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벽화란 무덤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화폭으로 삼아 완성된 그림입니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죽은 자의 매장이며, 무덤이라는 별도의 공간은 내세에서의 삶을 위해 죽은 자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고, 내세의 삶이 꾸려지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무덤벽화는 바로 죽은 자의 내세(來世) 삶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벽화무덤은 모두 110여 기에 이릅니다. 이 가운데 백제와 신라의 것 각 2기, 가야의 것 1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백제와 신라, 가야의 벽화무덤은 발견 사례도 적을 뿐 아니라 무덤을 만들고 벽화를 그린 시기도 6세기라는 특정 시기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고구려에서는 벽화무덤이 3세기 중엽 이래 7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 고구려 벽화무덤은 집안, 환인지역에서 31기, 평양, 안악지역에서 76기 등 모두 107기가 발견, 조사되었습니다. 주로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평양 일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무덤 안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이 새로운 장의(葬儀) 방식은 비록 고구려 자체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특유의 역동적이고 자립적인 문화 토양 위에서 고구려 문화의 한 장르로 성장하였습니다. 고구려인들의 생활 모습과 종교, 사상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고구려사는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조선 식민통치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일제가 시행한 무덤벽화 조사
고구려 무덤벽화가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00년대부터입니다. 1907년 프랑스 고고학자 샤반느(E. Chavannes)가 집안의 산연화총에서 벽화를 발견하고, 1908년 이를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국제학계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무덤벽화는 1908년의 정식보고 이전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1900년대 전반 강서군수에 의한 강서무덤의 조사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조사는 학술적인 조사보다는 무덤 내부에 들어가 벽화를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연구는 조선을 강점한 일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912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강서무덤(江西大墓, 中墓, 小墓)이 조사된 이래, 매년 벽화무덤에 대한 발견과 조사가 계속되었고, 아울러 벽화 모사작업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조사, 보고된 고구려 벽화무덤은 평양 지역에서 15기, 집안지역에서 12기 등 모두 27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일제에 의한 고구려 무덤벽화 조사, 연구가 순수한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제 어용학자들이 동원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러한 조사의 기록으로써 만들어진 것 중의 하나가 고구려 무덤벽화 모사도입니다. 오바 츠네키치(小場恒吉)가 도맡아 하다시피 한 평양지역의 무덤벽화 모사작업의 결과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의 도쿄대학, 도쿄예술대학 등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2개 무덤 130여 점의 모사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양과 질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1930년대에 제작된 모사도로 80여 년 전 벽화의 상태를 확인하다
무덤벽화 모사작업은 벽화를 실물과 같은 크기로 현장에서 1차 모사도를 작성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비치는 얇은 종이를 벽화 면에 붙여 그림을 베껴낸 후, 물감으로 색을 맞춰내는 방식이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벽화 모사도는 현장에서 완성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끝손질 등의 최종적인 조정은 박물관 등의 실내에서 별도로 행해졌습니다. 컬러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였던 당시로서 벽화의 색에 대한 정보를 기록함에는 모사에 의한 충실한 채색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제작된 모사도에는 원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물론 습기나 곰팡이 등으로 인한 오염, 회벽의 박락(剝落)이나 벽면의 부식 등과 같은 모사 당시 상황이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100∼70여년 전의 벽화의 모습을 현재에 남긴 것으로, 그 기간 동안 벽화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1914년에 제작된 모사도(左, 부분, 253×275㎝). 쌍영총 널방 동벽에 그려진 귀족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공양행렬을 모사한 것입니다.
쌍영총 행렬도 모사도의 2000년대 모습입니다.
고구려 무덤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실물자료로, 고구려 사람들의 삶과 생각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현재 고구려 무덤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공개된 지 100년에 이르면서 벽화의 퇴색이나 훼손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들 모사도는 향후 고구려 무덤벽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모사도와 실물 벽화와의 비교를 통해 오염과 박락, 탈색 등에 의해 지워진 도상(圖像)을 복원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고구려 무덤벽화의 보존과학적 처리방안 마련에도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