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초부터 농업을 근본으로 삼는 정책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상업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부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면서 화폐도 발행하여 유통시켰습니다. 즉, 고려시대에 유통되었던 은화의 통용을 금지하고, 지폐인 저화(楮貨)와 조선통보(朝鮮通寶), 십전통보(十錢通寶) 같은 동전, 전폐(箭幣)라는 독특한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폐는 일반 백성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통용되다 중단되곤 하였습니다. 그 대신 일반 백성들은 쌀이나 면포 같은 실질가치가 있는 물품 화폐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처럼 금속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던 것은 화폐 정책이 지속성을 갖지 못해서 발생한 측면도 있지만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상평통보 당일전 앞면(좌)과 뒷면(우), 조선후기, 지름 2.6 cm, 신수 12565.
상평통보 당이전 앞면(좌)과 뒷면(우), 조선후기, 지름 3.0 cm, 신수 12561.
상평통보로 본격적인 금속화폐 유통이 시작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부가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상품 유통이 발전하였습니다. 원래 정부는 필요한 물품을 농민들의 특산물을 받아 조달하였는데, 대동법 실시를 통해 대동미(大同米)라는 미곡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 미곡을 공인(貢人)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상품 유통이 원활하게 되어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금속화폐의 유통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곡도 이동하기에는 무거워서 그보다 가벼운 금속화폐가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전의 유통에 대한 논의가 간간이 제기되었습니다. 인조 11년(1633)에 가격 안정을 맡은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가 인조 15년(1637)에 병자호란으로 인해 주조가 중지되었습니다. 그 뒤 효종대(孝宗代)에 김육(金堉, 1580~1658)의 주도 아래 동전 유통을 다시 시도하였습니다. 효종 1년(1650)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김육은 구입해온 15만문의 중국 화폐를 평안도 평양, 안주에 유통시켜 보았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후의 동전 유통에 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동전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4년(1678)에 허적(許積, 1610~1680)의 제안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면서부터였습니다. 17세기 말경에 이르면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금속화폐가 유통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퇴장화폐(退藏貨幣)로써 부의 척도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인들은 토지 대신 화폐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이를 고리대의 방식으로 부를 불려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퇴장화폐가 늘어나면서 화폐가 부족한 현상인 전황(錢荒)이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화폐는 전국 각지에 퍼져 생산물의 상품화를 촉진시켜 나갔습니다. 이리하여 상품의 매매, 임금의 지불, 세금의 납부 등이 점점 화폐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상시평준’의 줄임말인 ‘상평’,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 하다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부터 고종대 근대 화폐가 발행되기까지 통용된 대표적인 금속화폐입니다. 상평통보의 ‘상평’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인 말입니다. 이 말은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화폐는 기본적으로 외형이 납작하고 둥근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습니다. 앞면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줄여 쓴 명칭, 천자문(千字文) 또는 오행(五行) 중의 한 글자, 숫자나 부호 등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글자의 서체 및 크기, 테두리의 너비, 명목가(名目價)의 표시 및 동전의 크기 등의 차이를 통해, 그 유형을 다양하게 세분할 수 있습니다.
상평통보는 중앙의 7개 기관과 감영 및 군영 등에서 주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통화량의 조절 등 상황에 따라 주전소를 줄이거나 늘였으며, 정조 9년(1785)부터 호조(戶曹)만 주조하다가 순조대(純祖代)에는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사적으로 만든 사주(私鑄)도 가능해져 주조된 동전의 양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후 대원군(1820~1898)은 고종 3년(1866)에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였습니다. 당백전의 액면 가치는 상평통보 1문(文)의 100배였지만 실제 가치는 5~6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백전의 발행으로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 상승을 초래하였습니다. 당백전 발행 당시 7~8냥 하던 쌀 1섬의 가격이 이후 44~45냥으로 무려 6배나 폭등하여 일반 백성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고종 20년(1883)부터 당오전(當五錢)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이지만 실제 가치는 2배 정도였습니다. 이후 고종 31년(1894)에 근대 화폐가 주조됨에 따라 상평통보는 더 이상 주조되지 않았고 근대 화폐의 보조 화폐로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