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영취사 영산회상도, 혜식 등 : 정명희

사진. <영취사 영산회상도>

<영취사 영산회상도>, 혜식(慧式) 등, 조선 1742년, 비단에 채색, 364.0 × 242.2 cm, 1974년 황규동 기증, 신수2742
인도의 영취산

영취산이란 인도의 왕사성 부근에 있는 기사굴산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산의 정상이 독수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입니다. 영취산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은 열반 직전에 설한 최상승의 내용으로 손꼽힙니다. 당시의 설법을 기록한 것이 『법화경(法華經)』이며, 영취산에서의 설법모임을 도해한 불화를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합니다.

연꽃과 같은 청정한 가르침이란 의미의 『법화경』은 우리를 여래의 세계에 이르게 할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무수한 비유와 은유의 이야기가 담겨있으나 불화로 표현될 때는 『법화경』 서품(序品)에 등장하는 설법회의 모습이 주로 그려집니다. 선정(禪定)에 잠긴 여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삼매(三昧)에 들고, 그 몸에서 비추는 빛을 통해 청중들은 상서로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여래가 보인 상서로움에 대해 미륵보살이 그 의미를 묻고 침묵에 잠겨있던 여래가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경전은 시작됩니다.

그림으로 도해된 영취산의 모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발하며 여래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높은 수미단 위에는 선정에 잠겼던 오른 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이 있습니다.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오색 빛과 붉은 화염으로 화면에는 밝은 빛이 가득합니다. 무리의 외곽에는 불법이 설해지는 장소의 수호를 맡은 사천왕과 팔부중이 자리하였습니다. 인도의 고대신화에서부터 존재하던 가루라, 건달바 등 팔부중은 불교에서 사천왕이 거느리는 권속 중 하나로 지위를 부여받고 화면의 최상단에 자리하였습니다.

부처가 앉은 불단 앞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습니다. 지혜와 행동, 깨달음과 실천행을 상징하는 두 보살은 가르침의 내용이 담긴 경전과 연꽃을 들고 있습니다. 부처의 제자 중 수행[頭陀行]을 가장 잘 했다는 노승 가섭과 파르스름하게 깎은 머리의 젊은 비구 아난 역시 여래의 좌, 우측에 서 있습니다. 모두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설법하는 석가세존에게로 향하는 가운데서도 정면을 직시하는 두 보살이 눈에 띕니다. 하얀 천의(天衣)를 입은 관음보살은 손에는 청정한 물을 담은 정병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 쓴 보관에는 작은 여래가 모셔져 있습니다. 관음보살과 짝을 이루는 이는 세지보살입니다. 이들은 중생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 모습을 바꿔가며 구제하리라는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여줍니다.

사진. 설법회에 모인 인물들(왼쪽부터 팔부중, 사천왕, 관음보살, 아난존자, 가섭존자),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설법회에 모인 인물들(왼쪽부터 팔부중, 사천왕, 관음보살, 아난존자, 가섭존자),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경전에서는 석가의 설법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팔만 보살, 깨달은 자와 아직 깨닫지 못한 자, 사람과 사람이 아닌 무리 등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 들었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그림으로 표현될 때는 각각의 무리를 대표하는 권속이 나타납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 사이로 이미 깨달음을 이루어 여래의 경지에 서 있는 아라한, 나한(羅漢)의 개성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미혹함을 버리고 마음에 자유를 얻은 자들로, 진리를 본 사람의 강건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1742년 조선의 영취사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었던 영취사는 현재 폐사되어 전하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도 미미합니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덕유산에는 영각사, 영취산에는 극락암이 있다고 하며, 17세기 중엽 경 편찬된 『동국여지지』에도 영취사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조선 후기의 승려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의 문집인 『추파집』에 수록된 「안음영취사기」를 통해 영취사에서 영산회상도를 그리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안음영취사기」에 따르면 영취사는 현재의 경남 함양군에 해당하는 안음현에 있었던 사찰입니다. 사찰이 쇠락하자 1736년(丙辰) 가을, 주지 승려 보안(普眼)에 의해 사찰 중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찰의 퇴락이 땅의 기운이 길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생각되어 당시 극락암이 있었던 옛 터의 남쪽으로 옮겨 영취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건의 목적은 위로는 왕실의 수명을 기원하고 복을 빌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듯 불화에는 전패(殿牌)가 놓여 있습니다. 상단에는 구름 사이로 용이 모습을 드러내고, 붉은 바탕에 금 글씨로 주상, 왕비, 세자의 장수와 강녕을 비는 문구(主上三殿壽萬歲)가 기록되었습니다. 지방 관청에서 왕의 어진(御眞)을 대신해 왕의 상징물로 사용되던 전패는 사찰에도 봉안되었습니다.

