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책(諡冊)은 왕이나 왕비의 사후에 시호(諡號)를 올릴 때 만들어 바치는 것입니다.『인종시책(仁宗諡冊)』43편은 고려의 제18대 국왕인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이 돌아가신 선왕에게 공효대왕(恭孝大王)이라는 시호와 인종(仁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뒤 장릉(長陵)에 장사지낼 때 함께 묻은 유물로서, 시책 양 끝에 새겨진 선각 인물화 2점은 12세기 고려 왕실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이며 이곳에서 함께 나온 고려청자와 함께 기품있고 귀족적인 고려시대의 미감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고려인종시책』, 전 개성출토, 고려 1146년경, 옥 위에 금니,
명문부분 41점(33.0 × 2.5 × 2.5 cm), 신상부분 2점(33.1(32.8) × 8.5 × 2.5 cm)
유물의 도굴과 입수경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관 4250번으로 등록관리하고 있는 이 시책은 1916년 9월 25일 총독부박물관에서 구로다 다쿠마[黑田太久馬]로부터 구입한 것으로 청자오이모양화병(본관4254) 등 인종 장릉에서 도굴된 여러 점의 유물과 함께 입수되었습니다. 일본육군대학교수이자 일본어학자로서 저명한 한국도자기 콜렉터이기도 했던 구로다 다쿠마가 어떻게 이들을 구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한일병합 직전 통감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던 그가 개성 왕릉 도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1908년부터 1910년대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한 개성주변의 분묘 도굴과 고려청자의 유통이 성행했다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 역시 개성의 인종 장릉에서 도굴되어 도쿄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말의 국권유린 분위기 속에서 왕릉마저도 도굴의 수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시책의 형식, 내용과 제작시기
시책은 명문이 새겨진 책엽 41개(33 × 2.5 × 2.5 cm)와 인물화가 새겨진 다소 넓은 책엽 2개(33.1(32.8) × 8.5 × 2.5 cm) 등 모두 43개의 책엽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몸통의 좌우를 꿰뚫는 구멍이 위아래로 2개씩 나 있어서, 책엽을 관통하는 두 줄의 심줄로 서로 연결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부식으로 색상이 변하였으나 원래는 대리석으로 불리는 옥석을 가공, 제작하였습니다. 시책의 이러한 크기와 구성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전하는 고려 의종 때의 옥책 형식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4엽에 새겨져 있는 호(鎬)자나 선각인물화의 금관부분을 살펴보면 부식된 표면의 아래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색채가 발견되어 본래는 옥책 위의 명문을 따라 금니를 칠한 매우 화려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책의 명문은 인종의 덕성과 품성을 설명하고, ‘서경의 난’ 진압 등 그 위업을 칭송하는 내용의 초반부(제3엽~21엽)와 왕의 서거 사유와 이를 맞이한 신하의 절통한 심정과 기도를 담은 중반부(제22엽~29엽), 그리고 공효대왕이라는 시호와 인종이라는 묘호를 올리는 종반부(제30엽~42엽)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명문에는 1146년(皇統 6年) 3월이라는 시간이 나오는데, 인종이 1146년 2월 28일(음) 보화전(保和殿)에서 죽고 3월 15일(음) 도성 남쪽 장릉에 장사지냈다는『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이 시책은 이 사이에 제작되어 함께 묻혔던 것이 분명합니다.
조명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선각인물화
제1엽과 제43엽의 선각인물화에 조심스럽게 조명을 비추어 보면 잘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인물화가 드러납니다. 갑옷을 입은 두 신장(神將)이 긴 경책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마주보게 구성되었는데, 신장상의 복식과 소지 물품, 표정과 자세 모두 대칭적 도상입니다. 정수리 쪽으로 틀어 올린 상투 위로는 문무백관이 제례를 올릴 때 착용하던 금관을 쓰고 있는데, 가슴을 덮은 흉갑(胸鉀)과 다리를 덮은 퇴갑(腿鉀),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겹쳐진 허리보호용 요갑(腰鉀)과 같은 갑옷을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갑옷 아래로는 전포에 고쟁이를 입은 뒤 가죽신을 착용한 모양이 잘 드러나 있는데, 고쟁이는 정강이 부위에서 묶고 손목싸개를 덮은 전포(戰袍)도 넓은 소매부분을 질근 동여매어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으며, 흉갑과 요갑 위에도 다시 허리띠[戰帶]를 묶어주었습니다. 한편 마파람에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두 줄의 날개형 화염두광과, 양 어깨를 휘감아 가슴 앞에 늘어뜨려졌다가 요대에서 한번 묶인 뒤, 다시 양 다리 사이를 지나 뒤쪽에서 세 가닥으로 휘날리고 있는 천의(天衣)는 이 인물이 지상세계의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초자연적 신장상임을 표현합니다.
