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소록」은 조선시대 강희안(姜希顔, 1417~1465)이 꽃과 나무의 특성을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원예서입니다. 강희안이 직접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 알게 된 특성과 재배법, 품종 등을 자세히 기술하여 세상에 대한 경륜과 조화의 뜻을 담았습니다. 「양화소록」은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稿)』 안에 함께 수록되었습니다.『진산세고(晉山世稿)』는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한 집안의 글을 모은 세고(世稿)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의 책으로, 강희맹이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형의 글을 모아 편찬하였습니다. 앞에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정창손(鄭昌孫)의 서(序)가 있고, 권1은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 권2는 아버지 강석덕(姜碩德), 권3은 형 강희안의 시문이 있고, 권4에는 1474년에 강희맹이 쓴 「양화소록서(養花小錄叙)」와 강희안의 「양화소록」 본문이 실려 있습니다.
시, 글씨, 그림에 뛰어났던 강희안
강희안은 자가 경우(景愚), 호가 인재(仁齋)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자매였습니다. 즉 아버지가 세종대왕과 동서 사이로, 그는 세종에게는 처조카이며 세종의 아들인 세조와는 이종사촌 간이었습니다. 그는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인수부윤, 호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48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세조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관곽을 부의로 내려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붙이고, 최항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달았으며,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관여하였습니다.
그는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나 자신의 흔적이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꺼려하여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양화소록」 안에서도 강희안 자신이 대나무를 좋아하여 그림을 그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김수녕이 쓴 행장에서는 “문장과 시부가 모두 그 정수를 얻었고, 전서・예서・해서・초서와 그림의 묘함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이나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도 그의 대나무 그림과 산수 열두 폭, <여인도(麗人圖)>, <경운도(耕耘圖)> 등을 거론하며 그림의 신묘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모두 글로만 전할 뿐입니다. 김안로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그가 작은 경치를 즐겨 그렸는데 벌레, 새, 초목, 인물들의 자태가 화려하지 않고 붓놀림이 성글고 거친 듯하지만 저절로 생기가 나고 여운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양화소록」을 언제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본문에 따르면 1449년에 부지돈녕이 되어 꽃 기르기를 일삼았다고 쓰고 있어 이 해로부터 그가 사망한 1465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동생 강희맹이 『진산세고』를 편집한 이후입니다. 강희맹은 편집한 정본(淨本)을 형의 친구인 김종직에게 주며 간행을 부탁합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1473년 발문을 써서 『진산세고』를 간행합니다. 1476년 강희맹이 진주목사가 되어 진주로 옮길 때 목판도 함께 옮겨 그 연유를 밝힌 「진산세고이진목발(晉山世稿移晉牧跋)」과 서거정의 발문을 덧붙여 같은 해 다시 간행하였습니다.
16종의 꽃, 나무, 괴석에 대한 이야기, 「양화소록」
「양화소록」에서 강희안은 직접 화초를 키우면서 알게 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본문은 모두 16종의 꽃과 나무, 괴석에 대해 서술한 부분과 꽃을 기를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일곱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화초에 대한 옛 사람들의 기록을 폭넓게 인용하고 이들의 품격을 논한 문장이나 시를 적절하게 보탠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강희안은 이 책을 쓰면서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중국의 여러 책자에 수록된 원예에 관한 글을 폭넓게 참고한 다음, 그것을 실제로 익히고 다듬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추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였습니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에 전하는 전문 원예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란 면도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정한 가치는 꽃과 나무의 품격과 상징성을 서술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천하를 다스리는 뜻을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강희안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양생법(養生法)’입니다. 지각도 운동능력도 없는 풀 한 포기의 미물이라도 그 풀의 본성을 잘 살피고 그 방법대로 키운다면 자연스레 꽃이 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받을 만한 품성으로 소나무에서는 장부 같은 지조를, 국화에서는 은일(隱逸)의 모습을, 매화에서는 품격을, 석창포에서는 고한(孤寒)의 절개를, 괴석(怪石)에서는 확고부동한 덕을 찾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덕을 지닌 꽃과 나무를 본성대로 길러서 언제나 눈에 담아두고 마음으로 본받을 수 있다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에 문제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꽃과 나무를 손수 키우며 그들의 본성을 살피고, 그 본성대로 키우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던 강희안의 마음은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식물조차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