사진. 전패,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전패,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조선시대 사찰에 대한 정부로부터의 공식적인 지원은 사라졌으나 왕실과 사찰이 맺어온 결연 관계의 전통은 지속되었고, 사찰은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복을 비는 자복사찰(資福寺刹)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영취사에서는 전패를 사찰의 불단에 놓는 것에 끝나지 않고, 불화의 하단에 그려 넣었습니다. 불화가 걸려 예배되는 한, 영취사는 왕실 인물의 천수를 기원한다는 사찰의 사회적 정체성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영취사의 재건 불사를 이끌던 승려 보안은 이곳에서 60해 이상을 살아온 노승으로, 필생의 업으로 사찰 중흥의 뜻을 세웠습니다. 1736년 뜻있는 사람들로부터 모연을 시작해, 1737년에는 선당(禪堂)을 짓고 1738년에는 승당(僧堂)을 완성하였습니다. 다음 해인 1739년에는 봉향각(奉香閣), 1740년에는 법당(法堂)을 완공하였습니다. 5년 여에 걸쳐 법당을 포함한 4채의 전각이 완성되었으나 사람들은 법당을 석가여래의 정토로 재현하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할 수 있는 불화를 갖추기를 염원하였습니다. 전각에서 이루어질 크고 작은 의식에서 현실의 도량을 영취산의 설법회로 재현할 수 있는 불화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웅전에 봉안될 영산회상도는 다시 두 해가 지난 1742년 4월 완성되었습니다. 하단부에는 그림을 제작한 일시와 화사, 영취사에 거주하던 승려들과 불화의 제작을 모연한 시주인의 명단을 금 글씨로 정성스레 적어 놓았습니다. 당시 불사의 성대함은 불화의 장중한 묘사를 반영하듯 '대영산大靈山'을 그려 봉안한다는 기록과, 불화 제작과 관련된 목록인 연화질(緣化秩)에 불화를 그린 화승을 비수회(毗首會)로 비유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탄생불,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탄생불,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비수회란 제석천(帝釋天)의 신하 중 하나였던 비수갈마천(毘首羯摩天)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비수갈마천은 건축, 조각 등 공장(工匠)을 맡아보는 천인으로, 중국 당대 제운반야(提雲般若)가 한역한 『대승조상공덕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忉利天)에 머물 때 우전왕이 지상에 여래가 없음을 한탄하여 여래의 모습을 닮은 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장인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비수갈마천이 장인으로 변해 불상을 만들어 주었기에, 이후 비수갈마천은 최초의 불상을 만든 이, 공장의 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우전왕을 위해 불상을 조성한 비수갈마천의 이름을 따 자신들을 비수회로 지칭한 점에서 영산회상도를 완성한 화승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업을 이끌던 수화사는 혜식(慧式)으로 ‘倻山龍眠 慧式’으로 기입되어 있어 그가 가야산 출신의 승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혜식과 함께 위순(偉順), 성청(性淸), 여영(如咏), 보○(普○), 성징(性澄), 양찬(良贊) 등 불화는 7명의 승려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이중 성청은 1755년 <국청사 감로도>에, 성징은 1767년 <통도사 괘불>의 제작에도 참여하였던 화승입니다. 1755년 <운문사 비로전 삼신불회도>에는 성청과 성징이 함께 작업하였습니다. 또 양찬은 1728년 인접한 무주 <안국사 괘불>의 제작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조선 땅에 실현된 이상적인 세계

