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간다라의 보살상 : 김혜원

아름다운 젊은 청년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입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신체 비례, 사실적 세부 묘사는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을 연상시킵니다. 머리 위에 얹은 보석 끈, 화려한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는 묘사된 인물이 고귀한 신분임을 암시합니다. 팔, 다리, 코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여전히 당당하고 기품 있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은 무엇을 형상화한 것이며, 어디에서 제작되었을까요?

보살상, 간다라, 2-3세기, 편암, 높이 116.8cm, 증7013 보살상, 간다라, 2-3세기, 편암, 높이 116.8cm, 증7013

보살을 표현한 조각

우선 이 조각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까요? 이는 불교에서 숭배하는 신(神),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살’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원래 ‘보살’이라는 용어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이전까지의 석가모니를 가리켰지만, 그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석가모니의 출가 이전과 전생까지를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보살이라는 명칭은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동시에 다른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살상의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얼굴, 단단한 근육이 느껴지는 우아한 신체, 몸의 굴곡이 강조되는 얇은 옷자락 표현에서 당대 최고 장인의 솜씨가 느껴집니다. 물결치는 듯한 머리카락과 여러 가지 장신구도 섬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상(像)으로 표현할 때 부처가 간단한 옷을 걸치고 있는 반면, 보살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입니다. 석가모니가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 말하자면 세속인 가운데 가장 고귀한 신분을 모델로 했기 때문입니다. 목에는 굵은 보석을 박아 만든 짧은 목걸이를 하고 그 위에 U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목걸이를 걸쳤습니다. 머리에는 작은 구슬과 보석으로 이어 만든 끈을 둘렀습니다.

정면에서 볼 때의 입체감 있는 모습과는 달리 측면에서 보면 다소 납작해 보입니다. 튀어나온 부분을 별도로 만들어 부착하기도 했는데, 오른팔의 파손된 면이 매끈하고 팔 아래쪽에 홈이 있어 오른팔 끝부분을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다른 불상을 참고할 때, 손갖춤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을 밖을 향해 든 시무외인(施無畏印)이었을 것입니다. 엄격한 정면관(正面觀) 위주의 이러한 상은 주로 감실(龕室)에 안치되었습니다.

보살상 세부 보살상 세부

간다라의 문화적 토양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간다라(Gandhara)’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중국 문헌에서는 이를 ‘건타라(乾陀羅)’, ‘건태라(健馱邏)’ 등으로 칭했습니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분지가 그 중심이며, 넓게는 스와트, 탁실라, 카불 분지, 잘랄라바드 일대를 포괄합니다. 오래전부터 ‘인도’의 일부로 간주되었지만, 외래문화와 접촉이 매우 잦았던 지역입니다.

이 조각상이 제작된 2~3세기 간다라는 쿠샨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쿠샨 제국은 북방에서 남하한 유목민 월지(月氏)의 다섯 부족 중 하나인 귀상(貴霜, 쿠샨)의 구취각(丘就卻), 즉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세운 나라입니다. 2세기 전반 카니슈카 왕 재위기에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일부, 타림 분지 남부, 인도 북부를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쿠샨의 문화는 풍부하고 다채로웠습니다. 물론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남아시아, 서아시아, 그리스·헬레니즘의 요소가 복합된 문화적 토양이 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기원전 4세기에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왕의 동방원정을 계기로 그리스·헬레니즘 문화가 전해졌고, 기원전 3세기 중엽에는 서아시아에서 흥기한 파르티아가 박트리아(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위치)를 침략하면서 서아시아 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는 북방 유목민 샤카(Śaka)와 파르티아 계통의 군주들이 이곳을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풍토에서 제작된 불상에는 여러 미술 전통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상을 볼 때 먼저 눈에 띠는 점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조각과의 유사성입니다. 얼굴과 신체의 특징뿐만 아니라 사실적 표현 방식도 닮아 있습니다. 한편, 가장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 꼽히는 스와트 출토의 일부 조각은 인도 북부 마투라(Mathura) 지역의 불상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또한 여러 불상이 지닌 정면관을 위주로 한 모습과 자세는 서아시아 조각상을 연상시킵니다. 현재 불상 제작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간다라 불상을 보면서 우리는 다양한 미술 전통에 대한 그들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와 풍부한 지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상의 탄생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열린 태도는 간다라에서 비롯된 ‘불상의 탄생’이라는 혁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불상의 탄생’을 큰 혁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불상이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기원전 5세기부터 긴 시간이 흐른 뒤인 기원후 1세기에야 비로소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흔히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는 독립상 형태의 불상을 만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의 생애를 묘사한 이야기 부조에서도 부처를 보리수나 발자국, 스투파, 법륜(法輪), 빈 대좌(臺座)와 같은 상징물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금기에 대해 학계에서는 불교가 석가모니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었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존재를 물질적 형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습니다.

400여 년에 걸쳐 지속된 관습은 기원후 1세기 간다라와 더불어 인도 북부에 위치한 마투라에서 불상이 등장하면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간다라와 마투라는 모두 전통적인 불교의 중심지, 즉 석가모니가 생전에 활동했고, 성지(聖地)가 집중되어 있으며, 교단이 처음으로 형성된 갠지스 강 중류 지역과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부처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는 권위 있는 전통을 극복하고 불상의 탄생이라는 혁신적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했던 조건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불상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종종 제기되는 문제는 마투라와 간다라 중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20세기 전반에 활발했던 이에 대한 논쟁은 유럽중심주의적 시각과 인도 국수주의의 대립이라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전자를 대표한 알프레드 푸셰(Alfred Foucher, 1865~1962)는 간다라에서 불상이 창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에 익숙한 이들이 인도·그리스풍의 불상을 제작하면서 외래적 영향이 불상의 탄생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자의 대표 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 1877~1947)는 불상의 창안에 대한 논의에서 외래적 영향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비판하면서, 외래 요소에 대한 논의에 앞서 인도 미술 자체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애정 어린 헌신, 충성을 의미하는 ‘박티(bhakti)’를 바탕으로 나가(nāga), 약샤(yakṣa)와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를 형상화한 상(像)과 마투라 지역의 초기 불상이 형식적, 양식적으로 연장선상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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