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귀걸이 중 단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보물
이 귀걸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경주의 보문동합장분(普門洞合葬墳, 큰 봉분 안에 무덤 두 기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아주 작은 금 알갱이와 금실을 이용한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달개[瓔珞] 등, 삼국시대 귀걸이 중에서 단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보물로, 1962년에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귀걸이에 대해서는 제작방법이나 무늬에 대해서 꾸준히 연구되어 왔으나 정작 귀걸이가 어떻게 출토되었고, 그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부부였을 것이라는 발굴 당시의 추측이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는 발굴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굴된 지 96년 만인 지난 2011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무덤에 대한 발굴보고서를 간행하였습니다. 보고서 발간으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던 부분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여기서는 이를 토대로 무덤의 발굴과정, 구조, 그리고 귀걸이 주인은 누구인지 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발굴되었나
일제는 우리나라의 강제병합에 앞서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신라의 천년수도인 경주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주로 사지(寺址)에 남아 있는 석탑과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유적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였습니다. 1915년 보문동합장분의 조사 전에도 신라무덤에 대해 몇 차례 발굴이 있었는데, 대부분 정식 발굴조사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경우 시신을 묻었던 곳을 찾지 못하고 돌무지 위에서 중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정도였습니다.
일제의 경주지역 고적조사가 본격화된 것은 바로 보문동합장분을 발굴하면서부터입니다. 보문동합장분은 세키노다다시(關野貞) 조사단이 발굴하였습니다. 1915년 7월 6일 발굴을 시작하여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다음날에 내부 조사를 끝냈고, 돌무지덧널무덤은 12일에 마쳤습니다. 조사단은 두 무덤을 조사하고 내부의 구조와 유물이 놓여 진 상태에 대한 간단한 도면을 남겼는데, 간략하게나마 부장품의 출토위치가 기록된 최초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귀걸이는 돌방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보문동합장분은 한 봉분 안에 두 개의 매장시설(돌무지덧널과 돌방)이 있는 무덤으로 돌무지덧널무덤이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훗날 합장을 위해 원래 있던 봉분의 한쪽을 헐어내고 돌무지덧널의 돌무지 곁에 붙여서 돌방을 만들고 다시 흙을 덮었습니다. 연구결과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진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천오백 년 전인 약 520~540년으로 추정되고 돌방무덤은 이보다 조금 늦은 540~560년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신라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뀌어 가는데, 이 무덤은 이러한 무덤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귀걸이의 주인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좌) 길이 8.0cm, 무게 33.0g
(우) 길이 7.87cm, 무게 33.8g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남성은 치마를 입지 않았고, 여성은 바지를 입지 않았습니다. 귀걸이나 목걸이도 여성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비록 시기에 따라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물건은 바뀌었지만, 옷이나 장신구의 특정 형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성별을 알리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따라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성별은 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장신구를 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옷은 모두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장신구를 연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귀걸이의 종류임이 밝혀졌습니다. 귀걸이는 위쪽 고리[主環]의 형태에 따라 가는고리귀걸이[細環耳飾]와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로 나뉘어 집니다. 가는고리귀걸이를 매달고 무덤에 묻힌 사람은 대부분 대도[大刀]를 허리에 차고 있는 반면, 굵은고리귀걸이를 한 사람은 대도를 찬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황남대총[皇南大塚]입니다. 황남대총은 두 무덤이 나란히 있는데 신라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졌습니다. 남쪽 무덤에서는 남성의 뼈가 출토되어 묻힌 사람이 남성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가는고리귀걸이를 했습니다. 북쪽 무덤에서는 허리띠에 ‘부인대(夫人帶, 부인의 허리띠)’라는 명문이 나와 여성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데 굵은고리귀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인의 경우 가는고리귀걸이를 하고 대도를 허리에 차고 묻힌 사람은 남성, 굵은고리귀걸이를 하고 묻힌 사람은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화려한 귀걸이를 차고 묻힌 사람도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문동합장분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대도가 발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돌무지덧널무덤의 주인은 남성일까요? 돌무지덧널무덤에서도 굵은 고리 귀걸이가 한 쌍 출토되었습니다. 대도는 남성을 나타내는 부장품이고 굵은고리 귀걸이는 여성을 나타내는 장신구인데 어떻게 된 것일까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대도로 남녀를 구분하려면 단순히 대도가 무덤에서 출토되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허리춤에 찬 채로 묻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문동합장분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대도가 허리춤이 아닌 머리 위쪽의 부장품 상자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황남대총 북쪽 무덤(왕비의 무덤)에서도 대도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모두 부장품 상자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돌무지덧널무덤에 묻힌 사람도 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합장분에 묻힌 사람들은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떤 장신구를 하고 있는지는 성별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 장신구는 귀걸이인데, 여기에 팔찌, 반지, 목걸이, 칼, 관 등이 추가되면서 점차 지위가 높아집니다. 두 무덤에 묻힌 사람은 금제 귀걸이뿐만 아니라, 은과 청동으로 만든 팔찌, 그리고 은제반지를 끼었습니다. 당시에는 귀걸이를 찬 것만으로도 상당한 지위의 사람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금속 장신구를 차고 묻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를 보면 이들을 크게 세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에서 가장 상류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럼 한 봉분에 나란히 묻힌 두 여인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한 봉분에 나란히 무덤을 썼기 에 분명 가까운 사이였을 것입니다. 자매간이었을 수도 있고, 모녀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녀간이었다면 시집 못 가고 단명한 딸을 애달아 한 어머니가, 죽어서 딸과 묻히려는 뜻은 아니었을까요?
국보 금제 귀걸이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천오백 년이 지나도 반짝거리는 황금색, 화려한 무늬, 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옵니다. 지름 0.5mm도 안되는 작은 금 알갱이와 얇은 금실을 이용해서 거북등 모양으로 구획하고 다시 그 안에 꽃문양을 표현한 정교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신라의 세련된 미각과 최고의 금속공예기술을 보여주는 이 귀걸이에도 인간의 실수가 남아 있습니다. 돋보기를 대고 유심히 살펴보면, 미처 가열이 충분히 되지 않아 동그란 구슬이 되지 못한 금 알갱이와, 원치 않는 위치에 붙어 있는 또 다른 금 알갱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에 괴로워하며 ‘몇 달간 힘들게 만든 귀걸이를 이 작은 실수 때문에 녹여야 하나!’ 하고 남몰래 고민하는 장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구슬모양이 아닌 금 알갱이
원래 위치가 아닌 금 알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