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그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스승을 임명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양청(輔養廳)과 보양관(輔養官)입니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의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정조의 첫 번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1784년 1월,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으로 만나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입니다.
작가미상,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 조선 1784년, 비단에 색, 각 폭 136.5×57.0cm, 본관10804
두 돌 무렵 문효세자, 스승을 만나다
보양청에서는 원자가 먹을 음식과 입을 옷, 또는 서책의 공급과 관리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원자의 나이가 약 4세가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뀌고, 더욱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즉 『소학(小學)』, 『맹자(孟子)』 등을 배우는 본격적인 교육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보양청은 왕실의 계통을 이어갈 원자의 첫 번째 보육기관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효세자 보양청일기(輔養廳日記)』는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과 관련된 기록으로, 1783년 11월 18일부터 1785년 4월 3일까지 보양청에서 있었던 일들이 매일매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효세자는 의빈성씨(宜嬪成氏, 1753~1786)가 낳은 아들로, 정조의 첫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정조는 매우 기뻐했고, 아들이 두 살이 되던 1783년(정조 7년) 11월, 원자로 결정하였습니다. 문효세자의 보양관으로 우의정(右議政) 이복원(李福源, 1719~1792)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익(金熤, 1723~1790)이 낙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784년 1월 15일, 창덕궁 대은원(戴恩院)에서 문효세자와 보양관 두 명이 서로 인사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 행사를 그린 것이 바로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날의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원자(元子)와 보양관이 상견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대은원에 나아갔다. 원자가 동쪽에 서고 보양관 이복원·김익이 서쪽에 서서 보양관이 배례(拜禮)하고 원자가 답하여 배례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각신(閣臣)·승지(承旨)·사관(史官)이 입참(入參)하였다. 예가 끝나고서 선찬(宣饌)하고 보양관의 자제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벼슬시키라고 명하였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총8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폭에는 이복원이 쓴 서문(序文)과 7명의 관리들이 쓴 연구(聯句)와 각각의 차운시(次韻詩)가 적혀 있습니다. 제2폭부터 제6폭에 걸쳐 행사 장면을 담았습니다. 문효세자와 보양관이 등장하는 것은 제4폭입니다. 제7폭, 제8폭에는 행사에 참여한 25명의 좌목(座目)을 적었습니다.
문효세자의 보양관 상견례 행사는 국가적인 경사였고 따라서 이 행사를 주관한 보양청 관리들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서문을 써서 대대로 기념하고자 하였습니다.
"……칠언사운시(七言四韻詩)를 연구(聯句)로 짓고 또 그 시에 각각 한 수씩 차운하여 짓고, 화공을 불러 그 일을 그리게 하여 병풍 여덟 개를 만들어 일곱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주고 하나는 보양청에 둔다. 제공(諸公)의 부탁으로 복원이 서문을 쓰다. 시로는 부족하여 또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도 부족하여 또 서문을 쓰는 것은 이 세 가지 경사를 기록하여 대대로 전하는 보물로 삼으려 함이다.”
병풍은 총 8개를 만들었으며, 1개는 보양청에 남겨두고 7개는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행사를 기념한 시를 병풍에 남긴 김치인(金致仁, 1716~1790), 김상철(金尙喆, 1712~1791), 서명선(徐命善, 1728~1791), 정홍순(鄭弘淳, 1720~1784), 이휘지(李徽之, 1715~1785), 이복원(李福源, 1719∼1792), 김익(金熤, 1723∼1790)이 바로 병풍을 나누어 받은 그 일곱 명이 아닐까 합니다.
18세기 후반 궁중행사도의 중요한 사례
문효세자와 보양관 두 명의 상견례 행사가 치러진 곳은 창덕궁(昌德宮) 대은원(戴恩院)입니다. 창덕궁 대은원은 창덕궁의 대표적인 편전인 선정전(善政殿) 동남쪽 부속 건물로, 원래는 문무관(文武官)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무를 보던 정청(政廳)입니다. 건물의 지붕 모양이 다른 궁중행사도와 달리 건물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의 방위는 위가 서쪽, 아래가 동쪽입니다. 일반적인 궁중행사도에서 위가 북쪽인 것과 다른 것입니다. 원자의 방석은 화면에서 아래쪽(방위상 동쪽)에 배치되고 서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하들이 빙 둘러서 있고, 십장생도로 추정되는 병풍이 둘러져 있습니다. 보양관들의 자리는 원자 맞은편 서쪽 벽에 위치하고 원자를 향해 마주보고 있습니다. 인물이 앞쪽 방석으로 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배례를 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궁중행사는 행사가 진행되는 전각 앞 계단에서 뜰에 이르기까지 임시로 덧마루[보계(補階)]를 설치하고 백목장(白木帳)을 둘러 공간을 구분하였으며, 그 위에는 대형 차일을 칩니다. 그러나,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실내에서만 치러진 행사였기 때문에 이러한 구조물은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행사장면이 그려진 제4폭은 유달리 크게 그려졌으며, 화면의 위쪽(방위상 동쪽) 끝에 병풍을 쳐서 막았고, 아래쪽(서쪽)은 막다른 담으로 막혀 있으며, 멀어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의 원근법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인물의 표현도 특징적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행사도와 비교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해 8월에 치러진 행사인 문효세자 책례(冊禮)를 그린 <문효세자 책례계병>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1년 뒤인 1785년에 친정(親政) 행사를 마치고 그린 <중희당친정계병(重熙堂親政契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과 비교해 보면,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에 인물의 개성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즉 조선시대 일반적인 궁중행사도에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며 인물을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적으로 그린 반면,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에서는 청색, 녹색, 연녹색으로 미세하게 구별하여 표현한 관복과, 서대(犀帶), 삽은대(鈒銀帶) 등으로 구별하여 묘사된 관대 등 인물의 관직별 복식의 특징까지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수염이 좀 더 많이 난 사람과 그에 비해 덜한 사람을 구분하여 그렸고, 다양한 얼굴형과 표정을 볼 수 있으며, 서 있는 자세 또한 제각각으로 그렸습니다. 건물 바깥쪽에 그려진 선비들이 갓 아래에 털모자를 덧쓰고 있어, 행사가 겨울 1월에 진행되었음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 또한 궁중행사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섬세한 계절 표현입니다.
비단의 뒤에서 배채를 가한 채색기법
박물관에서는 병풍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인물의 얼굴, 복식, 건물의 벽채, 실내 바닥 등에 적극적인 배채(背彩) 기법(技法)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 궁중기록화에 사용된 배채의 사례를 파악하였음이 중요합니다.
앞에서 하늘색과 담홍색으로 그린 옷은 뒤에서 흰색으로 배채하였는데, 좀더 밝고 은은하게 발색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행사가 벌어지는 대은원 건물 실내 바닥도 건물 바깥의 지면과 구별하기 위해 뒤에서 흰색을 칠하여 밝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궁중 행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서문과 행사 장면을 그린 행사도, 행사에 참여했던 관원들의 좌목이 남아있는 점, 원자와 보양관의 상견례 행사를 그린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궁중행사도라는 점, 구도나 인물의 표현기법, 채색기법 등에서도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는 점 등에서 매우 주목되는 작품입니다. 인물의 비례가 커지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인물의 동작과 개성의 반영, 계절에 따른 복식 표현이 가능했던 것 또한 이 병풍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