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
우리나라 산 곳곳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기에 산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절을 둘러보게 됩니다. 부처님을 모신 금당(金堂)에는 관광객들이 북적북적하지만, 금당 앞에 서 있는 탑에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습니다. 돌을 네모나게 깎아 3층, 혹은 5층으로 쌓은 탑이 왜 절마다 세워져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탑도 금당처럼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는데, 불상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금당조차 사라진 폐사지에 덩그러니 서 있는 탑은 찾는 이 조차 많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시신을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한 후 남은 부처님의 유골을 사리(舍利)라고 부릅니다. ‘사리’라는 말은 인도 산스크리트 어의 ‘śarīra’와 팔리 어의 ‘sarīra’의 소리를 딴 말로 ‘몸, 뼈, 유골’ 등을 뜻합니다. 팔리 어 문헌에서는 죽은 자의 신체인 ‘sarīra’와 시신을 화장한 다음 남은 진주나 분말 같은 유골인 ‘dhātu’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부처의 유골인 사리는 무덤의 일종인 탑(塔) 안에 모십니다. 탑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어 stūpa와 팔리 어 thūpa는 모두 사리를 모신 곳을 의미합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은 가장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며, 대부분의 인도 사원 중심부에는 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시작된 인도에서는 불상보다 탑이 먼저 등장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숭배하는 사리 신앙은 이처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에서 무심히 봤던 탑 안에 불교의 역사가 숨어있던 것입니다.
기록상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리가 전래된 때는 삼국시대인 549년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진흥왕 10년 중국 양나라에서 불사리를 보냈으며, 이 때 가져온 사리 중 1200과가 582년(진평왕 4) 대구 동화사에 봉안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삼국유사』(卷第3 塔像, 第4 前後所將舍利)에는 “643년 자장법사가 당으로부터 불두골(佛頭骨), 불아(佛牙),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의 가사 한 벌을 가져 왔고,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황룡사 탑, 태화사(太和寺) 탑, 그리고 가사와 함께 통도사의 계단(戒壇)에 두었다. 나머지 다른 것들은 지금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감은사, 왕실의 원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감포로 가다 보면 눈앞에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질 즈음 높이 13미터의 거대한 삼층석탑 2기가 왼쪽에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감은사터 석탑은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 세워진 삼층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은사(感恩寺)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2년경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 즉 원찰(願刹)입니다. 지금은 탑 이외에 남은 건축물이 없지만, 왕실에서 지은 만큼 감은사는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감은사터는 1959년 10월 30일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사지(寺址) 발굴이었습니다. 발굴을 주도하고 보고서까지 집필한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미국 하버드 옌칭 연구소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이루어진 발굴이었습니다. 당시 상태가 좋지 않았던 서삼층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를 했는데 12월 31일에 놀랍게도 3층 탑신석 윗면에서 사찰 창건 당시에 봉안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리갖춤을 넣는 공간인 사리공을 남북 방향으로 길게 판 다음 남쪽 부분에 사리갖춤을 안치했습니다. 발견 당시 사리외함의 한쪽은 거의 파손된 상태였고, 그 안의 사리기도 크게 파손되어 있었습니다. 그 편들을 모아서 복원한 사리갖춤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1). 한편 동삼층석탑은 1996년에 보수를 위해 해체되었는데 서삼층석탑과 같은 위치인 3층 탑신석 윗면 사리공에서 사리갖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리갖춤은 국립중앙박물관 금속공예실에 전시 중입니다(2).
감은사터 서탑 사리갖춤,
통일신라 682년경, 높이(사리기) 16.5 cm, 보물
감은사터 동탑 사리갖춤,
통일신라 682년경, 높이(사리기) 18.8 ㎝, 보물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작은 알갱이처럼 생긴 사리는 탑 안에 그냥 넣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리병에 넣은 다음, 금, 은, 동의 재질로 만든 용기에 다시 넣어 탑 안에 모십니다. 이렇게 여러 겹으로 만든 용기 안에 사리를 넣는 이유는 부처님의 시신을 금관, 은관, 동관, 철관에 차례대로 넣었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리 또한 부처님의 장례 절차를 따라 금속제의 다중 용기에 담게 되었습니다.
두 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은 나란히 조성된 탑 안에 모신 것이라 사리갖춤의 형식이나 구성 또한 매우 유사합니다. 사리를 담은 수정 사리병, 전각(殿閣)처럼 생긴 사리기, 상자처럼 생긴 사리외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각 기법이나 세부 묘사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갖춤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왼쪽에 있는 전각 모양의 사리기를 오른쪽에 있는 상자 모양의 장방형 사리외함 안에 넣어 중첩시켰습니다. 또한 수정 사리병은 사리기 중앙에 놓은 후 보주와 연판으로 장식된 복발(覆鉢) 모양의 뚜껑을 덮어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금도금을 한 동탑 출토 사리외함의 네 면에는 안에 넣은 사리기를 지키는 사천왕상 부조가 붙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세상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사천왕은 각 방위를 지키고 있는데, 북방 다문천왕은 손에 탑을 들어 방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서탑과 동탑의 사리외함은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사천왕의 모습과 자세, 주변 구름무늬 장식, 모서리의 문양 등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이나 사천왕의 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볼 때 당시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우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각 모양 사리기는 실제 건물처럼 기단이 있고 위에는 난간을 둘렀습니다. 그 주위에는 사천왕상과 스님상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서 있습니다. 방위에 따라 놓인 사천왕상은 창, 검, 탑을 들고 있습니다. 반면 서탑 사리기의 네 모서리에는 동발(銅鈸), 요고(腰鼓, 북), 횡적(橫笛, 피리), 비파(琵琶)를 연주하는 천인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기둥 위에 올린 보개(寶蓋)의 넝쿨무늬와 화염무늬 등이 매우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 사리기의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상자 모양 사리기들과 모양이 달라 주목됩니다. 전각 모양 혹은 집 모양 사리기로도 불리는데, 돈황막고굴 중 148굴의 열반경변(涅槃經變)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을 나르는 가마 형태와 유사하여 보장형(寶帳形) 사리기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는 감은사 사리기는 통일신라의 독자적인 양식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 중국에도 유사한 형식의 사리갖춤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감은사 사리기의 형태가 워낙 독특하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논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