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삼현수간첩(三賢手簡帖)》-세 선비의 마음을 담은 편지:허문행

《삼현수간첩》, 조선 1560~1593년 작성, 1599년 편집, 38.5×27.5cm, 보물, 건희52

《삼현수간첩》, 조선 1560~1593년 작성, 1599년 편집, 38.5×27.5cm, 보물, 건희52

《삼현수간첩(三賢手簡帖)》은 1599년(선조 32)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주고받은 친필 편지를 모아 만든 첩으로, 원(元)‧형(亨)‧이(利)‧정(貞) 4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첩은 세 선비가 나눈 솔직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어 그들의 우정과 관심사 뿐만 아니라 세 선비의 필체(筆體)까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삼현수간첩》의 구성과 전래

송익필의 문집인 『구봉집(龜峯集)』 「현승편(玄繩編)」에는 《삼현수간첩》과 동일한 내용의 편지가 여럿 실려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세 선비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첩의 제목이 원래 ‘현승편’이었고 후대에 ‘삼현수간’이라는 이름이 붙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현수간첩》은 원첩 23통, 형첩 26통, 이첩 26통, 정첩 23통 등 모두 98통의 편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구봉집』, 성혼의 문집인 『우계집(牛溪集)』, 이이의 문집인 『율곡전서(栗谷全書)』에서 살펴볼 수 없는 내용의 편지가 15통이나 실려있습니다.

순서 보낸 사람 받은 사람 편지 수(통)
1 송익필 성 혼 20
이 이 7
기 타* 9
2 성 혼 송익필 49
3 이 이 송익필 13
합계 98

표 1 《삼현수간첩》의 발신자 및 수신자
* 김장생, 허공택, 조헌, 이산보, 정상인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가리킴

첩의 각 면에는 ‘황강사계창주고가(黃岡沙溪滄州古家)’라는 인문(印文)이 찍혀 있습니다. 황강은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 1526~1582)의 호, 사계는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호, 창주는 김장생의 손자 김익희(金益熙, 1610~1656)의 호입니다. 이를 통해 《삼현수간첩》이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였던 사계 김장생 가문에서 전해 내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선비의 우정과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이 자세하게 담겨있는 《삼현수간첩》은 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삼현수간첩》에 남아 있는 인문 ‘황강사계창주고가’

《삼현수간첩》에 남아 있는 인문 ‘황강사계창주고가’


세 선비의 우정

송익필, 성혼, 이이는 16세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한 학자이자, 당시 정치 세력 서인(西人)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세 선비는 서로를 ‘도덕과 의리로 맺어진 벗[道義之交]’이라 일컬었으며, 송익필 자신도 《삼현수간첩》 서문에서 “나는 성혼, 이이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吾與牛溪栗谷最相善]”고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세 선비는 편지로 서로의 건강을 염려했습니다. 오랜 벗이 자신의 병을 방치하자 의원을 찾아가기를 권하고,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는 약재를 보내 서로가 건강하기를 바랐습니다.

“질병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원이나 약을 쓸 수 없는 시골 사람이야 분수대로 사는 것이 좋지만, 형님은 의원이나 약을 쓸 수 있는데도 도리어 쓰지 않고 있으니 검소한 생활이라고 칭찬할 수도 없습니다. ··· 바라건대 명의(名醫)와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亨 12번째 글)

“온욕과 냉욕을 생각해보니 모두 위험한 방법입니다. 약을 먹고 몸조리를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이이가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亨 23번째 글)

“전염병 치료약은 아직 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병세가 처음 나타났을 때 인동초(忍冬草)를 진하게 달여 서너 차례 땀을 내면 완전히 낫는다고 들었습니다. 청원향(淸遠香) 몇 개를 멀리서나마 보냅니다.”

-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利 15번째 글)

또한 성리학 이론이나 저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는데,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는 답신을 보내며 학문의 꽃을 피워나갔습니다.

“형님께서 『격몽요결(擊蒙要訣)』 간행을 허락했다고 들었습니다. 『격몽요결』 가운데 속례(俗禮)와 관련해서는 저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글을 다듬어 바로잡으심은 어떠하실지요? 그렇지 않다면 한 집안의 자제들이 볼만한 책이지, 널리 행해지는 결정된 예(禮)는 아닐 듯합니다.”

-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亨 22번째 글)

“일전에 (제가 지은) 『격몽요결』의 잘못된 곳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는데, 자못 저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다음 인편(人便)이 도성으로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 이이가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利 2번째 글)

한편 벗이나 지인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처음의 마음가짐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당부하거나, 관리(官吏)로서 실천해야 할 일을 알려주며 우정을 이어나갔습니다.

“형님께서 대제학에 임명되고 또 앞으로는 재상이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반드시 도로써 하고, 사소한 것이라도 이익을 도모하거나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利 13번째 글)

“정치란 백성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뜻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공평해야만 살필 수 있습니다. ··· 관직에 있는 자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해야지 터럭 한 올만큼이라도 편향된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송익필이 영남 안찰사 이산보(李山甫)에게 보낸 편지(貞 15번째 글)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 《삼현수간첩》 利, 13번째 글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 《삼현수간첩》 利, 13번째 글

세 선비의 우애를 칭찬하다

17세기 문인이자 관료였던 장유(張維, 1587~1638)는 《삼현수간첩》을 열람하고 「송구봉의 현승편 뒤에 쓰다[書宋龜峯玄繩編後]」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장유는우연한 기회에 《삼현수간첩》을 열람하고 세 선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계곡집(谿谷集)』, 조선 17세기, 31.4×19.2cm, 국립중앙박물관, 구6300 『계곡집(谿谷集)』, 조선 17세기, 31.4×19.2cm, 국립중앙박물관, 구6300

장유, 「송구봉의 현승편 뒤에 쓰다」, 『계곡집』, 「잡저(雜著)」 76 장유, 「송구봉의 현승편 뒤에 쓰다」, 『계곡집』, 「잡저(雜著)」 76

“「현승」 한 편을 통해 노선생님들이 주고받은 언론(言論)을 얻어 보았는데, 얼마나 성실하게 강론하며 문의했고, 얼마나 우의(友誼)가 돈독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율곡 선생의 말은 솔직하고 평이(平易)했고, 우계 선생의 말은 공경할만하고 지극히 간절했다. 구봉 선생은 마음가짐이 준결(峻潔)하고 자세가 매우 신중했으며 말이 논리적이고 학식이 넓었으나 가끔 타당하지 못한 점도 눈에 띄었다.”

또한 《삼현수간첩》에는 “형님이 수시재상(隨時宰相)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수시재상은 수시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이니, 형님께서 이런 모습을 용인해서야 되겠습니까?”(利 16번째 글)라는 편지가 있는데 바로 송익필이 이이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를 본 장유는 “서로 일깨워주는 선배들의 도리를 접하노라면 공경하면서도 무서울 뿐이다”라고 하여, 세 선비의 우애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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