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 우월한 통치자가 나타나고 고대국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는 4세기 중반 마립간(麻立干)의 등장부터입니다. 마립간시기의 물적 증거는 신라의 고유한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로 짠 덧널을 돌무지로 감싸고 그 주위로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무덤입니다. 땅 위로 드러난 거대한 봉토를 지닌 이 무덤에는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는 관념에 따라 많은 부장품이 넣어졌습니다. 주로 마립간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끝은 6세기 중반의 신라 중고기(中古期)까지 이어집니다. 신라의 금관은 마립간시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고 변화하였습니다.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재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습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그리고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무덤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입니다. 먼저 만든 남쪽 무덤[南墳]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北墳]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중에 잇댄 왕비의 능이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무덤 모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점에서 같으나, 내부구조에서 남쪽 무덤은 시신을 모신 주곽(主槨)과 더불어 부장품을 가득 채운 부곽(副槨)을 따로 둔 점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북쪽이 왕비의 능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 ‘부인’이란 표현이 당시에 왕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夫人帶’는 왕비의 허리띠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 북분에 안장된 왕비는 금관과 금으로 꾸민 허리띠 이외에도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꾸미개 등으로 치장하였습니다. 비록 비단옷과 장신구에 덧댄 직물이 거의 모두 썩어 없어졌으나, 남아있는 귀한 장신구는 생전에 누렸던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혀 장례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비의 금관은 신라에서 유행한 나뭇가지모양 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맞가지[對生枝]와 두 개의 엇가지[互生枝]로 조합된 세움장식[立飾]은 좁고 긴 머리띠에 높이 솟아오르도록 부착되었습니다. 맞가지는 정면과 좌우 측면에 세웠고, 엇가지는 뒤쪽으로 비스듬하도록 후면의 좌우측에 붙였습니다.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고 곱은옥과 달개를 촘촘히 매달아 한층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비취라고도 부르는 경옥으로 만든 곱은옥과 금판을 둥글게 오린 달개는 하나하나씩 금실로 매달았습니다. 머리띠 아래에는 굵은 고리에 사슬로 달개를 엮은 금제 드리개를 좌우에 세 개씩 늘어뜨렸습니다. 머리띠는 유기질로 된 끈으로 양끝을 묶었던 듯합니다. 굵은 고리의 금제 드리개는 착용한 사람이 여성이었을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대체로 남성의 귀걸이와 드리개는 가는 고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금관에서 맞가지와 엇가지가 조합된 최초의 것입니다.
황남대총에서 가장 의아한 수수께끼는 왕과 왕비가 지녔던 관(冠)을 둘러싼 문제입니다. 일반적인 생각과 전혀 다르게, 왕은 금동관을 지녔고 왕비는 금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구리판에 도금을 한 금동관과 순수한 금관은 재질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비록 왕의 관은 유일하게 곱은옥을 단 금동관임에도 불구하고, 재질이 금동인 점에서 금관에 비해 결코 우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금동관은 세움장식이 세 개의 맞가지 뿐입니다. 이러한 왕과 왕비의 관은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나뭇가지모양 관’은 세움 장식의 모양에 따라 변화를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머리띠에 세 개의 맞가지만을 세웠습니다. 맞가지의 모양은 자연스런 나뭇가지처럼 가지가 밖으로 벌어진 것에서 점차 직각으로 꺾이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자연의 나무를 형상화한 듯하며, 초기 형태이므로 ‘시원형식(始原型式)’으로 분류하는데, 경주 교동에서 발견된 금관이 대표적입니다. 이 형식의 마지막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왕이 착용한 금동관입니다. 세움 장식은 맞가지 뿐이지만, 그 형태가 직각에 가깝게 꺾여 있어 뒤이은 형식과도 이어집니다. ‘나뭇가지모양 관’의 전형은 세 개의 맞가지에 더해 두 개의 엇가지를 조합한 것인데, 가장 다듬어진 형태이므로 ‘표준형식(標準型式)’으로 분류합니다. 