛 화보의 주제에 새로운 조형성과 작가의 서정을 반영하여 완성한 한국근대 수묵채색화의 대표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운영은 일제강점 이후 그가 배운 사진 기술도 포기하고 관직으로도 나아가지 않고 오직 서화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1912년에는 환갑을 기념하여 관악산 삼막사에 들어가 은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22년 첫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으나 1935년 84세로 사망할때까지 줄곧 야인으로 식민지 화단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당시 전통 화단은 일본화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고 동시에 이상범(李象範), 변관식(卞寬植) 등 새로운 세대들이 변화를 이끌던 시대였습니다. 개화기 사진이라는 신문물의 도입에 앞장서고, 신-구세력의 정치 격변에 중심에 서 있던 그가 일제 치하에서 설 자리는 많지 않았습니다. 말을 탄 채 해질 무렵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한 선비의 모습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운영의 내면을 되새기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