『고려인종시책』(선각인물화 복원도)
선각인물화는 누구를 그린 것일까
이렇게 경책이나 석관, 출입문의 좌우측에 신상을 배치하여 내용물을 지킨다고 하는 개념은 이미 당나라나 신라의 불교미술에서 유행했던 형식입니다. 석굴암의 인왕상이나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 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모습으로 불경의 앞뒤에 그려진 신상을 불법을 수호하는 천상의 존재라는 뜻에서 호법선신(護法善神) 혹은 호법정신(護法淨神)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인종시책』의 선각인물화는 불교미술의 호법신장과 비교할 때, 투구대신 금관을 쓰고 있는 점이라든지 금강저 대신 도끼를 들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언뜻 불교미술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려시대의 호법선신과 일치하지는 않는 이 도상은 사실 송나라 도교미술과 관련이 깊습니다. 무종원(武宗元)의 <조원선장도(朝元仙仗圖)>나 양해(梁楷)의 <황정경신상도(黃庭經神像圖)>에는 전포에 갑옷을 입고 금관을 쓴 일종의 도교적 호위신장이 등장하는데 이와 흡사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도교적 호위신장의 개념이 당시 고려 왕실에 수용되고 있었음은 인종 즉위년(1123)에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단편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금월(金鉞)은 주부(柱斧)와 비슷한데, 대략 장대의 끝에 난새[鸞鳥]를 한 마리 세워놓은 형상과 같아서 갈적에는 흔들리면서 날아오르는 형상을 한다. 왕이 행차할 때면 용호친위군장(龍虎親衛軍將) 1명이 이를 잡고 뒤에서 따른다(金鉞之制 略同柱斧 於竿之杪 立一翔鸞 行則動搖 有鶱騰之勢 王行則龍虎親衛軍將一人執之 從於後).
『고려도경』의 다른 곳에서도 용호좌우친위군장 여러 명이 깃털부채와 금월을 잡고 왕을 시종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국왕의 시호를 올리는 시책의 성격을 감안할 때, 시책을 호위하는 신장이 도교신장과 국왕 친위대의 주요의장물인 금월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인종시책』의 인물은 고려의 용호친위군장과 마찬가지로 도교적 호위신장 개념의 영향 하에서 국왕과 왕실의 위엄을 표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선각인물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선각화는 양식에 있어서 고려적인 특징이 눈에 띕니다. 필선은 굵고 가는 변화가 크고 한편으로 치우쳐 휘날리는 전포와 화염광배에는 운동감이 충만합니다. 이러한 비대칭적 역동성과 선묘의 변화는 쇠꼬챙이로 그린 듯 일정한 두께의 필선으로 좌우대칭형의 장면을 묘사하는 11세기 초까지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이전의 통일신라적 미술 전통에서 이탈된 새로운 요소로서 이후 14세기 전반의 왕실발원 사경화(寫經畵)까지 지속되는 고려전통의 시원을 형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중국에서 ‘오대당풍(吳帶當風: 오도자가 그린 옷고름처럼 마파람에 휘날리는 모습)’이라고 특징짓는 양식으로서 오도자(吳道子)를 계승한 북송대 무종원, 고문진(高文進) 파의 원체도석화(院體道釋畵) 양식과 연관됩니다.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오도자 전칭의 <삼관도(三官圖)> 족자(12세기 전반, 남송)가 그러한 예입니다. 도교의 천관(天官), 지관(地官), 수관(水官)을 그린 3폭의 <삼관도> 족자 중 한 폭을 봅시다. 여기에서 천관의 좌우측 호위신장은 전포에 갑옷과 금관을 착용한 채 금월을 마주잡고 서 있어서『인종시책』의 호위신장과 흡사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변화무쌍한 필선과 마파람에 펄럭이는 전포자락의 모습은 양자에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분위기까지 부여합니다. 양자의 유사성은 12세기 전반 송나라 도교미술과 원체화풍이 고려에 적극 수용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필자미상, <천관도(天官圖)> (부분), 남송 12세기 전반, 비단위에 금채,
125.5 × 55.9 cm, 미국 보스톤미술관 소장
선각인물화는 누가 그린 것일까
『고려인종시책』(선각인물화세부)
이 선각화의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비례와 자연스러운 자세 및 통일감 있는 동세표현은 시책에 귀족적인 우아함을 더해주며, 존상의 또렷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이 옥책에 거부할 수 없는 근엄한 분위기를 부여해 줍니다. 이러한 품격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허재석관(許載石棺)(1144년)의 <선각 십이지신상> 의 소박한 분위기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러한 비교는『인종시책』의 선각화를 그린 화가가 무명의 장인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왕실화가가 아닌가 추측케 합니다. 더구나, 옥책이 제작되었던 1146년경 이미 고려왕실에는 화국(畵局)이라는 기구가 설치되어 왕실과 국가의 미술품 제작을 전담하고 있었던 만큼, 왕실의 중대 예식에 바쳐질『인종시책』의 밑그림 역시 당연히 화국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화국에서 누가 이를 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인종시책』이 제작된 1146년은 고려 최고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이녕(李寧)이 화국에서 활동하였던 시기로서 그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녕은 <예성강도(禮成江圖)> 나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와 같은 실경에 기초한 산수화로 유명한 화가인 만큼,『인종시책』의 선각 인물화를 직접 그린 인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그러나 그가 의종(毅宗, 재위 1146~1170) 때 궁중의 그림을 주도하였다는 기록은 1146년의『인종시책』이 적어도 이녕의 감독하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인종시책』선각 인물화는 이녕이 지도한 화국에서 활동하던 최상급의 인물화가가 그린 것으로, 현존 유일의 고려중기 도교 인물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당시 동북아시아의 유사한 도교회화 중에서 제작연도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14세기 전반의 왕실발원 사경화까지 지속되는 고려전통의 시원을 형성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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