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자(整理字)는 정조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간행하기 위해 주조한 활자입니다. 1795년에 주조를 시작하여 다음 해인 1796년에 주조가 끝난 이 활자는 대자 16만자, 소자 14만자로 총 30만자에 달하였습니다. 이 활자에는 출판과 활자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정조의 활자에 대한 생각과 의지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주자소에 보관되어 있던 이 활자는 1857년(철종 8년) 궁중 화재 때 상당 부분이 불에 타, 1859년에 12만 8천자 정도를 추가로 제작하였는데 이를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라고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두 종류의 정리자 21만여자가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정리자, 정리의궤를 간행한 활자
‘정리(整理)’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국왕이 바깥으로 행차할 때 호조에서 국왕이 머물 행궁을 정돈하고 수리해서 새롭게 만드는 일을 의미하며, 이를 관장하는 관리를 정리사(整理使)라고 불렀습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긴 후 그곳에 여러 차례 원행(園幸)을 하였고 그때마다 정리사를 두어 행차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1795년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탄생 6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에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화성 행차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리고 1794년 12월에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행사로 인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행사를 전담하는 관서를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조는 이 행사를 위해 경상 비용을 축내지 않으려고 별도로 환곡(還穀)을 이용한 이자 수입으로 10만 냥의 경비를 마련하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리소는 을묘년의 화성 원행과 관련된 시설정비, 행사진행, 교통대책, 물자 및 경비 조달, 회계처리, 기록보존 등 행사와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였습니다. 행사 후 남은 2만 냥은 팔도에 각기 1,000∼3,000냥씩 분배해 쌀로 바꾸어 환곡의 자본으로 삼았는데 그 이름도 ‘정리곡(整理穀)’이라 하였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행사와 관련된 여러 사항을 기록한 의궤 역시 『원행을묘정리의궤』라 이름하였고, 이 의궤를 간행하기 위해 정조의 지휘 아래 제작된 활자 이름 역시 ‘정리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정리자대자(整理字大字), 1796년, 동(銅), 1.3 × 1.1 × 0.8 cm 현재 남아 있는 정리자는 정조 때 주조한 정리자와 철종 때 다시 주조한 정리자가 섞여 있으며, 사실상 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정리자소자(整理字小字), 1796년, 동(銅), 0.7 × 0.7 × 0.8 cm
정리자,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활자
조선의 왕들은 활자, 특히 금속활자의 제작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태종이 1403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주조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은 왕의 주도하에 수 십 차례에 걸쳐 활자를 제작하였습니다. 특히 태종에 이어 세종은 활자 개량에 힘써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와 같이 계미자보다 개량된 활자를 만드는 일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금속활자 제작이라는 면에서 조선 전기 세종에 필적할 만한 조선 후기의 왕이 정조였습니다. 아니 그의 활자에 대한 관심과 제작열은 세종의 그것을 넘어 가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세손 시절인 1772년에 영조에게 건의하여 임진자(壬辰字) 15만자를 제작하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 1776년에 다시 임진자와 똑같은 모양으로 정유자(丁酉字) 15만자를 제작하여 내각(內閣)에 보관하였습니다. 연달아 정조는 1782년에 한구자(韓構字) 8만여 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792년에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32만자, 1796년에는 생생자를 바탕으로 정리자 대자 16만자, 소자 14만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활자를 모두 합하면 100만자가 넘습니다. 한 국왕의 통치기간에 이렇게 많은 활자를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단순히 실용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금속활자는 문원(文苑)의 보배라 하여 민간에서 함부로 만들고 소장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만들기가 어렵고 재료값도 많이 들어 민간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정조가 그렇게 많은 활자를 만들고 또 관리하는 데 특별히 신경을 썼던 것은 이런 권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정조가 만든 여러 활자 가운데서도 정리자는 활자의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자는 정조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이를 과시하기 위해 기획한 을묘원행을 기념하는 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름마저도 정리자로 불렀습니다. 또한 그 이전의 의궤는 모두 필사본이었는데, 이 때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간행한 의궤가 나온 것입니다. 금속활자로 간행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책을 널리 보급하겠다는 뜻, 왕실의 위엄을 널리 알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2『화성성역의궤』, 1801년, 34.2 × 21.9 cm
