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그 대상이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여 나를 잘 알고 믿어줄 벗이 있다면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이 위로를 받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모든 평가나 가치가 쉽게 흔들리고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돌처럼 견고한 지인과의 우정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힘겨운 일을 겪어 심신이 아픈 오랜 친구를 위한 변치 않는 우정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해서의 대표작 <묵소거사자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해서의 규범, 묵소거사자찬
‘묵소거사(黙笑居士)’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에는 침묵을 지키고 웃어야 할 때에 웃는다는 뜻으로 황산(黃山) 김유근(1785~1840)의 호입니다. 김유근이 이 호에 대한 글을 짓고 김정희가 해서체(楷書體)로 글씨로 쓴 것이 바로 <묵소거사자찬(黙笑居士自讚)>입니다. 김정희는 조선 말기에 활동한 대학자이며 서예가로서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행서, 예서 등 다양한 서체에 모두 능했는데, 그 중 일점일획을 정자체로 정확하게 쓰는 해서에 있어서는 구양순(歐陽詢, 557~641), 저수량(褚遂良, 596~658),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소식, 황정견, 유용, 옹방강의 영향도 일부 받았으며, 육조시대의 해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당나라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을 가장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정희의 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드물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데, 여기서 소개할 <묵소거사자찬>은 김정희 해서 중 규범이 될 만한 대표작입니다. 붉은 바탕의 냉금지(冷金紙)에 행간과 자간을 맞추기 위해 줄을 친 후, 단정하고 정중한 필치로 한 줄에 네 글자씩 모두 21줄에 82자를 해서로 쓰고 마지막에 검은 먹으로 ‘완당(阮堂)’, ‘김정희인(金正喜印)’ 인장을 찍었습니다.
줄을 잘 맞추어 한 자 한 자 정성을 담아 쓴 글씨입니다. 이처럼 정간(井間)에 글씨를 쓰는 것은 중국 당나라 때 유행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비석에서부터 발견됩니다.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의 발문도 줄 친 네모 칸에 해서체로 쓰여진 것입니다. <묵소거사자찬>의 해서는 가늘고 긴 모양새의 글씨체로 필획의 변화가 크고 다소 날카로운 필치입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움 속에 힘을 느끼게 하는 김정희의 해서 글씨의 기준이 되는 명작입니다. 중국의 구양순체를 골격으로 하고 안진경의 필법을 가미하여 강함과 여유로움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세한도> 발문의 해서와는 또 다른 맛입니다.
이 작품에 찍혀 있는 ‘완당’, ‘김정희인’ 인장으로 인해 ‘묵소거사’는 김정희의 호이고 <묵소거사자찬>은 김정희가 자신의 호의 의미를 적은 글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를 준비하면서 이 작품의 바탕지와 주변 둘레 비단 사이에 찍혀 있는 인장을 조사하여 글을 쓴 이가 김정희가 아니라 그의 벗 김유근일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 작품에 총 89개의 인문이 확인되는데, 상단과 하단의 바탕지와 둘레 비단을 연결하는 곳에 합봉인(合縫印)으로 ‘취옹(醉翁)’과 ‘황산(黃山)’이 각각 35번씩 찍혀 있습니다. 좌우측 비단 장황 부분에는 각기 다른 인장들이 각각 9개와 10개씩 찍혀 있습니다. 이 인장들은 육안으로 쉽게 판독하기 어려운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이 황산 김유근과 관련이 있으며 ‘묵소거사’는 김유근의 또 다른 호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인장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단에 합봉인으로 붉은 글씨에 돋을새김의 원형의 ‘황산’인이 찍혀 있고 좌측 비단 장황 부분의 가장 아래쪽에 흰 글씨를 오목새김 한 네모 인문 ‘김유근인’이 찍혀 있으므로 <묵소거사자찬>은 김정희가 써서 황산 김유근에게 주고 김유근이 자신의 인장으로 장황부분을 장식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유근인’ 바로 위에는 붉은 글씨의 돋을새김 ‘묵소거사’ 네모 인장이 있어서 ‘묵소거사’와 김유근의 연관성을 높여줍니다. 이외에도 우측 맨 아래쪽의 ‘옥경산방(玉磬山房)’과 좌측 위에서부터 네 번째 ‘옥경서재(玉磬書齋)’, 다섯 번째 ‘연경위희(緣境爲戲)’는 모두 김유근이 사용했던 인장입니다. 인장들의 인주색이 동일하여 같은 시기에 찍은 것으로 생각되므로 ‘묵소거사’를 포함해서 모두 김유근의 인장으로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또한 글의 내용이 말을 하지 않고 침묵과 웃음으로 일관한다는 내용인데, 이는 김유근이 1837년부터 1840년까지 실어증으로 고생했던 정황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인장의 분석을 통해 제시한 김유근이 ‘묵소거사’라는 호를 만들고 이에 대한 글을 짓고 김정희가 이를 썼다는 견해를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2007년에 등장했습니다.