영산회상도는 사명(寺名)을 극락암에서 영취사로 바꾸고 사찰 재건의 과업을 마친 후 그려낸 영취사의 가장 큰 예불화이자 영취사에 재현된 대영산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영산회상도를 구성하는 화면의 중심 축을 보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산회상도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여래가 보이는 상서로움과 설법에 귀 기울이는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시선도 석가 세존을 향해 집중됩니다. 여기에는 신도들의 희망과 바램이 총집결되어 있습니다. 화승들은 현실에 재현한 영산회상의 장엄을 악기를 연주하며 하강하는 천인과 많은 설법 청중,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로 표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불화의 도상적 성취는 빛을 통해 드러나는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낸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단에는 온 우주에 충만한 여래 가운데 탄생불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의를 벗고 왼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여래는 인도 마가다국에서 태어난 싯타르타, 즉 역사적으로 출현한 여래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은 후 하늘을 가리키며 이번 생이 마지막 생이며 다시는 윤회하는 인간의 몸을 받지 않겠다고 외쳐 여래가 되리라는 예언을 미리 보입니다. 상단의 탄생불과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동일한 존재입니다. 화승 혜식은 영취산의 석가모니불 위로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한 석가모니불의 도상을 영산회상도에 함께 담았습니다. 생멸(生滅)을 보인 석가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나타난 것일 뿐, 진정한 여래는 열반에 들지 않고 영취산에서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법화경』 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사찰의 승려와 신도들이 지향하던 존재의 모델이 불화에 표현된 것입니다.

사진. 석가모니의 탄생, <송광사 팔상도> 부분. 석가모니의 탄생, <송광사 팔상도> 부분.

사진. 공양물,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공양물, <영취사 영산회상도> 부분.

화면의 중앙에는 일상의 미혹함에서 벗어나 여래의 세계에 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영취산에 상주하는 석가가 보입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은 석가의 설법회로 집중되나 석가는 자비로운 시선을 내려 설법회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을 살핍니다. 그의 시선 속에서 그림을 발원한 이들은 마음의 평온을 얻었을 것입니다. 왕의 존재를 대신해 영산회상도 안으로 걸어 들어온 전패는 오늘날도 화려한 금빛 광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화가 왼성된 시기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불화의 완성을 두고 기뻐했을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불단 앞의 공양물 속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금 쟁반과 은기에 정성스레 담긴 석류, 가지, 복숭아 등 과실수들은 곡진한 마음을 담은 채 다섯 가지 빛을 발합니다. 여래의 세계, 정토의 장엄을 찬탄하듯 상단에는 비파와 장고를 든 동자가 악기를 연주하고, 설법회가 펼쳐지는 영취산에는 하늘에서 날린 꽃비가 살포시 땅 위를 덮고 있습니다.

영산회상도가 사찰에 봉안되었던 당시 이 그림은 종교적 신앙물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불화는 과거의 신념과 믿음,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적인 여래의 세계를 보는 가치관을 전해주고 있는 하나의 기념비입니다. 시각적으로 구현된 정토의 모습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에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상적인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영취사에 실현된 여래의 세계를 보고 뿌듯해했을 주지 보안을 비롯하여 지난 7년 간 영취사의 재건 불사를 완성한 사찰의 승려들, 불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시주하고 음식을 공양한 사람들, 이들은 사라졌지만 이 모든 이들의 희망은 영산회상도를 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1742년 영취사에서 일어났던 일과 사람들, 이들이 믿었던 존재의 진실, 지옥에서의 구제와 미혹함을 끊고 도달할 수 있는 여래의 땅에 대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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