이후 정리자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의 간행에 사용되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널리 알리는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정리자가 주조된 이후에도 고종 이전에는 과거합격자를 기록한 『사마방목(司馬榜目)』을 대부분 임진자로 간행하였는데, 화성 행차를 행한 을묘년 식년시의 방목만은 유독 정리자로 간행하였습니다. 이 역시 화성 행차의 의미를 부각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출간된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정리자로 간행한 것은 아마도 이 활자가 정조가 가장 중시하고 분신처럼 여겼던 활자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리자, 정조의 활자개량 노력의 결과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는 오늘날과 달라 활자 제작과 인쇄 공정이 번거롭고 인력과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습니다. 서적과 출판, 활자 등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정조는 보다 효율적인 활자 제작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정리자는 정조의 그런 고민의 결과로, 종전의 활자에 비해 보다 효율적인 인쇄가 가능한 활자였습니다. 실록(實錄)의 정리자 주조 관련 기록에서 이전 활자의 사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전후로 주조한 활자의 몸체가 일정하지 않아 인쇄하려면 젖은 종이를 써서 고르게 붙이고 한 판을 찍을 때마다 별도로 몇 사람을 세워서 붉은 먹으로 활판의 형세에 따라 교정을 하게 하는데도 오히려 비뚤어지는 염려가 있었으며 걸핏하면 시일이 걸리곤 하였다. 그래서 인쇄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이 누차 이를 말하였다.
당시 사용되고 있던 임진자, 한구자 등은 활자의 몸체가 일정하지 않아 조판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실제 현재 남아 있는 이 활자들을 보면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높낮이도 한결같지 않아 조판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그 결과 정리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정조는 완성된 정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생생자와 정리자는 고르고 반듯하며 새겨 주조한 것이 정교하여, 위부인자(衛夫人字:여기서는 임진자를 뜻함)나 한구자 등과 비교하면 젖은 종이를 고르게 붙여야 한다든가 글자가 삐뚤거나 흔들리게 인쇄될 근심이 없다. 인쇄가 간편하고 빠르며 비용과 수고를 줄일 수 있어서 중국의 취진판식(聚珍板式)보다 도리어 더 나으니, 실로 책을 간행한 이래로 드러나지 않았던 비법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다만 그 글자체가 너무 모나서 원후(圓厚)한 뜻을 자못 잃은 것이 흠이 될 뿐이다.
실제 정리자의 모습을 보면, 이전에 만든 활자에 비해 모양과 높낮이가 일정합니다. 활자의 모양이 일정하면 조판을 할 때 활자의 높낮이를 맞추는 데 필요한 인력과 시간이 절약되므로 자연히 인쇄 속도를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정리자 대자 측면
정리자는 중국의 ‘사고전서 취진판식(四庫全書 聚珍板式)’을 모방하여 만들었습니다. 사고전서 취진판은 중국 청나라 건륭제 때 사고전서를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활자를 말합니다. 정조는 활자를 개량하기 위해 중국의 활자 제작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사고전서를 간행한 목활자의 제작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정조는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의 목활자를 구입하여 오기도 하였습니다. 이 활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사용 목적이나 인쇄 현황 등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정조가 활자를 개량하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조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정리자에 만족하여 정리자가 사고전서 취진판 활자보다 도리어 낫다고 자부하였습니다. 다만 정조는 이 활자의 글자체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정리자의 글자체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의 글자체를 모방한 것입니다. 이 활자는 종전의 붓글씨로 쓴 듯 정교하고 섬세한 임진자, 한구자와 비교할 때 모나고 딱딱합니다. 이런 글씨를 인서체(印書體)라고 하는데 비록 모양은 덜 정교하지만 붓글씨로 쓴 듯한 필서체(筆書體)보다 글자를 새기는 공력이 훨씬 덜 들어, 그만큼 활자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인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정조는 이런 모난 글씨체를 싫어하였지만, 사실상 인쇄했을 때의 가독성(可讀性)은 이전 활자에 비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정리자는 고종 연간에 간행된 『지방제도개정(地方制度改正)』, 『공법회통(公法回通)』, 『한청통상조약(韓淸通商條約)』 등 근대적 서적을 간행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