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별급문서는 1401년(태종1) 태상왕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1335~1408/재위1392~1398)가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 딸 며치(㫆致, 숙신옹주)에게 집과 땅을 상속해주는 왕실 문서입니다. 문서의 좌측에는 이성계의 친필 서명이 있고, 우측에는 어보(御寶)가 찍혀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태조의 친필 문서로 여겨졌기 때문에 탁본으로 《열성어필》에 실려서 현재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 등에 전하고 있는 문서의 원본입니다.
딸을 아끼고 사랑한 이성계의 마음
이 문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건문(建文) 3년(1401) 신사년(辛巳年) 9월 15일 첩의 소생인 며치(㫆致)에게 상속 문서를 작성해 준다. 비록 며치가 나이 어리고 첩에게서 난 여자 아이지만, 지금 같이 내 나이 장차 70이 되는 마당에 가만히 있을 일만은 아닌 듯 하다. 동부(東部)에 있는 향방동(香房洞)의 빈터는 돌아간 재상 허금의 것으로 잘 다듬어진 주춧돌과 함께 샀으니, 집은 종을 시켜 나무를 베어다가 짓도록 하여라. 몸채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기와로, 동쪽에 붙여 지은 집 한 칸도 기와로, 부엌 한 칸도 기와로 잇는다. 술 방 세 칸은 이엉으로, 광 세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다락으로 된 곳간 두 칸은 이엉으로, 안 사랑 네 칸도 이엉으로, 서방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남쪽에 있는 마루방 세 칸은 앞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잇는다. 또 다락으로 된 곳간 세 칸은 기와로 이어서 모두 스물 네 칸을, 주춧돌과 함께 구입한 허금 집터의 매매 문서와 함께 상속해 주노라. 영원토록 그 곳에서 살도록 하되 훗날에 별다른 일이 있거든 이 상속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해서 올바르게 변별하고 자손들이 전해 가지며 오래도록 거주 하도록 하여라.”
이 문서에는 딸을 아끼고 사랑한 이성계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문서 첫머리에서 이성계는 “비록 며치가 나이 어리고 첩에게서 난 여자 아이지만, 지금 같이 내 나이 장차 70이 되는 마당에 가만히 있을 일만은 아닌 듯 하다”로 써서 그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어서 며치에게 내려줄 재산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재산 목록은 수백 년 전에 사용된 고유 용어와 이두(吏讀) 표현 등으로 말미암아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다소 한계가 있습니다. 그 대강의 내용은 서울의 동부에 있는 향방동에 소재한 허금 소유의 빈터와 주춧돌을 구입해서 여기에 새로이 스물 네 칸짜리 기와집을 지어서 이를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서의 끝에서 영원토록 그 곳에 살도록 하되 훗날에 별다른 일이 있거든 이 상속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해서 올바르게 변별하고 자손들이 전해 가지며 오래도록 거주 하도록 하라는 당부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문서의 전래 경위 찾을 수 있어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태상왕 이성계의 친필 서명이 있으며, 우측 상단에는 어보(御寶)가 찍혀있습니다. 어보의 인문(印文)은 ‘계운신무태상왕지보(啓運神武太上王之寶)’로 판독됩니다. 정종(定宗) 2년(1400)에 태상왕 이성계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리고, 아울러 옥책과 금보(金寶)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기 때문에 인문이 많이 흐려도 판독이 용이한 편입니다.
문서의 전래 경위는 『조선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전합니다. 1746년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 시험을 직접 감독하고 있던 영조에게 충청도 이산의 유생 홍천보가 직접 이 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홍천보는 숙신옹주의 부마(駙馬)인 당성위 홍해의 자손으로, 이 문서가 집안에서 대대로 세전되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영조는 문서를 가져온 보상으로 홍천보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 일이 있은 후 벼슬을 구하기 위해 열성의 어필이라고 하여 조정에 가져다 바치는 이가 많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홍천보가 가져온 문서의 글씨를 태조의 친필로 인식하였고, 문서를 그대로 돌에 새기도록 하교하였습니다. 그리고 탁본을 하여 《열성어필》에 실어 여러 곳에 반사하였습니다. 당시 문서를 새긴 원석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은 문서를 돌에 새긴 어필각석(御筆刻石)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을 통해 부여된 명칭을 우리나라 식으로 변경
지정된 이 문서가 1969년 보물로 지정될 당시 문서 명칭은 ‘숙신옹주 가대 사급성문(淑愼翁主 家垈 賜給成文)’이었습니다. 보물로 지정될 당시 지어진 문서 명칭은 ‘숙신옹주에게 가대(집터)를 왕이 내려주면서 작성한 문서’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문서 명칭은 1934년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쓴 논문 제목(‘李朝太祖の御製親筆と稱せられる古文書に就いて-淑愼翁主家垈賜給文書を紹介す-’)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전래되는 여러 중요 고문서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고, 따라서 일인에 의해 우선적으로 문서의 명칭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현행 우리나라 고문서학의 문서 명칭 부여 방식에서는 문서를 받는 사람을 위주로 하지 않고 주는 사람을 위주로 합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본 문서를 ‘조가(朝家)의 별급문서’라고 부르는 대목이 있으므로, 문서 명칭을 기존의 것에서 ‘태조 이성계 별급문서’로 정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문서는 조선 초기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왕실의 재산 상속 문서로써 노비나 전답을 상속하는 일반적인 사례와 달리 가옥을 하사하는 내용이며, 다양한 고유 용어와 이두(吏讀)가 사용된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