새로 조합된 엇가지는 사슴뿔을 본떴다고도 합니다. 엇가지는 뒤늦게 더해졌으므로 이를 굳이 사슴뿔을 형상화했다고 볼 여지가 적습니다. 다만 상징 측면에서 나무와 사슴뿔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라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단계 이후의 맞가지는 한결같이 모두 직각으로 꺾인 형태입니다. 표준형식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에서 처음으로 완성되며, 금관총(金冠塚) 및 서봉총(瑞鳳塚)의 금관과 더불어 표준형식이 성립하는 단계에 속합니다. 표준형식 성립단계의 금관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점이 특징입니다. 이후에 만들어진 천마총(天馬塚) 및 금령총(金鈴塚)의 금관은 표준형식 발전단계에 속하며, 맞가지의 마디가 4단인 특징을 지닙니다. 즉 ‘나뭇가지모양 관’의 표준형식은 맞가지의 마디가 3단인 것에서 4단인 것으로 바뀌었고, 전체적으로 점점 빽빽해지고 화려해지는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퇴화형식(退化型式)’은 추측하건데 더 이상 금관이 만들어지지 않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관에 내포된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단계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꾸밈이 많아지거나 오히려 급격하게 간단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퇴화형식에서도 가장 마지막은 구리판을 적당히 잘라 만든 동관(銅冠)입니다. 동관의 착용자는 함께 부장된 방울 등으로 볼 때 이전 단계의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무당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상은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왕과 왕족은 기록에 따르면 한때 제사장이었으며, 마립간시기(麻立干時期)까지 꾸준히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은 신성한 나무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의를 주관하는 신라의 마립간과 그 일족의 성격에 부합하는 도안이라고 해석됩니다. 마립간시기 직후인 중고기의 법흥왕(法興王)은 전통제의의 중심이었던 신궁(神宮)을 대신하여 불교를 공인하였고 더불어 국왕의 세속적 권위를 월등히 강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신라의 왕에게는 전통제의와 관련된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모양 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듯합니다. 다만 나뭇가지모양 관이 지니고 있던 제의적 상징은 그대로 민간에 전승되어 정치적 권위가 사라진 채 무당의 신물로 남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표준형식. 경주 천마총 출토 금관, 높이 32.5 cm, 국보
3 퇴화형식. 단양 하리 출토 동관, 높이 26.9 cm호
금관과 함께 사용된 신라의 허리띠는 가죽 띠에 황금으로 만든 띠꾸미개[銙板]를 붙이고, 그 아래에 역시 황금으로 만든 여러 형상을 매단 띠드리개[腰佩]를 드리웠습니다. 금제 허리띠꾸미개는 금관과 더불어 왕족만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신구로 다루어졌습니다. 띠꾸미개는 네모꼴의 판에 하트 모양의 드림을 달았습니다. 네모꼴 속에는 용봉무늬 또는 세잎무늬를 넣었는데, 이 두 문양은 고구려에서 유행하던 것이 모두 신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세잎무늬가 주류로 정착하여 변화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띠드리개에는 물고기, 곱은옥, 칼, 집게 등을 매달았습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황남대총과 같은 거대한 신라 능묘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난 신라가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그래서 한일학계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 417~458)의 왕릉이라는 학설이 다수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내적 수준을 지나치게 낮추어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중국 동북지방의 4세기대 무덤과의 비교를 통해 황남대총의 부장품은 마립간시기 초기의 양상일 수 있다는 학설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학설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의 왕릉으로 보았습니다. 최근에는 고구려의 영향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으며 마립간시기 초기의 시원적 양상에서 벗어난 시기를 배경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는 학설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논점은 왕이 금동관을 지닌 점에서 눌지마립간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 재위 402~417)의 왕릉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비인 북분의 주인공은 왕인 남분의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학설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