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계명대학교에 의해 대가야의 왕릉급 무덤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호 무덤이 발굴됩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신라의 금관과는 전혀 다른 보주형(寶珠形) 장식을 붙인 금동관입니다.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갑옷과 투구입니다. 갑옷은 작은 철판들을 이어 만든 비늘갑옷[札甲]과 긴 철판을 가로방향으로 이어 붙여 만든 판갑옷, 즉 횡장판갑옷[橫長板甲]이 각 1점씩 출토되었습니다. 또 투구도 출토되었는데 바리를 거꾸로 엎은 모양[伏鉢形]인 것과 평면형태가 살구씨[杏仁] 모양인 것 2점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어깨를 가리는 갑옷도 있습니다.
이 중 긴 철판을 가로로 이어 붙여 만든 판갑옷과 어깨갑옷 그리고 평면형태가 살구씨를 닮은 투구는 발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것으로, 가야 갑옷의 정수를 보여 주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야의 갑옷은 어디서 유래되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1 판갑옷과 투구(앞에서 본 모습), 고령 지산동 고분군 32호 무덤, 가야, 5세기,
갑옷 높이 40.6 cm, 너비 49.6 cm, 투구 높이 14.8 cm, 길이 25.7 cm, 어깨가리개 높이 13.5 cm, 길이 25.6 cm
2 판갑옷과 투구(뒤에서 본 모습)
가야사람, 철판으로 갑옷을 만들다
삼국시대 이전 사람들이 입었던 갑옷은 대개 가죽이나 나무 혹은 동물의 뼈 등 유기질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기질제 갑옷은 모두 무덤 속에서 썩어버리기 때문에 흔적이 잘 남지 않으며 이 때문에 갑옷의 구조를 알 수 없습니다.
삼국시대가 되면서 신라와 가야를 중심으로 제철기술이 아주 발달하게 되는데 그 결과 이전 유기질제의 갑옷은 철제로 바뀌게 됩니다. 철제 갑옷도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양호하게 보존된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철은 부식이 완료되면 녹의 형태로 안정화되기 때문에 원래의 구조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철녹으로 인해 박물관에서 흔히 만나는 갑옷은 짙은 갈색이나 황갈색을 띠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제작 당시의 갑옷은 눈부신 은색이었을 것입니다. 여기다가 표면에 옻칠을 하면 광택이 나는 붉은 색이나 검은 색을 띨 수 있을 것이며 새의 깃털이나 동물의 가죽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철제 갑옷은 여러 장의 조그만 철판을 엮어서 만든 비늘갑옷[札甲]과 큰 철판 20~30매를 이어서 만든 판갑옷[板甲]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비늘갑옷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북방 기마 전사들이 주로 입던 것으로 중국계 갑옷인 어린갑(魚鱗甲)과 구별되는 북방계 비한족(非漢族)이 주로 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나 부여 등 북방계 비늘갑옷의 영향으로 신라와 가야지방에서도 기원후 4세기대에 처음으로 철로 만든 갑옷이 등장합니다. 초창기 신라와 가야에서는 북방계의 비늘갑옷 뿐만 아니라 판갑옷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갑옷도 함께 나타납니다. 특히 가야지방에서 많이 발견되는 판갑옷은 가야무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비늘갑옷은 조그만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서 만들기 때문에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데 비해 판갑옷은 이보다 큰 철판들을 대개 못으로 고정하기 때문에 비늘갑옷에 비해 움직임이 불편합니다. 이 때문에 판갑옷은 말 탄 무사[騎兵]가 아닌 보병(步兵)이 주로 착용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판갑옷은 사용하는 바탕판[地板]의 모양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바탕판이 네모인 방형판갑옷[方形板甲]이 있고 긴 바탕판을 세로로 이어 만든 종장판갑옷[縱長板甲]이 있습니다. 또 긴 바탕판을 가로로 이어서 만든 횡장판갑옷[橫長板甲]과 삼각형으로 된 바탕판을 가로로 이어붙이는 삼각판갑옷[三角板甲]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탕판이 네모인 판갑옷은 출토사례가 아주 적어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450여점의 갑옷(2010년 2월 기준) 중 단 두 점 밖에 없습니다. 횡장판갑옷과 삼각판갑옷은 각 바탕판의 결합을 위해 띠모양의 긴 철판으로 갑옷의 몸통을 가로로 두르는데, 이 때문에 대금식판갑옷[帶金式板甲]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가야 판갑옷의 사용 시기를 살펴보면 4세기대에 처음으로 종장판갑옷이 나타나 부산,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유행하게 됩니다. 이후 5세기대가 되면 횡장판갑옷이 등장하며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삼각판갑옷이 모습을 보입니다. 6세기대가 되면 판갑옷이 거의 부장되지 않으므로 가야 판갑옷의 중심 시기는 4세기대와 5세기대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대가야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된 황장판갑옷
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판갑옷은 대금식판갑옷의 일종인 횡장판갑옷으로 이 무덤의 연대는 함께 출토된 유물로 보아 5세기 중엽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갑옷은 오른쪽 앞몸통[右前胴], 왼쪽 앞몸통[左前胴]과 뒷몸통[後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왼쪽 앞몸통과 뒷몸통은 못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오른쪽 앞몸통만 전체 갑옷에서 분리되는 구조인데 이것은 갑옷을 쉽게 입고 벗기 위한 것입니다.
