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걸작이 출현한 뒤의 미술은 어떤 모습일까요?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가장 뛰어난 예를 꼽아본다면 우리는 쉽게 석굴암의 조각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석굴암 이후의 불교조각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대표성을 가진 작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석굴암 조각이 의심할 바 없는 최고의 걸작이자 매우 유명한 작품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은 석굴암을 정점으로 점점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요? 석굴암 이후의 불교조각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갔던 것일까요?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서는 그 변화의 경계선에 있었던 작품 한 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3.4m에 달하는 당당한 위용을 뽐내는 이 화강암 불상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의 신라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광배를 거의 가릴 정도의 건장한 신체와 연화좌 위에 단정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의 미묘한 대조가 보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또, 전체적인 균형이 맞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딘가 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비례감, 정적이고 단정한 불신(佛身)과 달리 화려하게 조각된 광배와 대좌라는 상반된 요소가 하나의 상에서 보이고 있어 석굴암 이후의 불교조각이 나아갔던 새로운 시대를 엿보게 합니다.
중생의 어리석음[無明]을 치유하는 위대한 스승, 약사여래
이 상에 대한 기록이나 명문은 전하지 않지만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왼손에 작은 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 부처가 동방유리광정토에 머물고 있으며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라 불린다고 소개합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인 “Bhaisajya-guru-vaidurya-prabha”를 한역(漢譯)한 것으로, 줄여서 약사불 또는 약사여래라고 합니다. 마치 훌륭한 의사가 환자의 병을 잘 보고 알맞은 처방을 하듯이 부처가 중생의 어리석음[無知, 無明]이라는 병을 고치는 위대한 스승임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약사불은 수명 연장과 무병(無病), 신체적 고난의 제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기원의 대상이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불교도들에게 대단히 사랑받는 부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왕(?~647)과 재상 김양도(?~670)의 병을 고친 밀본(密本)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도무지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해 흥륜사의 스님까지 모셔왔지만 차도가 없었던 병을 밀본 스님이 『약사경』을 읽자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약사불상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7세기 중엽에는 경전이 유통되고 약사불상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약사불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였습니다.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755년에 주조한 분황사의 약사불은 그 무게만도 30만근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상이었습니다. 약사불은 금동불뿐만 아니라 석불로도 만들어져 번화한 도시의 사원과 산중의 사찰에 봉안되거나, 사방불(四方佛)의 하나로 탑에 새겨지는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이 상은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약사불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통일신라 최성기 조각의 여운을 간직한 불상
많은 연구자들은 이 상이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불상이 보여주는 양식 때문입니다. 석굴암의 본존불이 완성된 8세기 중반 이후, 신라 각지에서는 석굴암 본존불의 위엄 있고 장중한 멋을 따르고자 하는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를 채택하면서 조금씩 다른 양식을 창안하고 다음 시대로 나아갔습니다.
근엄하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과 풍만한 얼굴과 신체, 단정하게 조각한 옷주름은 이 불상이 여전히 이전 시기의 조각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팽팽한 신체의 긴장감과 힘을 표현한 것이 대단합니다. 이 상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상들에 비해 불신(佛身)의 크기가 상당합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무릎이 대좌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일 만큼 불신이 광배와 대좌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상들처럼 대좌에 맞추어 불상을 조각했다면 커다란 광배에 비하여 불신이 왜소해 보였을 것입니다. 불신을 크고 우람하게 조각한 덕분에 광배와 대좌, 불신의 비례가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릎과 어깨 폭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크고 당당한 신체에 비해서 짧고 뭉툭하게 표현된 목과 두 손은 전체적으로 웅크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어 이 상을 이전 시기의 조각과는 구분되게 합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옆에서 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런가하면 광배와 대좌는 화려해졌습니다. 광배의 바깥쪽에는 화염문을 두르고 안에는 연꽃과 화불(化佛)을 배치했습니다. 대좌 중대석의 안상(眼象)에는 향로와 공양인상(供養人像)을 조각했습니다. 이렇듯 정면 중심의 신체 표현,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는 신라 하대 조각에서 보이는 특징입니다. 즉, 이 상은 신라 조각 최성기의 여운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맞이했던 시기의 불교조각 양상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경주 남산(南山)의 바위를 법당(法堂)으로 삼았던 부처
이 상이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무렵으로 『경주 남산의 불적(慶州南山の佛蹟)』에서는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경성으로 옮기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이 상을 입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상이 원래 있었던 곳은 경주 남산 서남쪽 삼릉곡의 작은 절터입니다. 삼릉곡 입구의 솔숲을 지나 1㎞ 남짓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이 상이 봉안되었던 장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불상은 절벽과 큰 바위 사이에 다진 자그마한 터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불상이 있었던 주변 바위에는 지름 30㎝ 가량의 반원형 기둥 자리가 남아 있고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당초 이 상이 건물 안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은 보물 제666호 석조여래좌상에서 불과 4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 주변에 별도의 시설을 갖출만한 공간이 없어 삼릉곡을 따라 조성된 제6사지(寺址)의 일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남산 삼릉계곡에 있던 당시의 모습, 1915년 이전, 건판22655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1916년 이후, 건판25922
남산에 본격적으로 불교 사원과 조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남산의 절터는 147개 가량 된다고 합니다. 특히 이 불상이 있었던 삼릉곡에는 가장 많은 수의 불상이 봉안되었습니다. 우뚝 솟아 길쭉한 바위에는 늘씬한 관음보살상을 조각하고 너럭바위에는 여러 부처와 보살들을 새겼습니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 조성된 가람(伽藍)에는 별도의 탑이나 번다한 건물을 두지 않는 대신 자연 암석을 초석으로, 주변 숲을 기둥 삼아 석불상만을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이 불상이 있던 자리는 절벽 사이의 좁은 터로, 불상을 안치하고 예불을 올리기에 편안한 공간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불상을 만들고 봉안했던 사람은 별처럼 빛나던 왕성(王城)의 대찰(大刹)들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법당일 필요 없다고, 솔숲의 고요함과 조그마한 터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장쾌한 기암괴석으로 벽을 두르고 경주 분지의 너른 들을 마당으로 삼을 수 있는 경주의 남산이라면 상처받은 중생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약사여래가 있다는 동방유리광정토와 다를 바 없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