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한글 금속활자 : 이재정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전통 문화유산 가운데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금속활자와 그 인쇄술입니다. 고려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인쇄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1403년 이래 수 십 차례 활자를 제작하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사용했던 활자 수 십 만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활자들은 대부분 한자 활자이며, 한글 금속활자는 750여점에 불과합니다. 이들 한글 금속활자는 국내외를 망라하여 현존하는 유일한 한글 금속활자 실물입니다. 이 활자들은 조선시대 한글 사용의 실례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활자 제작 방법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습니다.

사진. 한글 금속활자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사용했던 활자 중 남아있는 한글 금속활자는 750여 점으로 이 활자들은 조선시대
한글 사용의 실례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 한글 활자

사진. 『능엄경언해』에 사용한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 한글 활자

능엄경을 한글로 풀이한 『능엄경언해』에 사용한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 한글 활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글 금속활자는 두 종류입니다. 그 중 한 종류는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 한글활자 즉 을해자와 함께 쓴 한글활자 29점으로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을해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서화가였던 강희안 이 쓴 글씨를 글자본으로 1455년(세조 1) 을해년에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을해자는 1434년에 만든 갑인자(甲寅字)와 함께 조선 전기에 사용된 대표적인 활자입니다.

을해자병용 한글활자는 1461년에 을해자로 간행한 『능엄경언해』(능엄경을 한글로 풀이한 책)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만든 한글활자에는 특별한 명칭이 없어 그것과 함께 쓰인 한자활자의 명칭을 따라 을해자병용 한글활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활자로 간행한 최초의 책의 명칭에 따라 ‘능엄한글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을해자병용 한글활자는 『아미타경언해』(1461년), 『두시언해』(1481년) 등의 인쇄에 사용되었습니다. 1588년(선조 21)부터 3년간 경서를 언해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역시 을해자병용 한글활자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활자는 을해자가 주조된 1455년과 『능엄경언해』를 인쇄한 1461년 사이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 한 종류의 활자, 무신자병용(戊申字倂用) 한글 활자

또 한 종류는 무신자병용(戊申字倂用) 한글활자 즉 무신자와 함께 쓴 한글활자입니다. 무신자는 1668년(현종 9) 무신년에 김좌명이 호조와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활용하여 수어청에서 만든 금속활자입니다. 이 활자의 글자체는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와 같고 갑인자 글자체로 만든 활자 중 네 번째여서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라고도 부릅니다. 김좌명이 죽은 뒤 이 활자는 교서관으로 옮겨 져 국가에서 필요한 책을 인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신자병용 한글활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기록이 없지만, 이 활자로 찍은 책 가운데 1695년(숙종 21)에 이 책을 하사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대학언해』가 이 활자의 인쇄와 관련된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이로 보아 무신자병용 한글활자는 1668년에서 1695년 사이에 주조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신자는 숙종~영조 연간 국가에서 책을 간행할 때 널리 사용되었으며, 무신자병용 한글활자 역시 숙종~영조 연간 언해서 출판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세손시절인 1772년에 다섯 번째 갑인자인 임진자(壬辰字)를 주조하게 하였고 왕위에 오른 해인 1777년에 여섯 번째 갑인자인 정유자(丁酉字)를 주조하게 하였습니다. 무신자병용 한글활자는 임진자와 정유자로 인쇄한 책을 언해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사진. 무신자병용(戊申字倂用) 한글 활자 앞면 모습

무신자병용(戊申字倂用) 한글 활자 앞면 모습.
두 활자의 구별 포인트 1- 글자체

을해자병용 한글활자와 무신자병용 한글활자는 활자의 모양, 글자체 등에서 서로 다릅니다. 한글 글자체의 자음과 모음의 배치방식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랐는데, 을해자병용 한글활자에는 조선 전기 한글 글자체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 또는 자음, 모음, 자음이 합해져 글자를 이루는 구조입니다. 또 한자와 마찬가지로 정사각형 틀 안에 자음과 모음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형태로 글자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초기에는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성된 한글의 구성원리를 살리는 쪽에 비중을 두어, 네모난 공간을 상하좌우로 나누어 초성, 중성, 종성을 기계적으로 배분하였습니다. 이를 ‘음운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특히 받침인 종성이 지나치게 커서 글자의 자모음의 배치가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배치는 후기로 갈수록 변형되었습니다. 즉 초성, 중성, 종성이 정사각형 공간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한 것입니다. 이를 ‘조형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정사각형 틀 안에 활자를 놓고 볼 때 한글 글자체는 후기로 가면서 자음이 모음보다 상대적으로 작아졌고, 윗선을 기준으로 점점 내려가며, 모음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뉩니다. ‘ㅏ ㅓ ㅣ’와 같은 모음은 후기로 가면서 자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자음과의 거리는 멀어지는 반면, ‘ㅗ ㅜ ㅡ’와 같은 모음은 초기와 비슷한 크기와 위치를 보입니다.

『능엄경언해』에 인쇄된 한글은 네모난 공간을 상하좌우로 나누어 초성, 중성, 종성을 기계적으로 배분한 음운체계에 따른 공간분배 원리를 따른 글자체입니다. 반면 무신자병용 한글활자의 글자체는 조형적 체계에 따른 공간배분을 고려하여 자음과 모음이 배치되어 있으며, 자음의 크기가 을해자병용 한글활자에 비해 작습니다.

사진. 운음체계에 따라 공간 배분을 한 활자와 조형체계에 따라 공간 배분을 한 활자

두 활자의 구별 포인트 2- 활자의 모양

두 종류의 활자는 외형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을해자병용 한글활자는 무신자병용 한글활자에 비해 글자를 새긴 깊이가 비교적 얕으며, 뒷면이 평평합니다. 홈이 파여 있는 활자도 있으나 홈이 얕고 홈의 형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그룹의 활자들은 세웠을 때 거의 수평을 이루며 바닥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뒷면을 간 흔적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활자의 측면은 수직에 가까워 거의 직육면체를 이룹니다.

사진. 을해자병용 한글 활자의 펼친 6면

을해자병용 한글 활자의 펼친 6면.

활자의 뒷면은 조판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 때 처음 만든 계미자는 식자판에 밀랍을 녹여 놓고 글자를 꽂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밀랍이 단단히 굳지 않아 꽂은 글자가 쉽게 흔들려 하루에 몇 장밖에 인쇄하지 못했습니다. 세종이 활자개량을 시도하여 갑인자에 와서는 활자의 바닥이 평평하고 모양이 반듯하여, 밀랍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하루 인쇄량도 40부로 늘었다고 합니다. 을해자의 주조법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갑인자를 만들고 20여년이 지난 후 을해자를 만들었고, 갑인자와 을해자를 함께 사용해 인쇄한 예도 있으므로, 을해자 역시 바닥이 평평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을해자병용 한글 활자는 이러한 추측에 근거를 제공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사진. 무신자병용 한글 활자의 펼친 6면

무신자병용 한글 활자의 펼친 6면.

무신자병용 한글 활자는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조선후기 금속활자들처럼 뒷면에 터널 형태로 홈이 나 있으며, 좌우 기둥이 일치하지 않는 활자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바닥에 젖은 종이 같은 물체를 깔고 활자를 그 위에 끼우는 방식이 아니라면 조판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조선 전기와 조선후기의 활자 조판방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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