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년 전, 길고 추었던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토기는 변화된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도구의 하나이지만, 구석기시대의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자원의 활용, 음식의 조리, 정착생활 등 인류 생활의 큰 변화를 이끄는 핵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 있어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신석기시대를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입니다.
토기의 출현과 의미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우연한 기회에 점토가 불에 구워지면 단단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빚고 불에 구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죽이나 식물의 줄기로 만든 것을 이용해 음식을 저장하고 운반하였습니다. 하지만 토기를 만들게 되면서 액체를 저장하거나 불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식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즉, 이전에는 날로 먹거나 불에 구워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토기를 이용하여 다양한 조리가 가능해졌고 날로 먹게 되면 유해하거나 섭취가 어려웠던 식물자원도 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식량자원이 보다 다양해 질 수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사냥 대신 주변의 다양한 식물자원을 식량으로 활용하면서 안정적인 식생활의 유지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한곳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는 흔히 빗살무늬토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토기는 무늬가 없는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것입니다. 제주도 고산리에서 확인된 이 토기는 토기를 빚을 때 풀과 같은 유기물을 첨가하여 만들었는데, 구석기시대 석기제작기술을 보여주는 돌 화살촉과 함께 확인되며 기원전 8,0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덧무늬토기, 누른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고산리식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토기에 앞서 만들어진 또 다른 토기들로는 덧무늬토기와 누른무늬토기가 있습니다. 덧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으로 만든 띠를 붙여 다양한 장식을 한 토기로 부산, 통영,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의 양양과 고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기원전 6000년경에서 기원전 3500년경까지 사용되었던 이 토기는 ‘고산리식 토기’가 확인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된 토기로 알려져 왔습니다. 누른무늬토기는 그릇의 아가리 주변을 무늬 새기개로 누르거나 찔러서 무늬를 장식한 것으로, 덧무늬토기와 비슷한 시기와 분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뾰족한 포탄모양의 형태를 하고 토기 겉면은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입니다. 기원전 4,500년경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뒤, 기원전 3,500년경 한반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전의 덧무늬토기나 누른무늬토기에 비해 넓은 분포권을 가지고 오랫동안 사용된 대표적인 토기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빗살무늬토기문화라 부르기도 합니다.
빗살무늬토기의 문양과 지역적 차이
한반도 전역에서 확인되는 빗살무늬토기는 그릇의 형태와 장식된 문양에 따라 중서부지역, 남부지역, 동북지역, 서부지역 등 네 개의 지역군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한강과 대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서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뾰족한 바닥과 곧추선 아가리를 하고 있는 길쭉한 포탄모양이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토기의 겉면을 아가리-몸통-바닥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에 다른 문양을 채운 토기를 만들었지만, 점차 바닥이나 몸통의 문양을 생략하거나 같은 문양만으로 장식하는 경향으로 변화합니다.
낙동강과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역에 비해 아가리는 넓고 높이가 낮으며, 바닥도 둥근 형태에 가까운 반란형(半卵形)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양도 처음에는 중서부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릇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기 다른 문양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였지만, 점차 아가리를 중심으로 세모나 마름모꼴의 집선문(集線文)이나 문살무늬[格子文]로 채우고 몸통 아래에는 문양은 생략됩니다. 중서부지역과 유사하지만, 그릇의 형태는 아가리가 넓고 문양은 깊고 굵은 선을 이용하며, 이전의 덧무늬토기에서 많이 보이던 집선문이 많이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편 두만강을 중심으로 동해안 중부일대를 포함하는 동북지역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다른 지역에 비해 바닥이 납작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그릇의 종류나 문양의 구성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적으로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기 겉면을 가득 채웠던 규칙적인 기하학적 문양이 간략화하고 불규칙적으로 바뀌면서 기원전 1,500년경 청동기시대의 무늬가 없는 민무늬토기로 점차 바뀌게 됩니다.
토기로 보는 신석기인들의 생활양식과 미적양식
서울 강동구에 위치한 암사동 유적은 부산 동삼동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알려진 1925년 호우에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유물이 노출되어 알려진 후, 196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을 비롯한 대학연합발굴단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연차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마을유적입니다. 조사결과, 많은 집터가 확인되었고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규칙성과 정형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토기 전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무늬를 베푼 정형적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 유적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완성도 높은 토기입니다.
사진의 이 빗살무늬토기는 서울 암사동 유적 5호 집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5호 집터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4,610±200 B.P.로 밝혀졌습니다. 이 토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선사, 고고관 도입부에 전시되어 있을 만큼,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완성도 높은 토기라 할 수 있습니다. 토기의 형태는 간결한 V자형을 하고 있으며 높이는 38.1cm, 입지름은 26.6cm입니다. 아가리 부분에는 짧은 빗금무늬, 그 아래에 점을 이용한 마름모무늬를 눌러 찍어 장식하였습니다. 몸통 부분에는 선을 그어서 세모와 마름모꼴 집선문으로 채우고 그 밑으로 문살무늬와 생선뼈무늬를 차례로 배치하였습니다. 바닥 부분에도 생선뼈무늬를 새긴 것으로 보이지만 지워져 뚜렷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점과 선을 이용하여 세모, 마름모, 문살, 생선뼈 등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각각의 무늬가 일정한 형태와 크기를 이루며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는데, 신석기인의 뛰어난 공간 구성력과 미적 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빗살무늬토기에 보이는 기하학적인 문양은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연 속에서 생활하였던 신석기인들의 세계관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혹 토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암사동 5호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에도 아랫부분에 3개의 구멍이 확인되는데, 이 구멍은 토기를 수리한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흙을 불에 구워 어느 정도 단단해졌지만, 금속이나 유약을 바른 도자기에 비해 사용하는 과정에서 균열이 생기는 등 파손될 가능성이 많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균열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고, 더 이상 파손되지 않도록 구멍과 구멍 사이를 끈으로 묶어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에는 토기를 빚고 굽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수리를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으로 만든 토기가 파손되었다고 바로 버리지 않고 수리해서 다시 쓰려고 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의 지혜와 자연을 소중히 여기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합니다.
빗살무늬토기는 음식의 저장과 운반, 조리와 같이 실생활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문양을 통해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토기를 통한 생활양식의 변화, 심지어 토기 사용과 관련된 사람들의 작은 행위까지도 우리들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