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솔바람 부는 절터에서 나투신 보살상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강릉 한송사 터 보살상(옛 지정번호 국보 제124호)은 강릉 남항진동 한송사 터에서 1912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반환되어 현재 국립춘천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평창 오대산 월정사 보살상, 강릉 신복사 터 보살상 등과 더불어 고려 초 강원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으로, 높직한 원통형 보관(寶冠)을 쓴 것이 특징입니다.
한송사-신라 화랑의 자취가 어린 명승지
한송사는 강릉시 강동면 남항진동(하시동리)에 있던 절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공군비행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바닷가 소나무 숲속에 둘러싸인 한송사 옛터는 예로부터 인근의 경포대, 한송정과 더불어 선인들의 금강산 유람과 연이은 관동지방 탐승 여행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던 곳이어서 이곳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의 시문에 즐겨 등장하곤 합니다.
이 지역이 옛 분들의 탐승 대상이 된 것은 뛰어난 풍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신라 사선(四仙)이라 불리는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랑(安詳郞)과 그 무리 3천 명이 노닐던 곳으로 일찍부터 신성시되었기 때문입니다. 1326년(충숙왕 13) 고려의 대문호인 안축(安軸, 1282~1348)이 쓴 「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를 비롯하여 다수의 글에 신라의 네 신선에 대한 전설이 전합니다.
사선은 신라 효소왕(692~702 재위) 때의 화랑들입니다. 당시 화랑 중 그 문도들이 가장 번창하여 비(碑)를 세우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정과 삼일포, 한송정에는 사선과 관련된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관동팔경은 화랑의 수련장이자 순례길이 되었던 경주에서 안변까지의 동해안 명승지가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관동의 팔경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듯이 첫 화랑인 설원랑 기념비가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세워진 것은 경포대와 한송정으로 대표되는 이 일대가 화랑의 순례길 중 가장 중요한 곳이었음을 말합니다. 경포대와 한송정을 비롯하여 인근의 한송사는 고려시대 들어 사선의 유적지를 유람하려는 고관대작을 비롯하여 시인묵객들로 붐비곤 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 문인들이 이곳을 탐승하고 남긴 시와 기문(記文)이 적지 않게 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고려 명종대의 시인 김극기(金克己, 1148경~1209경)가 노래한 한송사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솔[松]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使臣, 원문은 使華)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출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불우조(佛宇條)」)
고개 위 문수당은, 채색 들보가 공중에 솟았네.
조수는 묘한 소리를 울리고, 산 달은 자애 어린 빛이 흐른다.
구름은 돌다락[石樓] 가에 불어 나오고, 물은 소나무 길가를 씻는다.
앉아서 보니 숲 너머 새가 꽃을 머금고 날아오네.
(출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제영조(題詠條)」)
옛 분들의 기록, “땅속에서 솟은 문수와 보현”
옛 기록에 한송사는 문수당(文殊堂), 문수대(文殊臺), 문수사(文殊寺)로 불렸습니다. 고려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인 『가정문집』권5의 「동유기」에는 한송사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비 때문에 하루를 (경포대에서) 머물다가 강성(江城)으로 나가 문수당(文殊堂)을 관람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의 두 석상이 여기 땅속에서 위로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 동쪽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었으나 호종단(胡宗旦)에 의해 물속에 가라앉았고 오직 귀부(龜趺)만 남아 있었다. 한송정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이 정자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인데,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을 사람들이 싫어하여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소나무도 들불에 연소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와 석지(石池), 두 개의 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10세기, 백대리석, 높이 56 cm, 보물,
강릉 오죽헌ㆍ박물관
강릉 오죽헌ㆍ박물관에는 또 한 구의 한송사 보살상이 있는데, 이 두 구의 한송사 보살상은 위의 기록에서 전하는 문수와 보현보살상으로 추정됩니다. 오죽헌ㆍ박물관 소장 보살상은 안타깝게도 머리와 팔 한쪽이 없으나 가부좌를 풀고 한쪽 다리를 밖으로 편안하게 둔 앉은 모양이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보살상과 서로 대칭을 이루어 이 두 보살상이 삼존불의 좌우 협시보살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협시보살상이 모시던 본존불은 누구였을까요?