김유근의 문집 『황산유고(黃山遺稿)』가 김유근 후손에 의해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에 기증되어 세상에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문집 권4에 수록된 「묵소거사자찬」은 이 글의 지은이가 김유근임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묵소거사’의 주인을 되찾은 것입니다.
김정희와 김유근의 석교지교
김유근(字 景先, 號 黃山.竹林)은 김정희,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함께 삼총사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어릴 적부터 깊은 우정을 나눈 인물입니다. 그는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 세력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이며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비 순원왕후의 오빠입니다. 당시 경주 김씨인 추사 집안과 안동 김씨인 그의 집안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김정희와 김유근의 시서화 교유를 통한 우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황산유고』에는 세 사람의 친분에 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김유근은 아래와 같이 그들의 돈독한 우정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나와 이재와 추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석교(石交: 금석처럼 두텁고 견고한 우정) 사이입니다. 서로 만나면 정치적 득실과 인물의 시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영리와 재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고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화를 품평할 뿐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슬퍼하며 실성한 듯하였다(…)도장은 그 사람의 성명과 자호가 모두 그곳에 있으니 마치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옛 그림 하나를 구하면 오른쪽 왼쪽 여백에 모두 두 사람의 도장을 찍어 얼굴을 대신하는 자료로 여겼다. 그러면 만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서로 친구의 분신으로 생각했던 인장이 <묵소거사자찬>에서는 실체를 밝히는 데에 열쇠가 되었습니다. 김정희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그가 쓴 글의 내용을 되새기면서 한 자 한 자에 마음을 담아 써내려 갔고 김유근은 자신의 인장을 손수 찍으면서 이에 화답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이 작품의 제작 시기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정희 50대 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30대 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의 내용과 관련지어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한 1837년이 이 해서 작품의 상한이고 그가 사망한 1840년이 하한됨을 알게 됩니다. 즉 이 작품의 제작 시기를 김정희 만 51세에서 54세로 좁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이 해서 작품은 김정희 50대 전반기 해서의 기준작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김정희와 김유근의 생전의 석교지교는 1840년 막을 내렸습니다. 1840년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고 김유근은 같은 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전혀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유배지에서 그의 부음을 들은 김정희는 통탄해했습니다.
當黙而黙,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黙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黙.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黙笑居士自讚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시중(時中: 그 때의 사정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하는 일)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름)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가 온다거나, 세상에서 벼슬하거나 아니면 은거를 결심할 시기가 온다. 이러한 경우 행동할 때는 천리(天理)를 위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인정(人情)을 거스르지 않는다. 침묵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을 때 웃는다는 의미는 대단하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알릴 수 있으니 침묵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중용의 도를 터득하여 감정을 발산하는데 웃는다 한들 무슨 걱정이 되랴! 힘쓸지어다.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화는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거사가 자신을 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