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소중한 터전이지만, 늘 누구에게나 고되고 녹녹치 않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로부터의 잠시나마 탈출을 꿈꾸고 그 꿈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18세기를 살았던 조선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꾸었고, 그 꿈의 여정은 그림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그들에게 이상향은 정신적인 도피처이자, 어쩌면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별천지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인문(李寅文, 1745~?)은 10m에 가까운 가로로 긴 종이 위에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 불리는 그림은 이상향을 간절히 찾는 조선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 강산무진도
<강산무진도>는 횡권(橫卷)으로 비단 바탕에 먹과 담채로 그려졌습니다. 그림 부분의 크기만 해도 세로가 43.8cm, 가로가 856.0cm에 달하는 대작으로, 상당히 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5개의 비단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강산무진도’라는 제목은 장황의 겉면 제첨(題簽)에 쓰여져 있으나, 제작 당시의 것은 아닙니다. 즉 이인문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붙인 제목은 아니고 후대에 지어진 것입니다. 그림의 맨 끝에는 ‘이인문문욱도인야(李寅文文郁道人也)’, ‘김정희인(金正喜印)’ 등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문욱(文郁)은 이인문의 자(字)이고 도인(道人)은 이인문의 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을 줄여 쓴 것입니다.
신위(申緯, 1769~1847)는 “왕을 모시던 화사 중 뛰어난 이로 이인문과 김홍도(金弘道, 1745~?)가 있었는데, 덧없이 김홍도는 세상을 떠났고 이인문만 남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를 통해 18세기중후반경 김홍도와 이인문이 궁중화가 가운데에서는 손꼽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화가로, 비슷하게 궁중의 도화서 화원이 되어 나란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서로간의 친분도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그림을 통해 확인됩니다. 김홍도가 그린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에는 이인문이 감상하였다는 글이 남겨져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는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화제를 쓴 합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기는 달랐습니다.
김홍도와 이인문 모두 산수화면 산수화, 인물화면 인물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소화해냈지만, 김홍도는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선구적으로 그렸던 데에 반해,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산수화에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화가였습니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상반되는 취향의 그림에 각각 장기를 발휘했던 두 사람은 전대의 ‘겸현(謙玄)’이라 일컬어졌던 겸재 정선(鄭敾, 1676~1759)과 현재 심사정(沈師正)처럼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우리 땅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과 우리 현실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한 김홍도의 그늘에 가려, 심사정과 이인문은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유명세를 지금은 거의 다 잃은 듯 합니다. ‘한국적인 미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개성도 약하다는 지적은 김홍도의 그늘에 이인문이 가려져 버린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인문은 도화서 화원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인문이 그렇게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강산무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됩니다.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림일 뿐 아니라,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무쌍한 필묵, 드라마틱한 장관
이인문은 해주(海州) 이씨 기술직 중인 가문 출신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 자연옹(紫煙翁) 등이 있습니다. 그림에 관서된 호는 고송유수관도인이 가장 많으며 줄여서 도인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인문은 당대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는 관념적인 산수인물이나 정형산수를 즐겨 그렸습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송하한담’이라는 주제는 이인문이 즐겨 택했던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강산무진도>를 오른쪽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면, 만고불변의 자연과 그 자연의 섭리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강과 산만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깎아지를 듯한 기암절벽 사이사이까지 터를 잡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길을 끕니다. 적당히 안개를 이용하여 처리할 수 있는 공간에도 이인문은 집을 그리고 사람을 그려 넣었습니다.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인문답게 화폭에는 수백,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준법의 총망라에 있습니다. 준법은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과 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동양의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부벽준과 미점준 등 이렇게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도 드물 것입니다. 만년에 자신의 기량을 모두 표출해낸 것일까. 오른쪽 부분에서는 나지막한 산과 고요한 강줄기를 따라 얌전하고 평온한 준법으로 묘사되다가 왼쪽으로 진행될수록 점점 산세는 어느덧 험난해집니다. 그에 따라 준법도 부벽준 등을 사용하여 거칠고 과단성 있게 변합니다.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 그리고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묘사가 어우러져 시선을 옮길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장관을 보여줍니다. 그림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은 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입니다. 어느 한 곳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것 없이 구성요소는 다양함을 보여주고 필묵은 변화무쌍합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과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조선의 산과 조선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경치를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그림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단순히 ‘중국적인 그림’이라고만 보고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자연 본연의, 인간 본연의 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안복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우리 땅과 사람을 그린 ‘한국적 미감’의 그림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