현재 백사장으로 뒤덮인 남항진동의 한송사 옛터에는 다행스럽게도 두 보살상을 받치던 대좌가 남아 있습니다. 몹시 손상된 모습이긴 하지만 사자와 코끼리 모습을 한 화강암 대좌인 것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법화경』과 『화엄경』, 『다라니집경』 등에 따르면 사자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앉는 대좌이며, 코끼리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현보살이 앉는 대좌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자와 코끼리 모양 대좌는 경주 불국사에도 남아 있으며, 9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성주 법수사 석조비로자나삼존불에도 사자와 코끼리 대좌가 있습니다. 문수와 보현보살상이 협시할 수 있는 불상은 석가와 비로자나(Vairocāna) 불상인데, 당시 화엄종과 선종에서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밀교의 영향으로 9세기 중반부터 마하비로자나 불상을 대거 조성하기 시작하는 점 등을 감안하여 한송사 보살상의 본존은 비로자나 불상으로 추정합니다.
한송사 터에 남아 있는 사자와 코끼리 대좌
법수사 터 석조비로자나삼존불 대좌(사자와 코끼리 대좌),
통일신라 9세기, 경북대학교박물관
강원도로 옮겨진 오대산 문수신앙
보살상은 왕자시절의 석가모니 모습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기에 관을 쓰고 화려한 영락으로 장식합니다. 한송사 보살상에서 보이는 높은 원통형 보관은 고려 초 강릉 인근의 보살상에서 보이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원통고관형(圓筒高冠形) 보살상은 인도의 밀교 도상이 수용되면서 중국에 등장하는데, 밀교가 융성했던 수도 장안과 장안의 밀교 미술이 이식된 산서성 오대산 지역을 중심으로 퍼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관형 보살상은 이후 오대와 송나라 조각으로 이어지고, 요나라 조각에서 더욱 유행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0세기 경 강원도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월정사, 신복사, 한송사(문수사) 보살상에서 원통형 보관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80 cm, 보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월정사
신복사 터 석조보살좌상, 고려, 높이 121 cm, 보물,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화엄경』에 따르면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성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자장(慈藏)법사에 의해 오대산 문수신앙이 중국에서 유입되는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문수신앙은 주로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영험을 베푸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삼국유사』의 「대산 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서는 신문왕의 아들 보천과 효명태자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 매일 차를 달여 공양하며 수도생활을 하다가 효명태자가 왕으로 추대되어 효소왕으로 등극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앞서 신라 사선들의 무리는 효소왕의 등극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오대산 지역의 지지세력이자, 이 지역에 문수신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통일신라 조각 전통과 지역 양식을 반영한 우아하고 귀족적인 보살상
지혜와 자비행이 구현된 입가의 미소와 너그러운 얼굴, 거스를 것 없는 둥근 어깨와 풍만한 팔다리, 단정하게 앉아 유마거사와 불이(不二)의 법문을 변설(辯舌)하는 문수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한송사 보살상의 부드럽고 세련된 조각 수법은 통일신라 석굴암 감실상과 비교됩니다. 석굴암 감실상에서 보이는 느긋한 자세, 둥근 어깨와 유연한 신체 표현, 갸름하면서도 풍만한 얼굴 등의 통일신라 조각 전통은 시대를 넘어 한송사 보살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굴암 감실상, 통일신라 751년, 높이 106 cm, 국보, 경북 경주시
석굴암 감실상, 통일신라 751년, 높이 106 cm, 국보, 경북 경주시
강릉과 오대산 지역은 예로부터 명주라 불렸는데,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으로 은거하여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원성왕(785~798 재위)은 김주원에게 명주, 양양, 삼척, 울진, 평해 등을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명주군왕으로 봉해 다스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김주원의 직계후손들은 중앙 정계에도 진출하였는데, 이러한 명주지방과 왕도인 경주와의 연관성은 통일신라 조각 양식이 한송사 보살상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송사 보살상은 높은 원통형 보관이나, 턱에 살이 오른 모습 등에서 월정사나 신복사 보살상처럼 이 지역 보살상의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오대산 문수신앙과 선종의 사굴산파 융성에 따른 독특한 명주지방 불교문화가 반영된 모습일 것입니다. 당시 명주지방은 김주원 세력의 막강한 후원 아래 경주 못지않은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을 굴산사 주지로 모셔와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게 한 것도 강릉 김씨 호족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범일의 문하에서는 낭원대사 개청(開淸, 834~930)·낭공대사 행적(行寂, 832~916) 등을 비롯한 십성(十聖)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말 고려 초 이 지역에서는 굴산사를 중심으로 범일이 처음 세운 신복사를 비롯하여, 범일의 문인(門人)이었던 신의두타(信義頭陀) 스님이 머물렀던 월정사, 개청이 주지로 있었던 보현사(보현산사 지장선원) 등이 융성하였습니다. 한송사(문수사)는 9세기 말 10세기 초 보현사와 나란히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송사 역시 이 시기 강릉 김씨 호족의 후원을 받은 사굴산파의 영향 아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