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여속도첩 - 번화한 수도 한양을 들여다본다 : 전인지

번화한 수도 한양을 들여다본다
신윤복과《여속도첩(女俗圖帖)》

《여속도첩(女俗圖帖)》은 혜원(慧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이후)의 대표적인 풍속화첩 중의 하나입니다. 이 화첩은 1908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으며 모두 6면입니다. 이 중 3면은 기녀(妓女)를 그린 것이고, 나머지 3면은 조선시대 일반 부녀자를 그린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연당의 여인>을 비롯한 몇 점의 그림이 널리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화첩은 조선후기 풍속화 중 당시 번화한 수도 한양의 유흥 풍속을 보여주는 도시풍속도로서, 조선후기 기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문 그림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신윤복의 경우, 남아있는 작품이 몹시 희귀하기 때문에 화가로서 종합적인 평가가 어렵다는 점은 있지만, 풍속화 부문만은 당대의 대표적 화원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이후)와 쌍벽으로 칭해집니다. 그러나 명성에 비하면 그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빈약한데, ‘고령(高靈) 사람으로서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 1726~?)의 아들,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를 지냈고 풍속화를 잘 그렸다.’ 라는 기록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신한평은 영·정조·순조 초년까지 화원으로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지며, 초상화와 풍속화에 능했다고 합니다. 신윤복이 풍속화를 잘 그렸다는 것은 아버지인 신한평에게서 전해진 재주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반에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간송미술관 소장의 <미인도>를 보아도 인물화에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진. 1 신윤복, <연당의 여인>, 《여속도첩》제1면 2 신윤복, <미인도>

1 신윤복, <연당의 여인>, 《여속도첩》제1면, 조선, 비단에 채색, 31.4 × 29.6 cm
2 신윤복, <미인도>, 조선, 비단에 채색, 114.0 × 45.5 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문화』62호, 2002년, 도93.
기녀의 일상을 엿보다. <연당의 여인>

《여속도첩(女俗圖帖)》의 첫째 면인 <연당의 여인>은 연당(蓮塘)앞에 앉아있는 기녀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커다란 가체(加髢)에 몸에 꼭 붙는 짧은 저고리, 풍성한 치마를 입어, 당시 기녀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더욱이 악기인 생황을 들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것이 일반 사가의 여인이라기보다는 기녀라고 생각됩니다. 건물의 일부만 표현하고 중앙에 인물을 화면 하단엔 탐스럽게 자란 수련을 그린 것이 매우 정취가 있거니와, 적조한 분위기를 잘 전달합니다. 한가한 시간인지 담뱃대를 들고 생황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이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기녀의 표정에서 쓸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앉은 모습이 전성기의 기녀로는 보이지 않으며, 주로 야간에 활동하는 기녀가 휴식하지 않고 한낮에 나와 앉아 있으니 더욱 그렇게 추측하게 됩니다. 그림의 시점이 커다란 연잎과 연꽃들 사이로 조금 떨어져서 이 기녀를 관찰하는 위치에서 그려졌음을 고려할 때, 작가는 일종의 관찰자적 입장에서 기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필자의 느낌이긴 하지만 기녀들을 향한 혜원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연민이 어린 듯합니다.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전신첩》30면이 신윤복의 대표작으로 칭해지지만, <연당의 여인>만큼 작가의 마음을 담아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분홍빛으로 곱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꽃과 쓸쓸한 기녀의 표정이 대조를 이루면서, 보는 이에게 잠시 조선시대 기녀의 일상을 엿본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특히 기녀가 앉아있는 장소가 어떤 집의 연못가인데, 주인공이 기녀인 만큼 기방(妓房)일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조선후기의 기방은 기녀들의 영업공간으로서 그곳에서 기녀는 고객에게 각종 기예와 향락을 제공하였습니다.

사진. 신윤복, <연당의 여인>부분 신윤복, <연당의 여인>부분

사진. 신윤복, <청루소일>, 《혜원전신첩》 신윤복, <청루소일>, 《혜원전신첩》, 조선, 종이에 채색,
28.2×35.6cm,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문화』62호, 2002년, 도 96.

