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으로 만들어진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92호) 물가풍경 무늬 정병을 처음 보게 되면, 정병 전체를 뒤덮고 있는 초록색 표면에 먼저 눈길이 가게 됩니다. 금속 재질의 특성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원래부터 그런 색이었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문화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 중에서도 언뜻 색깔만 보고 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 눈에 띄는 초록색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바로 청동이 부식된 녹입니다. 바탕 재질인 금속을 부식시키는 녹이 이 정병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한다는 점은 사실 모순입니다.
정병 몸체를 보면 버드나무나 갈대가 자라는 섬들이 점점이 놓여 있고, 섬 주변 물가에는 새들이 여기저기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또한 새들 사이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으며, 저 먼 하늘에는 줄지어 어딘가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입니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이 장면들은 몸체에 홈을 낸 다음 0.5밀리미터 굵기의 얇은 은사를 그 안에 끼워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지금은 은사도 녹이 슬어 검게 보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어두운 바탕 위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은사가 이 무늬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과연 고려시대를 대표할 만한 섬세한 금속공예품입니다.
정병, 승려의 필수품
고려시대인 12세기에 만들어진 물가풍경 무늬 정병으로 표면의 초록색은 청동이 부식된 녹의 색깔입니다. 정병은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한 승려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인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정병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가 마실 물을 담았던 휴대용 용기였습니다. 현존하는 인도의 정병은 첨대가 짧은 꼭지처럼 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정병과는 모양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 주로 볼 수 있는 고려시대 정병의 형태는 당나라 구법승 가운데 하나인 의정(635~713)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성행한 중국 당나라 때는 인도로 가서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전을 구하려는 승려들이 많았습니다. 의정은 10여 년 동안 인도에 체류하면서 본 인도와 남해 여러 나라의 불교 현황과 계율 등을 자세히 기록한 『남해기귀내법전』을 남겼습니다. 의정은 이 책의 여섯 번째 항목에서 물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물을 언제, 또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담는 병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자세히 묘사하였는데, 이 방법대로 만들어진 병의 형태가 지금의 정병과 유사합니다. 이런 형식의 정병은 중국의 구법승들이 인도를 방문하기 시작한 기원후 3세기 이후부터 중국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구마라집이 한역한 『범망경』에 수행 생활을 하는 승려들은 병과 발, 석장, 향로, 녹수낭 등 18가지의 물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중 녹수낭은 물을 거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 품질이 좋은 명주나 무명으로 된 천을 사용합니다. 올이 성긴 천은 벌레가 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 천을 주구에 씌워 묶은 후 물 속에 넣으면 계율에 맞는 정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사용된 승려의 필수품이 바로 정병입니다.
정병과 수병
1123년 6월 중국 송나라 휘종이 보낸 사절단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도착했습니다. 전해에 돌아가신 예종을 조문하고 휘종의 조서를 인종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절단의 예물 등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서긍은 체류 기간 동안 고려의 건축, 의식, 풍속 등을 살펴본 후 『선화봉사고려도경』을 저술했습니다. 아쉽게도 그림 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12세기 전반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기명의 명칭과 모양, 용도 등을 자세히 담고 있는데, 물을 담는 용기로 정병과 수병을 언급하였습니다.
서긍이 묘사한 정병의 모양은 여기에서 소개한 국보 물가풍경 무늬 정병의 형태와 매우 비슷합니다. 즉 몸체의 어깨에는 두 마디로 이루어진 짧은 주구가 붙어 있고, 병목 위에는 대롱 모양의 가늘고 긴 첨대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물만 담을 수 있는 이런 형태의 수병, 즉 물병을 특별히 ‘정병’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정병과 수병 모두 물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예품에서 모양은 중요한 형식의 하나이고, 고려시대에 이러한 모양의 병을 정병이라고 했으므로 두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정병
『삼국유사』에 따르면 늦어도 7세기 말경에는 우리나라에 정병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가장 오래된 정병은 8세기 중엽 만들어진 석굴암에 남아 있습니다. 몇 점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대부분의 정병들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금속 정병은 대부분 표면을 장식하는 문양이 없으며, 문양이 있는 경우에는 입사 기법으로 물가의 풍경을 묘사한 ‘포류수금문’이 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문양은 금속제 정병과 향완은 물론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보여 고려시대에 매우 유행한 문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속기뿐만 아니라 도자기로도 정병이 만들어졌는데, 청자에는 다양한 문양이 여러 가지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청자 정병은 음각, 양각, 상감 기법 등으로 문양을 새겼으며, 포류수금문을 비롯하여 연꽃, 국화, 모란, 넝쿨무늬 등 장식된 문양도 다양합니다. 왼쪽의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344호) 청자 정병은 물가 풍경 중 일부를 문양 소재로 삼았는데, 갈대나 버드나무에 비해 기러기와 원앙이 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도자기에서는 문양이 공예적인 도안으로 변화되어 있어 금속기의 문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서는 귀족과 관리들뿐 아니라 사찰과 도관, 민가에서도 물을 담을 때 정병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계율을 지키는 승려처럼 물을 걸러서 정병에 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찰 밖의 모든 계층에서 불교 의식구인 정병을 사용할 만큼 정병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매우 특이합니다. 아마도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에도 불교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