- 판갑옷과 투구(왼쪽에서 본 모습)
- 왼쪽 옆구리
- 오른쪽 옆구리
- 실측도(오른쪽 측면)
- 실측도(정면)
- 실측도(왼쪽 측면)
먼저 앞몸통을 살펴보면 가로 방향으로 7매와 세로방향의 1매의 철판을 연결해서 갑옷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제작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설명의 편의를 위해 가장 아랫단을 1단으로, 가장 윗단을 7단으로 부르겠습니다.) ① 먼저 2단, 4단, 6단의 철판에 3단과 5단의 띠모양 철판을 약간 겹친 후 쇠못을 박아 고정시킵니다. ② 1단(도련판)을 2단에 약간 겹친 후 쇠못을 박아 고정시킵니다. ③ ‘て’모양의 7단(진동판)을 6단에 약간 겹친 후 쇠못으로 고정시킵니다. ④ 세로로 긴 철판(섶판)을 1~7단에 약간 겹친 후 쇠못으로 고정시킵니다. 이런 같은 방법으로 앞몸통을 제작했는데 1단과 7단은 날카로운 철판의 끝을 접어서 마무리하여 몸을 보호하였습니다.
뒷몸통도 앞몸통과 비슷한 방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① 먼저 2단, 4단, 6단의 철판에 3단과 5단의 띠모양 철판을 약간 겹친 후 쇠못을 박아 고정시킵니다. ② 1단(도련판)을 2단에 약간 겹친 후 쇠못을 박아 고정시킵니다. ③ ‘⌒’모양의 7단(뒷길판)을 6단에 약간 겹친 후 쇠못으로 고정시킵니다. 이런 같은 방법으로 뒷몸통을 제작했는데 1단과 7단은 날카로운 철판의 끝을 접어서 마무리하여 몸을 보호하였습니다.
위와 같이 제작된 앞몸통과 뒷몸통을 서로 연결시켰는데 왼쪽 앞몸통과 뒷몸통은 못을 박아서 단단하게 고정하였습니다. 왼쪽 옆구리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못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앞몸통은 갑옷을 입고 벗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는데, 먼저 긴 철판을 오른쪽 앞몸통 옆구리 부분에 못을 사용하여 세로방향으로 고정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이 철판과 뒷몸통을 가죽으로 연결하였는데 뒷몸통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고정을 위해 설치한 ‘T’자 모양의 철 구조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목가리개를 가진 투구와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
지산동 32호 무덤에서 출토된 이 투구는 충각부투구[衝角附胄]라 부르는 것입니다. 투구는 앞에서 보면 정면 한가운데가 돌출된 형태로 위에서 본 모양은 살구씨 모양이며 옆에서 본 모양은 반타원형입니다. 투구는 모두 8매의 철판을 못으로 연결시켜 제작되었는데 머리를 가리기 위해 5매의 철판이, 그리고 목을 가리기 위해 3매의 철판이 사용되었습니다.
투구(오른쪽에서 본 모습)
실측도(위에서 본 모습)
제작공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먼저 긴 철판 4매를 평면 타원형으로 만들어 못으로 고정합니다 ② 밥주걱 모양의 철판으로 앞서 고정한 긴 철판의 정면 아래 끝부분과 뚫려 있는 정수리부분을 가리면서 고정합니다. ③ 뒷머리를 가리기 위해 긴 철판 3매를 가죽끈으로 연결합니다. ④ 가죽끈으로 연결된 뒷머리가리개를 투구의 가장 하단에 가죽끈으로 연결합니다.
위의 공정으로 투구를 만들었는데 실제 투구의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철판에서는 가죽끈을 연결하기 위해 뚫었던 구멍이 확인되었습니다.
어깨갑옷[肩甲]은 쇄골갑옷[鎖骨甲]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어깨와 쇄골을 가리기 위한 것입니다. 전체적인 모양은 예전에 죄인들이 쓰던 칼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치형으로 휜 장방형의 얇은 철판 2매를 맞대었는데 이 철판의 가운데는 목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가공되어 있습니다. 이 어깨갑옷에는 테두리를 따라 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것은 함께 착용하는 판갑옷이나 옷과 연결하여 어깨갑옷을 고정시키기 위한 용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상으로 대가야의 왕릉급 무덤인 고령 지산동 32호에서 출토된 갑옷 일괄(투구, 판갑옷, 어깨갑옷)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기원후 5세기 중엽경인 이 갑옷의 제작은 4세기대 금관가야의 중심지인 부산, 김해에서 시작된 가야 판갑옷의 제작전통과 기술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가야에서 발생하여 성행한 판갑옷의 제작기법은 이웃 일본으로도 전해졌으며 가야무사는 이렇게 제작된 판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던 것입니다.(대금식판갑옷인 횡장판갑옷과 삼각판갑옷의 제작기술 전통은 금관가야에 있지만 실제 제작은 일본열도에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판갑옷은 가야의 뛰어난 제철기술과 철기 제작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칼이나 창처럼 철로 만든 무기와 함께 가야 무기의 우수성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철로 판든 판갑옷을 입고 용맹을 떨쳤던 가야무사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참고문헌
啓明大學校博物館, 1981, 『高靈池山洞古墳群』
송정식, 2009, 「삼국시대 판갑(板甲)의 특징과 성격」, 『학예지』16,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이현주, 2009, 「한국 고대갑주연구의 현황과 과제」, 『韓國의 古代甲冑』, 福泉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