조선시대 기녀와 기방문화

원래 조선시대 기녀(妓女), 기생(妓生)은 조선초기부터 관청에 속해있는 관노비로서 천민신분이었습니다. 궁중행사 등 공식적인 행사에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여악(女樂), 내의원·혜민서 등에서 의술을 시행하는 의녀(醫女), 여성 관련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다모(茶母), 궁중의 바느질을 담당하는 상의원 소속 침선비(針線婢)등도 이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기녀의 주요임무는 각종 행사에서 가무를 담당하는 일이었던 만큼 국가소속 전문 예술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후기가 되면 점차 궁중행사에서 여악(女樂)을 동원하여 가무를 시연하는 일이 줄어들고, 꼭 필요한 경우에는 지방의 외방관기를 부른 다음, 공연 후에 돌려보내는 등 관기로서의 역할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조선후기는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이 이루어져 서울이 상업도시로 변모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간계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은 도시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여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울의 향락적인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여가생활의 발전은 새로운 기악(妓樂)의 수요를 창출하였고 국가에서 주어진 역할이 축소된 기녀는 적극적으로 민간의 수요에 응하게 되어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서울의 신흥 중간계층은 지방에서 올라온 기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면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기방을 열어 도시민에게 유흥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기녀는 천민이어서 별도로 나라에서 주는 녹(綠)이 없이, 생계수단을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했으므로, 민간에서의 유흥수요에 더욱 적극적으로 부응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중 한 면인 <청루소일>은 기방의 한때를 묘사한 그림인데, 생황을 들고 마루에 앉아 손님과 상대하는 기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어딘가에서 막 들어오는 기녀가 그려져 있어 당대 기방의 면모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합니다.

당대 도시유행의 선도자, 기녀 <전모를 쓴 여인>

<전모를 쓴 여인>은 《여속도첩(女俗圖帖)》의 두 번째 면 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기녀의 나들이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의 기녀는 기업(妓業)활동을 위하여 별도로 화려한 복장을 갖춰야 했으므로, 자연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걸었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습니다. 1844∼1961년 창작·필사·간행되었던 장편 가사작품인 『한양가』에 의하면 “각색 기생 들어온다, 얼음같이 누른 전모(氈帽) 자지(紫芝) 갑사 끈을 달고, 모단(毛緞) 삼승(三升) 가리마를 앞을 덮어 숙여 쓰고 산호잠 밀화비녀 은비녀 금봉채(金鳳叉)를 이리 꽂고 저리 꽂고 도리 불수 모초단(毛綃緞)을 웃저고리 지어 입고, 양색단(兩色緞) 속저고리 갖은 패물 꿰어 차고...” 라고 하여 사치스러운 복장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전모라는 커다란 모자가 눈에 띕니다. 이 전모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외출용으로 사용하던 쓰개로서 멋을 좋아하는 기녀들이 나들이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한양가』에서처럼 이 그림의 기녀도 검은 가리마를 먼저 쓰고 그 위에 커다란 전모를 써 끈을 목 밑에 동여매었으며, 또한 녹색의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둘렀습니다. 앞서 살펴본 <청루소일>의 기녀도 녹의(綠衣)에 남색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유사하여 당시 기녀의 복장이 대부분 이러했다고 여겨집니다. 주인공인 여성은 둥글고 흰 얼굴에 가느다란 눈매, 붉고 작은 입술을 하고 있는데, 당대 미인의 기준 또한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무배경에 기녀의 모습만을 부각시켜 그렸으며, 그림 우측 상단에 “옛 사람이 찾아내지 못했으니 기이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前人未發 可謂奇)”라고 대담하게 써서 이 시대에 금기시되었던 기녀의 그림을 멋지게 그려낸 작가 스스로의 자신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 1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여속도첩》제2면 2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여속도첩》제발(題跋)부분

1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여속도첩》제2면, 조선, 비단에 채색, 31.4 × 29.6 cm
2 신윤복, <전모를 쓴 여인>, 《여속도첩》제발(題跋)부분
《여속도첩(女俗圖帖)》의 의의

조선시대 풍속화는 조선초기부터 유교적 민본주의에 의한 ‘무일(無逸)’사상에 입각하여 백성들이 노동을 하는 괴로움을 군주가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궁중세화(歲畵)로 제작된 무일도(無逸圖)와 빈풍도(豳風圖), 농가십이월도와 같은 경직풍속도 계열의 감계(鑑戒)적 효용물로 제작되었고, 신도읍지 한양의 위용과 번화한 모습을 그린 도시풍속도류와 왕실 및 관아의 각종 행사장면을 담은 관아풍속도 계열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여속도첩》은 도시풍속도 계열로서 조선후기 신도읍지 한양의 발달한 유흥문화를 풍속화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전모를 쓴 여인>에서는 조선시대 대표적 예능인으로서 당대 유행을 선도했던 화려한 기녀의 모습을, <연당의 여인>에서는 천민신분으로서 생업을 위해 자신의 기예를 팔 수 밖에 없었던 기녀들의 삶의 애환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가 서민의 생업장면과 활기를 풍속화로 생생하게 전하여 주었다면, 인간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성(性)과 유흥(遊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해준 사람이 바로 신윤복입니다. 사람이 일만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성과 유흥도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그런 만큼 그의 풍속화는 매우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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