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매화초옥도, 전기 : 박해훈

‘매화서옥(梅花書屋)’ 또는 ‘매화초옥(梅花草屋)’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흔히 둘레에 눈송이처럼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서재에서 선비가 앉아 글을 읽거나 매화를 바라보는 정경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본래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송대의 임포(林逋, 967~1028)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사진. <매화초옥도>

<매화초옥도>, 전기, 조선 19세기 중엽, 종이에 엷은 색, 32.4 × 36.1 cm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사슴을 심부름꾼으로 삼다

화정선생(和靖先生)이라는 시호로 더 알려진 임포는 자연을 이상향으로 삼아 벼슬과 가족을 뒤로 한 채 절강성 항주 서호의 고산에 초옥을 지어 매화를 심어 놓고 20년 동안 은거하면서 마을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학과 사슴을 기르며, 술을 마시고 싶으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사러 보내고, 손님이 오면 학이 하늘로 날아올라 알렸다고 합니다. 집 주변에는 매화를 심어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았으며, 사슴을 심부름꾼으로 삼은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임포의 고사(故事)에 따라 매화는 은둔처사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사진. <매화서옥도>

<매화서옥도>, 전기, 조선 1849년, 삼베에 엷은 색, 97.0 × 33.3 cm

임포의 고사와 연관 짓지 않아도, 매화는 고려시대 이래 시화의 주된 소재일 정도로 많은 문인과 학자, 화가들이 애호하였습니다. 매화를 사랑한 학자로는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매화를 매형, 매군으로 의인화하여 인격체로 대우하였습니다. 죽는 날 아침에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였을 만큼 매화를 아꼈습니다. 어몽룡(魚夢龍, 1566~1617?)과 오달제(吳達濟, 1609~1637)는 고결한 매화 그림으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임포의 고고한 삶을 동경하는 선비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황기로(黃耆老, 1521~1575 이후)는 매학정을 지어 뜰에 매화를 심어 완상하였고, 학을 기르며, 호를 또한 고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하고 임포의 삶을 동경하면서 그를 소재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려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매화서옥도입니다. 특히 조선 말기에 많은 화가들이 앞 다투어 그릴 정도로 매화서옥도가 유행하였습니다. 당시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문사들과 많은 교유가 있었는데 이때 매화서옥도류의 회화가 전래되면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매화서옥도를 남긴 화가들이 대부분 김정희파라는 점에서도 짐작됩니다. 매화서옥도가 유행하면서 화가에 따라 임포보다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친구와의 우정을 표현하는 내용으로도 많이 그려졌습니다.

전기(田琦, 1825~1854)의 <매화초옥도>도 화면 오른쪽 아래에 적힌 ‘亦梅仁兄草屋笛中’이라는 글귀로 알 수 있듯이 초옥의 주인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과 그를 찾아가는 전기 자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전기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김정희파에서도 사의(寫意)적인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한 화가로 평가됩니다. 눈 덮인 흰 산, 잿빛 하늘, 눈송이 같은 매화, 산속 초옥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친구를 기다리며 피리를 불고 있는 초록빛 옷의 오경석과 화면 왼쪽 하단에 거문고를 메고 벗을 찾아가는 붉은 옷차림의 전기의 모습 등 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으며 색채의 대비와 조화 또한 매우 뛰어납니다. 산뜻하고 참신한 표현 속에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비슷한 구성이면서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진 작품도 있습니다. 긴 화면에‘Z'자 구도로 경물을 배치하였고, 상대적으로 산수의 비중이 큰데 간결한 필치로 눈 내린 물가의 쓸쓸한 풍경에서 점점이 눈송이처럼 화사하게 매화가 핀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제화시(題畫詩)와 관지(款識)가 있어 1849년에 그렸음을 알려줍니다.

雪意園林梅己花 西風吹起鴈行斜 溪山寂寂無人跡 好問林逋處士家 己酉夏日
눈 내린 숲에 매화가 피었거늘, 서풍이 불며 기러기가 날아가네. 산은 적적하여 사람 자취 없으니, 즐거이 임포처사의 집을 묻네.
- 기유년(1849) 여름

두 그림 중에서는 표현이 보다 대담하고 자신과 오경석을 그린 <매화초옥도>가 나중에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전기는 1854년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이 두 그림 외에도 여러 점의 매화서옥도를 남기고 있어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얼마나 ‘매화서옥’이라는 화제를 즐겨 다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매화서옥도

매화서옥도로 전기의 그림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작품입니다. 조희룡은 같은 김정희파이면서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전기를 매우 아꼈으며, 전기의 작품만큼이나 독창적인 매화서옥도를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두 작품이 있는데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나중에 그려진 것으로 판단되며 회화적 완성도도 높습니다. 두 그림 모두 산속의 매화에 둘러싸인 서옥과 그 안의 인물을 그렸는데 활달한 필치에 먹빛과 담채가 어우러진 참신한 화풍이 눈에 띕니다. 추사체를 방불케 하는 글씨도 그림에 잘 어울립니다. 조희룡은 매화서옥도 외에 새로운 화풍의 뛰어난 매화 그림을 많이 남겼으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影樓)'라고 이름 짓고, 호를 매수(梅叟)라 할 만큼 매화를 사랑한 화가였습니다.

사진. <매감도> <매감도>,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30.0 × 32.0 cm, 본관 7964

사진. <매화서옥도> <매화서옥도>,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06.1 × 45.1 cm, 간송미술관 소장

이외에도 많은 화가들이 매화서옥도를 남겼습니다. 김정희의 애제자였던 허련(許鍊, 1808~1893)도 <매화서옥도>를 남겼는데 역시 친구가 매화서옥을 방문하는 정경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였습니다. 이한철(李漢喆, 1808~1880)의 <매화서옥도>는 최근에 화면에서 그의 인장이 발견되어 확인되었으며 병풍으로 그려진 큰 작품입니다. 김수철(金秀哲, 19세기 활동)의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도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 특유의 감각적인 화풍이 돋보입니다. 이밖에 박기준(朴基駿, 19세기 활동) 등도 <매화서옥도>를 남겼으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습니다.

사진. 1. <매화서옥도> 허련 2. <매화서옥도> 이한철 3. <동경산수도> 김수철

1 <매화서옥도>, 허련,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1.0 × 28.0 cm, 개인 소장.
2 <매화서옥도>, 이한철,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색, 138.3 × 198.3 cm
3 <동경산수도>, 김수철, 조선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 119.0 × 46.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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